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커지는 무역 적자에 ‘조기 레임덕’ 위기…달러 강세 선호 발언 이어져
‘강달러 환영’ 트럼프의 달라진 외환 정책
(사진)래리 커들로 미국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달러 강세가 미국 국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트럼프 정부가 추구하는 통상정책의 핵심은 국익 우선의 보호주의다. 보호주의는 무역 적자를 줄이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출범 이후 트럼프 정부는 ‘달러 약세’를 핵심 수단으로 무역 적자를 줄이는 데 노력해 왔다. 인위적인 자국 통화 평가절하는 대표적인 근린 궁핍화 정책(beggar-my-neighbor policy)으로, 극단적인 보호주의 수단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릴 정도로 확대된 무역 적자다. 지난해 미국의 무역 적자는 직전 연도 대비 10% 이상 늘어났다. 올해 1월에는 566억 달러로 6개월 연속 확대 추세다.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달러 약세 정책이 더 이상 무역 적자를 개선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제시돼 주목된다.
‘강달러 환영’ 트럼프의 달라진 외환 정책
◆미국, J커브 효과 장기화 우려

특정국이 무역수지를 개선하기 위해 단행하는 평가절하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마셜-러너 조건(Marshall- Lerner condition)’을 충족해야 한다. 국제무역 이론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다뤄지고 있는 이 조건은 외화 표시 수출 수요 가격탄력성과 자국 통화 표시 수입 수요 가격탄력성을 합한 값이 ‘1’을 넘어야 평가절하가 무역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마셜-러너 조건을 미국과 한국 간 교역에 적용하면 미국이 달러 약세를 통해 한국과의 무역수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달러 약세로 미국 상품의 원화 표시 가격이 내리면 한국에 대한 수출 물량이 크게 늘어나는 대신 달러 약세로 한국 상품의 달러 표시 가격이 올라가면 한국으로부터의 수입 물량이 크게 줄어들어야 가능하다는 의미다.

문제는 미국의 수출입 구조가 마셜-러너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수출 상품은 비가격 경쟁력이 높기 때문에 수출 가격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다. 반면 미국의 수입 상품은 소득 불균형이 심한 상황에서 ‘있는 계층’은 수입품 가격 변화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하위 계층’의 수입품은 대체할 미국 제품이 적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마셜-러너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황에서 달러 약세를 계속 추구하면 초기에 나타나는 ‘J커브 효과’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J커브 효과는 특정국의 통화가치가 평가절하되면 수출입 가격 변화가 즉시 일어나지만 이에 따른 수출입 물량이 변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일정 시점까지는 무역수지가 더 악화된다는 이론이다.

3년 전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상 이후 ‘슈퍼 달러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달러 약세가 지속돼 왔다. 특히 작년 이후 하락 속도가 더 빨라져 달러 인덱스가 1년 동안 11% 이상 떨어졌다. 원·달러 환율도 한때 1060원 선이 무너졌다. 트럼프 정부의 달러 약세 정책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달러 가치는 ‘머큐리(mercury)’로 표현되는 경제 요인과 ‘마스(mars)’로 지칭되는 정책(혹은 지정학적) 요인 간의 괴리가 심해져 왔다. 미국 경기는 1990년대 후반 이후 20년 만에 ‘골디락스(고성장 속 저물가)’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로 회복세가 견실하다. 2월 이후 조정 국면을 맞고 있지만 증시도 활황세다.

머큐리 요인만 따진다면 달러 값은 강세가 돼야 한다. 하지만 마스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는 달러 값은 트럼프 정부의 달러 약세 정책과 국익 우선의 보호주의로 중국 등과 같은 최대 보유국이 달러 비율을 낮추는 과정에서 하락 속도가 빠르다. 베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대 교수는 “달러 값을 따질 때 정책 요인과 안보 프리미엄이 크게 작용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머큐리 요인으로 달러 값이 강세가 돼야 하는데 마스 요인으로 약세를 보인다면 교역국으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미국 국익만을 생각하는 달러 약세 정책으로 확신을 갖기 때문이다. 평가절하는 대표적인 근린 궁핍화 정책으로, 극단적인 보호주의 수단에 해당한다.

미국 이외 교역국이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달러 약세에 맞대응해 자국 통화 값을 떨어뜨리는 ‘환율 전쟁 방안’이다. 이는 주도국인 미국과 후발국인 해당 국가 모두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져 세계경제가 침체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국제 결제와 외화 보유에서 달러의 비율을 낮추는 탈(脫)달러화 방안으로 해당 국가보다 미국이 더 충격을 받는다.

◆관세 및 비관세 장벽 강화 예상

현재 국제통화 제도는 1976년 킹스턴 회담 이후 시장의 자연스러운 힘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국제 협약이 뒷받침되지 않아 ‘없는 시스템(non-system)’ 혹은 ‘젤리형 시스템(jelly system)’이라고 지칭된다. 이 때문에 달러 중심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이전보다 느슨하고 불안한 형태로 지금까지 유지돼 왔다.

시스템이 없는 국제통화 제도에서는 기축통화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더라도 이를 조정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이 과정에서 달러 위주의 브레튼우즈 체제가 안고 있었던 문제, 즉 △기축통화 유동성과 신뢰도 간 ‘트리핀 딜레마(triffin’s dilemma)’ △기축통화국의 과도한 특권 △글로벌 불균형 조정 메커니즘 부재 △과다 외화 보유 부담 등이 더 커진다.

트리핀 딜레마는 1947년 벨기에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 제시한 것으로, 유동성과 신뢰도 간 상충 관계를 말한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경상수지 적자를 통해 통화를 계속 공급해야 한다. 하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대외 부채 증가로 신뢰도가 떨어져 공급된 통화가 환류되는 메커니즘이 작동되지 않아 미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골자다.

트럼프 정부는 기로에 놓여 있다. 머큐리 요인에 해당하는 만큼 달러 강세를 용인한다면 브레튼우즈 체제가 재차 강화되면서 세계를 대상으로 ‘화폐 발행 차익(global seigniorage)’을 계속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이익만 앞세워 달러 약세를 고집한다면 미국 이외 국가가 종전처럼 환율 전쟁보다 탈달러화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트럼프 정부는 무역 적자를 줄여 놓아야 조기 레임덕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 1년 만에 트럼프 대통령이 ‘달러 약세’에서 ‘강세’를 선호한다고 방침을 바꾸고 래리 커들로 미국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달러 강세가 미국 국익에 부합된다고 발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달러 약세를 더 이상 가져가지 못한다면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통한 무역 적자 축소 노력은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