[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 ‘비트코인은 강했다’ 저자] 철도나 인터넷처럼 결국 나중에는 생산적인 산업으로 판명 난 비즈니스도 초창기에는 투기적 열풍에 휩싸여 사회문제가 됐다. 암호화폐 광풍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우려는 당연 타당하다.
그러나 비트코인 회의론과 비트코인 단정론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비트코인 회의론은 화폐의 본질이나 블록체인의 기술적 특성에 대해 숙고하고 나서도 이 새로운 기술이 인류 복지 증진에 기여할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트코인 단정론은 비트코인은 화폐가 아니며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접근한다. 단정론자들은 새로운 기술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빠르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불균형적인 양태만 짚어내 튤립 거품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단정론자들의 말마따나 튤립 거품 때는 뿌리라는 실체라도 있었지만 비트코인은 아무것도 없으니 어쩌면 전혀 다른 현상일 수 있고 따라서 당분간 열린 틀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단정론자들이 비트코인을 평가할 때 기준으로 삼는 화폐라는 개념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화폐는 뚜렷한 선으로 테두리를 그을 수 있는 명쾌한 개념이 아니다. 정부가 인정하는 교환의 매개물인 원화나 달러가 화폐의 기본적인 속성을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다고 믿는 경제학자는 많지 않다.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경제학자나 법학자 누구나 동의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타당한 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경제학자 루드비히 폰 미제스는 이 질문을 둘러싼 논쟁이야말로 경제학이 별로 기여한 바가 없는 주제라고 지적했다. 화폐 현상은 부조리해 보일 정도로 난해하며 신비한 현상이다.
◆내재 가치는 원래 별 의미 없어
폐쇄적인 공간에 화폐가 없이 모인 사람들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화폐 현상을 창안해 낸다. 난민촌이나 교도소에서는 담배가 가장 손쉽게 화폐로 부상한다. 보관과 운반이 쉽고 개비로 나눠 교환할 수 있고 개비들 간의 가치가 비슷하고 위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미군들로부터 유입된 말보로가 강력한 지불 수단이었던 적이 있다. 일단 어떤 상품이 화폐의 지위를 얻고 나면 본래의 상품 가치는 의미를 잃는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들에게도 담배는 화폐로서 의미가 있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마저도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라 개비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다. 흡연자와 비흡연자가 평가하는 담배의 가치가 동일해진다. 신비한 일이다.
미제스는 금의 내재 가치를 따지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라며 경계했다. 화폐 현상은 인간만이 갖고 있다고 간주되는 추상 능력의 산물이다. 무언가가 인간에 의해 화폐로 간주되면서 그것이 갖고 있는 물성, 즉 반짝거리거나 찢어지거나 하는 속성은 의미를 잃기 시작한다. 산술이 가능한 추상적 수치로 존재하며 물성은 이 추상화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로만 의미가 있다.
담배도 마찬가지다. 간단한 사고 실험으로 화폐의 추상성을 증명할 수 있다. 담배를 화폐로 사용하는 고립된 섬을 가정한다. 이 섬에서 마지막 흡연자가 죽었다. 이제 담배를 상품으로서 소비하는 이가 한 명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섬은 담배를 계속해 교환의 매개물로 사용한다. 화폐로서의 담배의 지위는 흡연자의 존재 유무와 관련 없기 때문이다.
미제스는 상품화폐와 신용화폐 그리고 법정화폐라는 분류를 제안했다. 금이 상품화폐라면 금의 차용증은 신용화폐다. 법정화폐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 정부가 찍어내는 종이돈이 대표적이다.
비트코인은 발행자가 없고 어떤 상품과의 일대일 교환도 보장하지 않으니 신용화폐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찍어낸 것도 아니고 금처럼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지도 않다. 비트코인은 이 분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화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하지만 화폐에 대한 인간 경험의 다양성은 비트코인 이전에도 미제스의 분류를 뛰어넘은 적이 있다. 바로 카우리 조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개 화폐를 원시인들의 화폐쯤으로 여긴다면 역사 교육에 문제가 있다. 몰디브에서 생산되는 카우리 조개는 적어도 1000년 정도 화폐 기능을 했고 무려 20세기까지 통용됐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의 저서‘대항해 시대’는 카우리 조개는 국제무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됐다고 기술한다. 19세기 인도의 한 지방 장관이던 리차드슨의 기록에 따르면 쿠타크 지방에서 화폐의 유통량은 금화 1, 은화 24, 동화 4, 카우리 11의 비율이었다고 한다.
카우리 조개의 내재 가치는 바닥에 깔아서 배가 기울지 않게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데 사용하는 정도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와 인도 그리고 중국의 윈난 지역에 걸쳐 대항해 시대 무역의 소액 결제에 사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카우리 조개의 모양이 단일하고 몰디브 지역에서만 생산된다고 여겨졌으며 모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화폐의 공통된 특성은 위조의 어려움과 생산량의 한계라는 사실을 아무것도 없는 카우리 조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카우리 조개의 가격은 지역마다 크게 달랐고 계절에 따라서도 변화했다. 금이나 은도 마찬가지다. 가격이 시시각각 변한다. 즉 ‘안정된 가격’이란 법정화폐의 독점적 사용을 국민에게 강요해야 하는 정부가 만들어 낸 허구에 가깝다. 왜냐하면 사실 법정화폐의 가치야말로 장기적으로 가장 불안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우리 조개는 금·은·구리 및 다른 어느 금속보다 유통량이 많았지만 19세기 후반 유럽인들이 잔지바르 지역에서 또 다른 종류의 조개 화폐를 대량으로 들여온 이후 가치가 낮아졌고 결국 화폐로서의 의미를 잃고 퇴장했다는 것이 주경철 교수의 주장이다.
법정화폐가 정부의 자제력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면 금이나 은 그리고 카우리 조개는 누군가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없다는 물리적 한계에 근거한다. 상품화폐가 법정화폐보다 더 낫다는 주장은 생산의 물리적 한계가 정치적 의사결정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이지 금의 내재 가치를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비트코인의 생산량과 증가 속도에는 어떤 불확실성도 없다. 그런 점에서 비트코인은 카우리 조개보다 낫고 카우리 조개는 베네수엘라나 짐바브웨이의 정부가 찍어내는 법정화폐보다 낫다.
[돋보기] '시뇨리지’ …법정화폐의 슬픈 역사
달러나 파운드는 모두 금이나 은의 무게 단위에서 유래한 말이다. 화폐는 민간의 오랜 관습이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금이나 은의 무게나 순도를 표준화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민간의 동전 주조를 금지하면서 금화나 은화의 발행은 정부의 독점 사업이 됐다. 민간에서 통용되는 금이나 은보다 순도를 낮춰 발행하고 나머지를 정부가 챙겼다. 그것이 바로 시뇨리지다.
정부 이외의 그 누구도 시뇨리지를 뽑아내지 못하게 하려고 동전 외관을 둘러 톱 모양의 홈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둘레를 몰래 갈아 동전이 날로 작아졌고 이를 막기 위한 장치인 이 톱 모양이 동전의 상징이 됐다. 정부에 의해 강요된 가치가 아니라 금화가 무게 단위로 거래된다면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민간은 정부의 순도 낮은 금화를 통용하고 순도 높은 금화는 숨겨 놓았다. 악화가 양화를 쫓아버린다는 유명한 그레셤의 법칙이다. 그레셤의 법칙은 정부의 물타기가 결국 시장의 적응으로 희석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금화의 실질가치와 명목가치가 달라지면 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정부는 계속해 순도를 낮춰 동전을 주조했고 결국에는 금이 하나도 섞이지 않는 지경이 됐다.
정부는 또한 실체 없는 종이돈을 유통하기 위해 금 소유도 막아야만 했다. 화폐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통제로 귀결된다는 것이 금본위론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정부는 금화에 했던 일을 비트코인에 할 수 없다. 국가의 통제권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비트코인에 놀라워하는 이유다.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