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해결 위한 의료복지 개혁과 연계…다국적 제약사 등 ‘핀젠 프로젝트’ 주목
‘헬스 케어 혁신’의 글로벌 허브로 거듭난 핀란드
(사진)핀란드는 ‘유전학 연구’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경비즈니스(헬싱키)=이정흔 기자] 2013년 핀란드의 경제를 이끌다시피 했던 노키아가 모바일 사업 부문을 매각했다. ‘노키아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핀란드는 차근차근 ‘새로운 미래’의 막을 올릴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바로 그해인 2013년 ‘바이오뱅크법’ 개정을 시작으로 핀란드의 미래는 ‘헬스 케어 분야의 혁신’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바이오뱅크법은 핀란드의 바이오뱅크에 보관된 국민의 유전적 데이터를 다양한 ‘헬스 케어 혁신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법이다.


이후 5년, 노키아의 후광을 잃은 핀란드는 전 세계의 헬스 케어 시장의 혁신을 주도하는 ‘작은 거인’으로 우뚝 서 있다.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핀란드 정부는 전 세계 9개 국가의 기자들을 초청해 핀란드의 ‘헬스 케어 시스템 혁신’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국내에서는 한경비즈니스가 단독으로 참석해 그 현장을 돌아봤다.
‘헬스 케어 혁신’의 글로벌 허브로 거듭난 핀란드
(사진)핀란드는 2월 핀란드 국민을 위한 의료 서비스와 사회복지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칼라사타마(KALASATAMA) 헬스&웰빙 센터’를 오픈했다. 이곳에서는 치과를 포함한 의료 서비스는 물론 재활 치료 등 사회복지 서비스도 한 공간에서 제공받을 수 있다.


◆‘행복한 나라’도 고령화로 몸살


2015년 이후 핀란드는 공식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를 놓쳐 본 적이 없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전 세계 156개국을 상대로 진행한 ‘2018 세계 행복 보고서’의 결과다.


이 행복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핀란드가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국가라는 것도 주요 요인으로 언급돼 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어느 한 사람도 뒤처지지 않도록’ 정부가 거의 모든 것을 책임져 준다. 초등학교부터 박사과정 교육까지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교육제도가 대표적이다. 20여 년간의 ‘교육개혁’에 성공한 핀란드의 다음 목표는 바로 ‘의료 건강(헬스 케어)’ 분야다.


그렇다면 왜 ‘헬스 케어’일까. 교육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핀란드는 의료복지에서도 ‘보편적 복지’를 추구한다. 핀란드의 병원은 정부가 국민들의 세금으로 76%의 예산을 지원해 주며 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비 역시 지원하고 있다.


핀란드 보건복지부의 리사마리아 보이피오-풀키 최고마케팅책임자(CMO)는 “정부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국민이 높은 품질의 의료 서비스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하지만 비용 증가 속도가 급격한 만큼 보다 적은 비용으로 효율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 경제 측면에서 강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복지 비용이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저출산·고령화’다. 핀란드는 현재 일본(65세 이상 인구 비율 27%)을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되는 국가다. 65세 이상의 인구 비율이 향후 30년간 20%에서 29%까지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참고로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14% 정도다.


핀란드 보건복지부 산하 ‘개인화 의료 서비스’ 부문을 이끌고 있는 전문가인 툴라 헬렌더 개발 매니저는 “지금 핀란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헬스 케어 혁신은 단지 현재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헬스 케어 연 8% 수출 성장


핀란드는 현재 의료복지·고용노동 분야를 포함한 종합적인 ‘사회복지 시스템의 개혁’을 추진 중이다.


핀란드의 헬스 케어 시장 활성화와 혁신 또한 이 ‘사회복지 개혁’과 궤를 같이한다. 핀란드의 인구는 550만 명이다. 하지만 전체 국토 면적은 33만8145㎢로 전 세계 65위 수준이다. 넓은 땅에 적은 인구가 살다 보니 ‘원격진료’ 서비스의 필요성이 매우 높다. 이 원격진료의 효율성과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재료가 ‘빅데이터’와 ‘디지털 서비스’다.


이런 혁신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공공복지의 서비스(정부)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헬스 케어 관련 연구(학계)와 제약사를 비롯한 다양한 헬스 케어 기업, 스타트업과 공고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힘쓰고 있다.


‘정부·학계·비즈니스’로 이뤄진 삼각편대를 중심으로 헬스 케어 분야가 활성화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성공한다면 ‘의료복지의 개혁’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는 얘기다.


정부는 학계와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연구·개발을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법률적인 기반을 만들어 나가는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학계는 방대하고 복잡한 의료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최첨단의 발견과 기술 개발을 끌어내는 데 역할을 한다. 핀란드에서 의료 정보 리서치는 기업과 함께 이뤄지고 있다.


특히 2013년 노키아가 모바일 사업 부서를 매각하며 쏟아져 나온 우수한 정보기술(IT) 인력들의 상당수가 헬스 케어 스타트업 등에 진입했는데 이 또한 핀란드의 헬스 케어 산업을 부흥시키는 데 큰 자산이 됐다.


현재 핀란드의 헬스 케어 관련 산업은 약 50억 유로(6조4000억원) 규모로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디지털 헬스 케어 관련 수출은 지난 20년간 해마다 8%씩 성장해 현재 18억 유로(2조3199억원)에 이른다. 현재 핀란드의 헬스 케어 산업 분야 전문 인력은 100만 명당 7482명으로, 미국의 100만 명당 3979명보다 2배 가까이 많다.


헬싱키 비즈니스 허브의 마르셀로 반 로섬 시니어 비즈니스 고문은 “우리가 헬스 케어에 주목한 것은 그만큼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봤기 때문”이라며 “무엇보다 정부가 기업들의 자율적인 경영 활동을 보장해 주는 덕분에 수많은 헬스 케어 혁신 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헬싱키 비즈니스 허브는 핀란드뿐만 아니라 해외의 투자자들이 헬싱키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헬스 케어 혁신’의 글로벌 허브로 거듭난 핀란드
‘헬스 케어 혁신’의 글로벌 허브로 거듭난 핀란드
(사진)지난해 10월 새롭게 문을 연 ‘테르코(Terkko)’는 핀란드의 헬스 케어 연구자들과 스타트업이 모여 있는 독특한 ‘헬스 케어 허브’다.


◆빅데이터가 이끄는 ‘디지털 의료 혁신’


‘블루프린트 제네틱스’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헬스 케어 스타트업이다. 고객들의 유전자 정보를 통해 위험성이 높은 질병을 미리 특정하는 진단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회사는 최근 산모의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 발병하는 특정 소아암을 진단할 수 있는 테스트를 개발해 주목받았다.


소피아 프리스트 블루프린트 제네틱스 최고경험관리자(CXO)는 “이 소아암은 태아가 산모의 뱃속에 있을 때 발병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태아의 출생 후에야 진단할 수 있었다”며 “출생 후 암을 진단하면 이미 시기가 늦어 태아는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블루프린트 제네틱스의 최신 유전자 실험을 통해 뱃속에 있는 태아의 소아암을 ‘적정한 시기’에 진단할 수만 있다면 태아가 생존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블루프린트 제네틱스와 같은 핀란드의 헬스 케어 스타트업들이 이 같은 새로운 성과를 내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이 핀란드 국민들의 방대한 ‘의료 데이터’정보다.


핀란드 정부는 1954년부터 환자들의 정보를 수집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0년대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암 정보를 보관하는 기록소를 별도로 설립해 연구를 지속해 왔다.


2013년 핀란드 정부는 바이오뱅크법을 바탕으로 ‘바이오뱅크’를 설립했다. 현재 핀란드 내에는 모두 10개의 바이오뱅크가 운영되고 있다.


핀란드 국민들의 바이오 유전자 정보를 한데 모아 놓은 일종의 보관소로, 학계와 기업들은 이 바이오뱅크에 모인 유전자를 바탕으로 의학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현재 핀란드는 정부 주도로 이런 의료 데이터 정보를 바탕으로 환자의 의무 기록을 통합 관리하는 ‘칸타 서비스(KanTa Services)’를 운영 중이다. 환자에 대한 기초 자료부터 전자 처방전, 의사들과의 대면 진료 기록, 개인 건강 기록, 치료 계획, 개인 건강 정보 등 모든 의료 데이터가 이 한곳에 통합돼 있다.


핀란드 내 환자 진료 기록 중 98%가 전자 문서로 보관돼 있다. 미국만 해도 이 비율이 76%인 것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이와 같은 통합 헬스 케어 시스템의 다음 단계로 준비 중인 것이 이사쿠스(Isaacus)와 아이한(IHAN) 프로젝트다. 이사쿠스는 현재의 칸타 서비스를 한 차원 업그레이드한 ‘원스톱 의료 정보 서비스’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핀란드혁신기금인 시트라(Sitra)에서 추진 중인 사업이다.


하누 하말라이넨 시트라 시니어 고문은 “칸타는 철저하게 개인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맞춰 의료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플랫폼”이라며 “개인들에게 의료 정보의 주권을 돌려줄 수 있을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이한은 핀란드가 강점을 지니고 있는 방대한 양의 의학 정보를 수집하는 프로젝트다. 핀란드 정부는 이를 국민의 ‘삶의 질’과 관련한 건강·보건 정보와 결합함으로써 ‘의료 데이터의 2차적인 활용’까지 넓혀 간다는 방안이다. 발병 후 치료와 진단이 아닌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추는 의료복지 시스템으로 옮겨 가겠다는 복안인 셈이다.
‘헬스 케어 혁신’의 글로벌 허브로 거듭난 핀란드
(사진)아누 라우콜라 헬싱키 바이오뱅크 프로젝트 매니저가 ‘핀젠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혁신 위해 ‘유전자 정보’ 모으는 핀란드


핀란드 ‘미래 의료 혁신’의 정점에 이르는 프로젝트는 2017년 가을 시작된 ‘핀젠 프로젝트(FinnGen Project)’다. 핀란드 내 대학과 병원, 바이오뱅크, 미국의 대형 다국적 제약사들까지 참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핀란드 내 바이오뱅크 등에 저장된 500만여 명의 핀란드 국민의 유전자 정보를 디지털 헬스 케어 정보와 결합하는 것이다.


아누 라우콜라 헬싱키 바이오뱅크 프로젝트 매니저는 “기존에는 환자들이 같은 질병을 진단 받았을 때 모두 같은 치료를 받아 왔다”며 “하지만 개개인의 유전적 요인에 따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치료가 효과를 발휘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역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때 같은 질병을 진단 받았다고 하더라도 핀젠 프로젝트를 통한 유전학 연구에 따라 개인의 유전학적 특성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 정보에 따라 ‘개인화된 맞춤 진료’가 가능해지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핀란드 국민은 유전적으로 동질성이 높다. 말하자면 한국과 같은 ‘단일민족’에 가깝다. 이와 같은 특성에 따라 핀란드 국민의 전자를 바탕으로 한 의학적 연구는 다른 국가의 유전자 샘플들과 비교해 ‘특정한 유전적 요인’을 발견해 내기에 더욱 수월하다.


더욱이 인구수가 적은데다 오랫동안 의료 데이터를 모아 온 역사가 있는 만큼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도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라우콜라 프로젝트 매니저는 “전 세계적으로 이와 같은 방대한 규모의 유전학 연구가 진행되는 것은 처음”이라며 “전 세계 유전학 연구자들은 물론 다국적 제약사들이 핀젠 연구를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헬스 케어 혁신’의 글로벌 허브로 거듭난 핀란드

(사진)헬싱키 비즈니스 허브의 키모 코포넨 시니어 비즈니스 고문이 핀란드의 헬스 케어 스타트업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프로젝트에 대한 핀란드인들의 반응이다. 현재까지 핀젠 프로젝트와 같은 연구 목적으로 바이오뱅크에 저장된 개인의 유전자 정보를 활용하는 데 동의를 요청했을 때 이를 거절하는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자신의 유전자 정보가 언제 어떤 목적의 연구에 활용되고 있는지 투명하게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유전자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개인으로서도 미래의 질병 위험 요소를 미리 감지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이점도 크다.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유전적으로 유방암의 위험 요소가 높아 유방 제거 수술을 미리 받은 것과 마찬가지의 사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헬스 케어 혁신’의 글로벌 허브로 거듭난 핀란드
(사진)시트라의 하누 하말라이넨 시니어 고문이 이사쿠스(Issacus)와 아이한(IHAN)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현재 이 프로젝트에 화이자·애비·바이오젠을 비롯한 7개의 글로벌 대형 제약사가 참여하고 있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제약사들에는 신약 개발이 오랜 기간 동안 매우 큰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 분야이지만 실패할 확률도 높다. 핀젠 프로젝트와 같은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한 방대한 빅데이터 분석은 신약 개발의 ‘불확실성’을 줄여 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야코 파르키넨 화이자 메디컬 디렉터는 “예를 들어 신약 개발의 단계에서 현재는 동물들을 임상시험에 활용하고 있지만 이는 인간에게는 다른 반응을 일으킬 확률이 높다”며 “핀젠 프로젝트를 통해 신약 개발의 성공 가능성을 월등히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유전적 정보를 활용한 맞춤화된 약의 처방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주한 핀란드무역대표부의 김윤미 대표는 "핀란드는 Fimea(핀란드 의약협회) 와 FIMM(핀란드분자의학연구소)와 같은 기관들을 통해 바이오시밀러 연구와 가이드라인 개발에 산업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공헌해왔다"며 "핀젠과 같이 유전자데이터와 헬스데이터를 포괄적으로 종합해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는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은 향후 바이오메디슨 제품의 연구개발 기간이 단축될 뿐 아니라 제품의 품질과 치료 효과 또한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고 덧붙였다.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