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서스틴베스트 등 5개 업체 경쟁…주총 이슈마다 목소리 높이며 존재감 부각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3월 16일 KT&G 주주총회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백복인 KT&G 사장의 연임 건을 두고 찬성표와 반대표가 확연하게 갈렸기 때문이다. 2대 주주인 IBK기업은행은 백 사장의 분식회계 의혹 등을 이유로 ‘반대’ 의사를 밝힌 상황에서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는 백 사장 재임 기간 동안 빠른 실적 개선을 근거로 ‘연임 찬성’을 권고했다.
결과는 백복인 사장의 연임 성공이었다. KT&G의 지분 53.18%를 보유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백 사장의 연임에 손을 들어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내 기업들의 개별적인 사정을 일일이 파악하기 힘든 만큼 ISS와 같은 의결권 자문사들의 권고안에 의존할 때가 많다. ISS의 ‘연임 찬성’ 권고안이 이번 주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국내 기업들의 주주총회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상정되는 안건의 대부분이 대주주 측의 입김에 좌우되던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주주들이 실질적으로 각 사안마다 칼자루를 쥐는 곳이 늘고 있다. 주주들이 한 표 한 표가 중요해진 상황에서 시장의 시선은 자연스레 ISS와 같은 ‘의결권 자문사’에 쏠리고 있다.
의결권 자문사(proxy advisory firm)는 주요 기업의 주총 안건을 분석한 뒤 기관투자가에게 찬성 또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민간 회사를 말한다. 다만 이들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조언’이다. 기관투자가들이 이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얘기다.
◆스튜어드십 코드로 존재감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총 시즌과 맞물려 의결권 자문사들의 입김이 커지고 있는 데는 최근 ‘스튜어드십 코드’의 도입과 관련이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을 말한다. 연기금·보험사·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가들은 고객의 돈을 관리하는 대리인으로 투자한 기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주주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6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발표한 ‘스튜어드십 코드의 7개 원칙’ 중에는 기관투자가들의 ‘공시 강화’와 ‘의결권 자문사 선정 등을 통한 전문성 강화’ 등이 포함돼 있다. 기관투자자들로서는 주총 안건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공시하는 것은 물론 그 결정에 책임이 강화된다. 그러다보니 의안 분석 과정에서 보다 전문성을 기하기 위해 의결권 자문사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 중인 의결권 자문사는 5곳 정도다.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는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사모펀드 베스타 캐피털 파트너스(Vestar Capital Partners)가 소유하고 있는 외국계 의결권 자문사다. 전 세계 기관투자가 1900여 곳을 대상으로 기업 지배구조 등 주총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 등을 자문하고 있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중 시장점유율 60%로 압도적 1위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 영국 런던, 일본 도쿄 등 전 세계 13개국에 18개 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국내에는 상설 사무소가 없다.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ISS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ISS 외에 국내 기업의 주요 주총 안건에 대해 ‘영어’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대안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5사5색’ 의결권 자문사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은 2002년 설립된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를 확대·개편한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국내 상장 기업의 기업 지배구조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평가·조사·연구, 지속 가능성 보고서 작성·검증 서비스 등을 수행하고 있다. 현 정부가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스튜어드십 코드 제도를 국내에 도입하고 운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도맡고 있다. 의안 분석 서비스는 2012년부터 시작했다.
2006년 설립된 민간 의결권 자문회사인 서스틴베스트는 ‘사회책임투자’라는 큰 틀 아래 국내 기업들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평가와 투자 전략 컨설팅 등을 제공하고 있다. 2013년 민간 기업 중에서는 처음으로 의안 분석 시장에 뛰어들었다. 가장 최근인 2014년부터 의안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대신지배구조연구소는 대신금융그룹의 대신경제연구소 산하에 있다. 안상희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본부장은 “ISS도 첫 출발이 모건스탠리 산하 사업부였다”며 “우리 역시 같은 모델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ISS는 모건스탠리 계열사인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의 자회사로 출발해 2008년 매각됐다.
2001년 설립된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참여연대 출신 전문가들이 주축이 된 단체다. 소액주주 운동을 이끌었던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설립에 참여했다.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고 소액주주들의 의결권을 강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시민운동의 성격이 강한 만큼 국내 대표적인 상장사들의 의안 분석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무료로 공개한다. ◆같은 안건·다른 결론, 평가 기준은
이처럼 의결권 자문사들마다 태생에 따른 각기 다른 성향이 두드러지다 보니 같은 사안을 두고 종종 결론이 갈리기도 한다.
올해 주총 시즌 최대의 이슈를 꼽으라면 단연 하나금융투자 김정태 회장의 3연임 여부였다. 3월 23일 열린 하나금융투자의 주총 전부터 의결권 자문사들을 중심으로 ‘장외 전쟁’이 치열했다.
먼저 서스틴베스트와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은 ‘반대’를 권고했다. 김 회장의 ‘셀프 연임(회장이 사외이사를 뽑고 그 사외이사가 회장 연임에 찬성해 회장 스스로 임기를 연장하는 것)’ 논란뿐만 아니라 최근 금융감독원 채용 비리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등 주주 가치를 훼손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반면 ISS는 김정태 회장의 3연임에 ‘찬성’의견을 던졌다. 김 회장은 외환은행과의 합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하나금융을 사상 최대 실적으로 이끌었다는 것이 주요 근거다. 하나금융지주의 외국인 주주 비율은 74%가 넘는다. 주총 결과 역시 외국인 주주들을 등에 업은 ISS의 승리로 판가름이 났다.
같은 날 주총을 가진 KB금융지주는 ‘노동자 추천 사외이사제 도입’이 가장 큰 이슈였다. KB국민은행 노조는 2월 말 주주 제안 형식으로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를 사외이사로 추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ISS는 반대 의견을 제시한 반면 서스틴베스트와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찬성 의견을 밝히며 대결 양상을 보였다. ISS는 “KB금융지주의 설명에 따르면 HR 전문가인 권 교수보다 재무·법·소비자 보호 분야의 전문성 보강이 시급해 보인다”며 “권 교수가 금융사를 포함한 상장사 이사회 활동 경험이 없어 성과를 평가할 수 없고 KB금융 전체의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분명히 제시돼 있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이에 비해 서스틴베스트는 “권 후보는 사내이사(윤종규 회장)가 관여하고 있는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의 입김과 독립된 추천 과정을 거쳐 상정된 후보라는 점에서 KB금융 이사회 내에 보다 효과적인 ‘견제와 감시’ 기능이 작동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사외이사로서 결격 사유나 특이 사항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KB금융지주 역시 노동자 추천 사외이사제 부결로 결론을 맺었다. 하나금융투자에 이어 외국인 투자자 지분이 높은 국내 금융기업들은 외국계 의결권 자문사인 ISS의 입김을 넘어서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방증한다.
의결권 자문사들의 권고안은 기본적으로 각 사마다 제정된 ‘가이드라인’에 입각해 평가한다. 사안의 중요도에 따라서는 내부적으로 ‘심의전문위원회’를 구성해 별도의 회의를 거쳐 최종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다만 이들이 기준으로 삼고 있는 ‘가이드라인’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의결권 자문사들에는 이 같은 평가 기준이 핵심적인 ‘영업 비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방문옥 팀장은 “상정되는 안건별로 관련된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고 자체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 또는 기관투자가의 독자적인 가이드라인에 비춰 분석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과 주주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 의결권 자문 시장의 규모는 연 10억~20억원 수준으로 파악된다. 이제 막 시장이 형성되는 초기 단계다. 최근 의결권 자문사들이 비교적 강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의 본격화를 앞두고 ‘시장 선점’을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제기되는 이유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외국인 투자자를 포함해 기관투자가들이 주로 투자하는 국내 상장사들은 코스피200, KRX300 등 200~300개 기업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며 “향후 의결권 자문사들 간의 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의결권 자문사들의 의안 분석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국내 상장사들과 기관투자가들 또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현재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고 있는 메리츠자산운용의 펀드매니저는 “안건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공시하고 책임져야하기 때문에 예전에 비해 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의결권 자문사의 권고안을 마냥 따르는 것보다 내부적으로 의안 분석에 더 많은 인력과 시간을 투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대부분은 의결권 자문사들의 권고안을 따를 때가 많다”며 “그에 반하는 의견을 내면 그만큼 탄탄한 논리가 뒷받침돼야 하고 특히 이를 문서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의견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주총의 숨은 권력” 우려도
상장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특히 의결권 자문사들의 목소리가 커진 만큼 이들에게 기업의 내부 사정을 설명하고 자료를 제공하는 데 훨씬 더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한 대기업 기업홍보(IR) 담당자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ISS의 입김이 워낙 세다 보니 전략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며 “ISS의 지사가 있는 일본 도쿄까지 날아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들이 상당수”라고 말했다.
박한성 상장사협의회 선임연구원은 “아직까지 크게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며 “하지만 앞으로 대응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관련 문의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의결권 자문사들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빠른 속도로 이들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의결권 자문사들이 국내 상장사들의 주요 안건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송 선임연구원은 “지금까지는 국내 상장사들의 주총에서 10% 정도의 지분을 보유한 기관투자가들의 목소리가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며 “최근의 변화는 이 10%의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다만 이와 같은 변화가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금융 당국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그는 “투자자문업자로 등록돼 있는 미국의 의결권 자문사들과 달리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은 컨설팅업으로 등록돼 있어 금융 당국의 규제 대상이 아니다”며 “금융 당국 차원에서 의결권 자문사들이 최소한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담보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는 등의 규제가 확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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