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유틸리티 토큰’ 역시 증권법 적용이 대세…‘합법적 생태계’ 만들어야 발전 빨라
[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 '스마트 콘트랙;신뢰혁명' 저자] 미국 증권감독위원회(SEC)는 비트코인 가격이 절정이던 지난해 12월 암호화폐 공개(ICO)를 진행하던 스타트 업체를 설득해 모은 돈을 투자자들에게 돌려주고 ICO를 중지하도록 했다. SEC의 지시에 따르는 대가로 이 회사 관계자들은 증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는 것을 면제받았다.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먼치(Munchee)는 사전 토큰 판매(pre sale)를 통해 1500만 달러를 모금하려고 했다. 당시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에 대한 투자 관심을 고려해 보면 초과 달성도 가능한 액수였다.
먼치가 판매하려고 한 먼토큰(MUN tokens)은 고객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에 레스토랑 평가를 올리면 보상으로 주어진다. 식당 체험기를 올리는 파워 블로거들이 자신들이 좋게 평가해 준 바로 그 식당으로부터 보상받기 때문에 ‘블로거지(공짜 밥을 먹기 위해 엉터리 식당을 홍보해 준다는 은어)’로 전락하는 것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회사나 제품에 대한 평가는 수익과 직결된다. 이런 평가를 누가 보상하는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공인회계제도 등을 포함해 ‘평가받는 이’가 ‘평가하는 이’에 대해 보상할 수 있는 시스템은 태생적으로 도덕적 결함을 안고 출발한다. 비트코인을 만든 이들은 이런 도덕적 결함이 ‘신뢰받는 강력한 존재’에 대한 특별 대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탄생의 지적 토양이었다.
먼토큰 생태계에서는 평가에 대한 보상을 대중이 한다. 평가자는 자신의 평가가 대중으로부터 얻는 신뢰에 비례해 보상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한다. 따라서 그들은 정보의 신뢰성에 좀 더 많은 무게를 둘 수 있다.
먼토큰은 블록체인과 토큰 생태계가 혁신하고자 하는 광고 유통의 미래상을 부분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유형의 토큰들은 결국 정직한 뉴스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가짜 뉴스와 광고성 기사들을 정리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기자들은 광고주나 정부보다 ‘시간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사실 그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므로 인터넷은 좀 더 투명하고 신뢰받는 인류의 집단지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 먼치를 비롯해 암호화폐 주창자들이 결제 기반 인터넷(internet of money)이 현재의 무료 접근, 광고 기반 인터넷보다 한 단계 성숙한 민주적 시스템이라고 믿는 이유다. ‘결제 기반 인터넷’이 바로 비트코인의 다른 이름이다.
-SEC가 ICO 중지시킨 ‘먼토큰’
먼토큰은 유가증권이 아니라 화폐를 지향한다. 다른 스타트업들은 ICO에 대해 규제적인 미국 SEC의 간섭을 피해 스위스·지브롤터·싱가포르에서 ICO를 진행한다. 이에 비해 먼치는 미국에서 ICO를 당당하게 추진했다. 그 이유는 먼토큰이 유가증권에 해당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SEC가 2017년 7월 ICO 토큰의 유가증권 판단 기준을 호위 테스트로 명시한 뒤 유틸리티 토큰에 관심이 모아졌다. 유틸리티 토큰은 서비스나 재화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표현할 때가 많다. 하지만 발행 주체들이 상상하는 생태계 내에서 이 토큰들은 화폐처럼 유통된다. 사실 유틸리티 토큰의 진정한 특징은 발행자들이 뭔가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사의 지분이나 채권이 아니므로 누구도 변제해 주거나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가치를 보장하는 주체가 없지만 비트코인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형성되듯이 유틸리티 토큰들도 적절한 생태계에서 유아기를 보내고 나면 비트코인과 같은 지위에 오를 수 있다.
제이 클레이튼 SEC 의장은 2월 상원 청문회에서 모든 ICO를 무허가 유가증권 발행으로 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정교하게 설계한 일부 유틸리티 토큰들은 호위 테스트를 만족시키지 않는데도 규제 당국의 수장이 이렇게 자신하는 이유 중 하나는 ICO를 통해 일부 토큰을 사전 판매하기 때문이다. 토큰 발행자들은 사전 판매로 얻은 수익으로 토큰이 유통되는 생태계를 조성하겠다고 약속하다. 바로 이 때문에 단순한 소비재 판매가 아니라 투자 계약에 해당한다. 당장 사용할 수 없는 토큰을 구입하는 이들이 유통시장에서의 가격 상승을 기대한다는 사실도 부인하기 어렵다.
클레이튼 의장은 폐쇄된 회원들 간에 책을 돌려보기 위해 구성한 북클럽의 회원권과 새로운 형태의 서점 체인 설립 자금을 모금하기 위한 회원권 판매 행위를 비교하며 비유적으로 유틸리티 토큰과 유가증권의 차이를 설명했다. 즉 유틸리티 토큰이라는 개념은 협소하다. 이미 존재하는 재화나 서비스에 대한 접근 권한으로서 폐쇄적인 커뮤니티에 한정돼 판매되고 유통시장이 활발하지 않아야 한다. 이 제한은 아직 판례를 통해 축적된 기준이 아니라 ICO를 규제하려고 하는 당국의 주장일 뿐이다.
하지만 발행자 자체가 없어 규제 대상이 없는 비트코인과 달리 발행 주체가 있는 ICO는 규제 당국의 추적을 원천적으로 따돌릴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결국 ICO는 정부들과의 협력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
ICO의 성지가 된 스위스의 금융 당국도 ICO 토큰을 유가증권으로 본다는 방침을 밝혔다. 스위스 금융감독청(FINMA)은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발행되고 이전되는 토큰을 결제 토큰, 유틸리티 토큰, 자산 토큰 등 세 가지로 분류했다. 그리고 발행자(개발자)와 관련해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 결제 토큰(암호화폐)과 달리 유틸리티 토큰은 특성에 따라 유가증권에 해당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특히 유틸리티 토큰을 사전에 판매하는 행위는 증권 관련 법률에 저촉된다.
ICO를 통해 혁신적인 사업에 시드머니를 투입하려는 이들은 증권법에 저촉되지 않는 유틸리티 토큰의 개발과 함께 정부들과의 협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국경이 없는 블록체인의 속성을 활용하면 개방적 정부와의 합법적인 조율을 통한 출발이 복잡한 생태계를 구성해 현행법을 우회하는 것보다 더 빠른 길로 접어드는 선택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돋보기] 크립토밸리를 향한 각국의 경쟁
스위스 금융 당국이 암호화폐 공개(ICO) 규제 조치를 취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암호화폐 투자자인 벤처캐피털 ‘DFJ’의 설립자 팀 드레이퍼는 스위스가 중요한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스위스로 몰려들고 있는 젊고 활력 있는 스타트업들이 지브롤터나 싱가포르 혹은 케이맨제도 같은 역외(offshore)로 발길을 돌릴 것이라는 뜻이다.
반도체 공장 하나 없지만 정보기술(IT) 기업들에 대한 우호적 환경 조성만으로 ‘실리콘밸리’로 성장시킨 사례를 모델로, 블록체인과 ICO에 대한 개방정책을 통해 크립토밸리를 꿈꾸는 정부들이 생기고 있다.
미국의 와이오밍 주는 미국 최초로 ICO 토큰을 유가증권에 대한 규제로부터 면제해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올해 3월 주의회를 통과한 법안은 특정한 조건을 충족한다는 전제에서 ICO에 대한 증권법 적용을 면제해 준다. 유럽에서 비트코인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던 프랑스 정부도 블록체인 관련 산업을 적극 포용하려는 정책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무분별한 ICO에 대한 법률적 규제는 불가피하지만 토큰 경제라는 새로운 금융 산업의 성장을 인정하고 젊고 혁신적인 기업들에 기회의 창을 열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고 봐야 한다. 특히 국경의 의미가 없는 블록체인의 속성을 고려할 때 덮어놓고 불법화를 선언한 한국 정부의 태도가 과연 혁신 친화적인지 재고해 볼 시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