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이시선 82랩스 대표…1년 만에 기업 가치 350억원
재미로 시작한 숙취 음료로 미국에서 ‘잭팟’ 터뜨렸죠”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아홉 살 때 이민 갔던 청년은 2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 친구들과의 술자리 다음날, 숙취로 고생하던 청년은 친구가 건네준 숙취 음료를 접하게 된다. 숙취 음료의 효능에 감동한 청년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에 뛰어들게 된다.

스타트업 얼라이언스가 주최한 ‘실리콘밸리의 한국인’에서 4월 3일 만난 이시선 82랩스 대표의 이야기다. 지난해 8월 창업한 82랩스는 창업 1년도 되지 않아 350억원의 가치를 지닌 기업으로 성장했다. 또 자체 개발한 숙취 음료 ‘모닝 리커버리’를 통해 8개월 만에 누적 매출액 40억원을 달성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처음부터 창업이 목적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처음엔 미국 친구들에게도 숙취 음료를 전파하려는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일종의 ‘취미 생활’이었죠.”

◆‘최고의 비율’ 위해 실험 대상 자처

82랩스의 ‘모닝 리커버리’는 이 대표의 발품으로 탄생했다. “한국 숙취 음료를 처음 접한 후 온라인으로 구입해 제품을 살펴봤죠. 공통적으로 ‘헛개’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 후 이 대표는 헛개와 숙취의 관련성을 연구한 징 리안 박사를 알게 됐고 리안 박사와 함께 숙취 음료 제조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어떤 비율에서 최고의 숙취 음료가 만들어지는지 실험하기 위해 스스로를 ‘마루타’로 삼기도 했다. 어떤 종류의 술을 몇 잔 마셨는지, 다음날 특정 비율의 숙취 음료를 먹었을 때 컨디션은 어땠는지 매일 기록한 것이다.

“매일매일 술을 마시고 다음날 개발한 숙취 음료를 마시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심장에 무리가 오기도 했죠.” 자체 실험과 시장조사로 만족할 만한 숙취 음료 제조법을 찾은 이 대표는 한국의 제조 공장들과 접촉해 마침내 ‘모닝 리커버리’를 탄생시켰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숙취 음료 개발이 창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미국 숙취 음료 시장의 잠재력이 크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 대표는 페이스북·우버와 가장 최근에는 테슬라모터스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한 경험이 있다. 상품 출시 전 데이터를 모으고 연구하는 것은 그의 전문 분야다.

이 대표는 미국 음주 시장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했는데, 미국의 성인 20%가 1주일에 술 15병을 마신다는 걸 알게 됐다. 여기에 ‘행오버(숙취)’로 미국 시장에서 발생하는 연간 1700억 달러의 생산성 저하도 숙취 음료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또 이 대표는 본격적으로 ‘모닝 리커버리’를 출시하기 전 웹사이트를 통해 가수요를 알아봤는데 무려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매 의사를 밝혔다. 시장의 수요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했다.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직원의 창업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테슬라모터스에서 일하던 이 대표는 ‘만약 창업에 실패하면 다시 회사로 돌아오라’는 약속을 하고 창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직원이 창업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그것을 ‘배신’이라며 비난하지 않아요.” 이 대표는 테슬라를 그만두기 전 테슬라 동료와 창업 성공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눈 후 퇴사를 결정했다.

“세계적 IT 기업들이 몰려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이직이나 퇴사는 너무나 흔한 일이에요. 오히려 직원 개인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능력을 키우는 게 향후 업계 전체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죠.”

◆“생활 속 필수품으로 자리 잡게 할 것”

초창기 82랩스는 ‘세이프(SAFE : Simple Agreement for Future Equity)’ 방식으로 50만 달러의 초기 자금을 확보했다. 세이프는 ‘장래 지분 확보를 위한 간단한 계약’이라는 뜻으로, 2013년 액셀러레이터 Y컴비네이터가 처음 제시한 투자 방법이다.

아이템만 가진 초창기 스타트업은 기업 가치를 산정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세이프는 초기 기업의 가치 산정을 추후로 미룬 후 일단 자금을 마련해 준다. 장래에 지분을 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투자자에게 주는 것은 기존 투자 방식과 비슷하지만 만기와 이율이 없어 창업자가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아도 투자 자금을 얻을 수 있다.

“82랩스의 창업 자금을 모으러 다니던 시기에는 시드 머니를 받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숙취 음료’라는 아이템만 있지 이 회사가 얼마나 성장할지 저 스스로도 측정할 수 없었거든요.”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 보편화된 세이프 방식을 통해 이 대표는 82랩스라는 사명, 숙취 음료라는 아이템만 갖고 투자금을 이른 시기에 확보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82랩스는 슬로우벤처스·500스타트업·스트롱벤처 등으로부터 800만 달러(약 85억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사세 확장을 서두른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82랩스와 같은 B2C 기업은 상품 브랜드를 소비자들이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미국에서 콜라 하면 ‘코카콜라’, 에너지 음료 하면 ‘레드불’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 대표는 ‘모닝 리커버리’를 숙취 음료의 대명사로 대중의 머릿속에 심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계적 제약사들이 숙취 음료 시장에 언제 뛰어들지 모르고 그들을 막을 수도 없죠. 그전에 ‘모닝 리커버리’를 생활 필수품(commodity)으로 자리 잡게 만들 거예요.”

이 대표는 올해 ‘모닝 리커버리’의 오프라인 유통망을 늘리고 공격적 마케팅을 펼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활발한 마케팅으로 ‘모닝 리커버리’의 점유율을 늘릴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단기간의 이익쯤은 포기할 각오도 돼 있죠.”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