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 ‘스마트 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암호화폐 공개(ICO)가 뜨거운 단어로 부상하고 있다. 텔레그램이 최근 ICO를 통해 17억 달러를 모았다. 텔레그램은 서비스를 시작한 지 5년도 채 안 됐지만 세계적으로 2억 명의 사용자가 활발하게 사용하는 메신저다. 이런 거대한 사용자 기반을 근거로 텔레그램 오픈 네트워크(TON)를 추진하려고 두 차례에 걸쳐 자금을 모았다. 3차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토큰의 사전 판매이기 때문에 페이스북의 기업공개(IPO) 당시처럼 투자자들의 관심이 뜨겁다. 하지만 텔레그램은 3차 ICO를 진행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2조원에 가까운 돈이 모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반인들의 투자 러시가 동반할 규제 당국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에서 진행되는 ICO에 대해 사실상의 규제 당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증권감독위원회(SEC)가 텔레그램의 ICO를 묵인할지가 이후의 향방을 결정짓는 방향타가 될 수 있다. 모든 ICO가 무허가 증권 발행이라고 간주한 SEC의 경고를 비웃기라도 하듯 ICO는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다. 2017년 60억 달러였는데 전년에 비해 40배나 증가했다. 2018년 들어 1분기에만 65억 달러를 초과했다. 이대로라면 250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 규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 SEC로서는 결정적인 한 방으로 고삐를 죄어야 하는데 마침 텔레그램의 막대한 ICO 모금액은 SEC를 회피하기 어려운 선택의 기로로 끌어들인 셈이다.
텔레그램은 ICO 주간사 법인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두고 제한된 투자자나 기관만을 상대로 자금을 모았다. 또 ICO 내역을 SEC에 보고하기도 했다. 만약 SEC가 침묵한다면 이는 사후승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텔레그램으로서는 대놓고 도발하는 대신 SEC가 체면을 지키면서도 묵인하도록 배려했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투자 규모가 컸고 비례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는 게 문제다. 텔레그램의 ICO가 묵인된다면 향후 더 거대한 기업들이 텔레그램의 선례를 따라 사후승인을 받을 수 있는 ICO를 디자인하려고 할 것이다.
SEC로서도 ICO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정치적 부담이 지나치게 크고 실효성도 부족하다. SEC가 텔레그램의 ICO를 저지한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ICO라는 새로운 자금 조달 기법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국면이 다가올 것이다.
-ICO의 기본은 ‘동호회 만들기’에서 출발
전통적인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은 전형적인 ICO를 정상적인 투자로 인식하기 어렵다. 채권이나 증권처럼 일정한 지분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당이나 의결권을 요구하지 않으니 투자 받는 기업에 일방적으로 유리해 보인다. ICO의 기본형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전형적인 ICO는 공익적인 커뮤니티를 창안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누군가 히말라야를 등반할 동호회를 모으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때 모인 자금을 누군가의 수익이나 부채로 간주하지 않듯이 ICO로 모인 자금은 커뮤니티 생태계를 구성하는 데 쓰인다. 투자자들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제안에 자금을 투입하고 ICO 주체들은 제안을 성공시키는 데 이 자금을 투입한다. 그래서 이 자금이 제안자의 수익이나 부채로 인식되지 않는다. ICO의 주체가 토큰의 판매금을 회사 운영자금이나 부채 청산에 사용한다면 이는 ICO 세계에서는 일종의 배신행위다.
투자의 반대급부로 주어진 토큰은 생태계가 실현되면 일종의 화폐로 부상하기 때문에 가치가 크게 증가한다. 이런 구조가 가능한 이유는 블록체인의 변경 불가능성과 가시성 때문이다. 한번 정해진 발행량을 주체 측이 임의로 변경할 수 없고 생태계의 많은 부분이 투명하게 공개된다. 프로젝트가 성공해도 주체 측이 화폐량을 늘리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으므로 투자자는 작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큰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VIP 회원권을 발행해 야구경기장의 건설 자금을 모았다면 회원권은 VIP룸에서 파티를 하며 야구를 관람할 수 있는 권리 증서인 셈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ICO는 누군가 야구라는 운동경기 자체를 창안하는 과정이다. 야구라는 흥미로운 게임의 규칙과 시스템을 설계하겠다고 제안하면 투자자들은 야구라는 새로운 스포츠가 탄생되기를 바라며 토큰을 산다. 제안자는 모은 돈으로 야구 경기 시스템을 구축한다.
그렇다고 제안자가 모든 구단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경기가 인기를 얻으면 우수한 경영자와 선수 그리고 게임을 즐기려는 관객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최초에 투자자들이 미리 구입했던 토큰은 야구라는 생태계에서 관객과 선수, 구단과 스폰서가 지불수단으로 유통한다.
야구의 인기에 따라 토큰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이 비싼 토큰을 하나라도 더 벌기 위해 선수와 구단은 땀 흘리고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제품을 홍보하는 스폰서는 토큰을 구입해 관객들의 입장권을 보조해 더 많은 관객을 그러모은다. 토큰의 발행자와 투자자가 약속한 것은 토큰의 총량일 뿐이다. 보통 경기의 수나 관객의 규모는 보장하지 않는다. 생태계의 성장은 유동적이다. 다만 아무리 야구 경기가 인기를 모아도 토큰의 총량은 제한돼 있으므로 초기에 토큰을 구입한 이들은 몇 백 혹은 몇 천 배의 가치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
ICO로 모은 돈은 제안의 실현에 쏟아부어야 한다. 지금까지 무법적인 생태계가 빠르게 성장한 배경에는 이 규범에 대한 신사협정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ICO가 하나의 투자 기법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증권형 ICO의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결국 이 독특한 규범이 점차 희석되면서 ICO로 모은 자금 역시 기업의 부채나 수익으로 전용될지도 모른다.
SEC의 대응도 중요하지만 텔레그램이 모은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사용할지도 ICO의 문화와 규범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돋보기] 분산 데이터베이스의 오라클 꿈꾸는 ‘블루젤’
중국과 한국 정부의 암호화폐 공개(ICO) 불법화 선언으로 ICO의 아시아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곳은 싱가포르다. 한국 거래소 빗썸도 싱가포르에서 대규모 ICO를 예고해 이슈가 됐다. 올해 3월 블루젤은 캐나다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싱가포르 ICO에서 2050만 달러를 모금하는 데 성공했다.
회사는 블록체인이 지향하는 분산 애플리케이션(dApp)을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이 프로젝트는 데이터베이스의 에어비앤비 사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불특정 다수의 참여자들이 데이터베이스용으로 서버를 제공하면 토큰을 지불하는 이들이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는 생태계다. 블록체인상에서 돌아가는 스마트 콘트랙트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분산형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다. 블록체인이 확장됨에 따라 분산형 데이터베이스도 커질 수밖에 없는데 블루젤은 이 생태계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규칙과 플랫폼의 기술적 특성을 정립하는 데 자금을 사용한다고 선언했다.
분산형 데이터베이스 공유 시스템이 커질수록 지불수단으로 사용되는 블루젤 토큰의 가격 역시 상승한다. 블루젤도 막대한 토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의 자산 규모가 증가한다. 즉 ICO 주체인 생태계 조성자 역시 정직하고 성실하게 약속을 이행할 경제적 유인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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