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소중한 전통 기술인데도 사업성이 적거나 전승자가 없어 묻혀버린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일단 대물림이 중단되면 이후 부활은 꽤 어렵다. 한번 사라진 것을 되살리기보다 애초부터 끊길 위기를 줄이는 게 효과적인 이유다.
대안은 장인 기술과 청년 혁신의 융합 모델이다. 전통 산업의 한계를 세대의 협업으로 승화하자는 차원이다. ‘최강의 장인’과 ‘창의의 청년’이 만나 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에선 전통 매력에 흠뻑 빠져 농촌·지방을 찾아 이주하는 청년 인구가 적지 않다. 전통 장인과의 연령 격차가 최대 40세까지 벌어진 이색적인 협업 무대다.
◆디자이너 지망생 채용해 지역 브랜드 육성
(사진) 반슈오리 제품.
먼저 효고현 니시와키시다. 니시와키시는 200년 전부터 실을 염색한 후 직물을 만들어 낸 유명 산지다. ‘반슈오리’란 이름으로 버버리 등 해외 브랜드의 러브콜까지 받는 이름 높은 곳이다.
다만 채산성 등 여러 이유로 생산 거점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최악이란 절망적인 평가에 줄지어 폐업했다. 1984년 980억 엔의 생산액은 산지 소멸의 위기와 함께 2016년 220억 엔까지 추락했다. 일자리도 급감했다.
그 와중에 위기 돌파의 계기가 열렸다. 2013년 시장으로 취임한 인물이 행정의 운전 키를 쥐면서부터다. 시장은 섬유 기계를 판매하던 중소기업 사장 출신으로 현역 시절 직물 공정에서 대폭의 비용 절감을 달성해 화제가 됐다.
이전부터 대기업 수주 물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산업구조에 위기감을 가졌다. 직물이란 게 완성품의 재료일 뿐 그 자체로는 산지 명성과 지명도를 갖기 어려워 브랜드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했다. 대책이 필요했고 아이디어는 곧 실험에 들어갔다.
결과물은 지역 명칭을 넣은 브랜드 창출이다. 새로운 제도가 뒷받침됐다. 디자이너 지망 청년을 채용한 기업에 월 최대 15만 엔(3년)을 보조, 지역 착근적인 디자이너를 길러 지역 브랜드로 육성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청년의 도전은 늘어났다.
산지 기술을 익히면 디자이너로 상당한 경험이 되는데다 지원 체계의 덤까지 주어지기 때문이다. 책임 있는 임무를 단시간에 도전해 본다는 점도 강점이다. (사진) 반슈오리 공방관.
입사 2년 차에 자사 브랜드의 운명을 책임지고 신상품 개발을 위탁받은 사례도 있다. 젊은 외부 인재가 숙련의 토종 장인과 만나 전통 직물의 새로운 부가가치에 도전, 100가지 염료를 혼합해 모두 15만 개 이상의 컬러를 만들어 냈다.
입소문이 나자 일과 꿈을 좇아 2017년 한 해에만 13명의 청년이 이주해 왔다. 도쿄의 유명 복장학원과 연계해 졸업생의 이주를 촉진하는 다양한 시도의 결과물이다. 패션업계를 지향하는 이들은 하청특화보다 오리지널로 승부수를 띄웠다.
주식회사 ‘반(播)’은 ‘토종자원+청년인재’의 대표적인 사례다. 2016년 1명의 20대 도쿄 청년이 디자이너로 취업한 이후부터다. 현재 25명이 근무 중인 작은 조직이지만 머리카락만큼 얇고 잘 끊겨 장인조차 꺼리는 극세사로 지은 머플러를 개발했다.
일본에서 가장 가볍고 부드러운 직물이란 점을 강조한 결과다. 사내의 반발도 컸다. 염색하면 더 쉽게 끊겨서다. 대량생산의 전통적인 강점과 무관하게 꽤 까다롭게 소량만 만드는 선택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흔히 생각하기 힘든 역발상의 도전이었지만 실패와 좌절의 시행착오 끝에 결국 의도대로 만들어졌다. 명품 탄생의 순간이었다. 전통 기술을 전승하고 싶은 지역 장인의 배려도 한몫했다. 59g의 경량 무게에도 가격(7560엔)은 시중 브랜드의 절반도 안 된다.
가볍고 촉감이 좋은데다 가격까지 저렴하면서 백화점에서의 시범 판매가 성공적으로 끝났고 고객과 시장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브랜드인 ‘니시와키저팬’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칠기 전통에 미래를 건 청년들
후쿠이현 사바에시에도 성공 사례는 있다. 이곳은 칠기와 관련된 전통 기술을 충분히 어필하는 궁극의 도시락 통을 제작해 지역 자원과 청년 인재의 결합에 성공했다. 원래부터 해당 지역은 지역 재생의 성공 사례로 유명하다.
안경 제작을 통해 일본에서 행복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알려지면서 성공 모델로 안착했다. 일본의 국산 안경 80%를 생산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기 기술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갖는 칠기 기술의 명산지로 상업용 칠기 생산량 중 80%를 제조하지만 안경에 밀려 쇠락 품목 중 하나로 전락했었다. 이랬던 위기 지역에 청년 인구가 2017년 50여 명을 비롯해 새롭게 이삿짐을 싸 들어오고 있다. 칠기 전통에 매력을 느껴 미래를 걸어보려는 승부수다.
포인트는 전통 공예를 현대 생활과 접목하는 작업이다. 의외로 전통 기술로 상품 제작을 의뢰하는 다양한 구매처가 존재한다.
처음부터 전통 칠기에 관심을 갖기 힘든 고객의 처지를 감안해 손쉽게 칠기 매력을 경험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해 달라는 의뢰다. 도시락 통을 칠기로 만든 도시락은 이 과정에서 탄생됐다.
인터넷 등 가상공간에서 도시락을 자랑하는 현대사회의 트렌드를 간과하지 않은 게 주효했다. 밥·반찬 등 색다른 음식물과 장식은 자랑해도 통만큼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그저 그런 모양이면 아무래도 눈에 띄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후 보기에 즐겁고 기분 좋은 도시락 아이디어에 사활을 걸었다. 그 덕분에 분리·결합의 칸막이를 넣어 기능성을 높이고 벽면의 경사를 활용해 식감을 높이는 등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춘 칠기 도시락이 완성됐다.
수작업에 따른 고가격이지만 시도 자체는 호평 받고 있다. 묵직하되 새로운 도전은 2015년 설립된 디자인 회사 ‘쓰기(Tsugi)’가 수행한다.
원래 이벤트 기획이나 지역 회사의 팸플릿 제작 혹은 작은 치장 제품을 만들던 조직인데, 사라지는 전통 명물을 살려 보자는 차원에서 접근했다. 지금은 외부 인재의 이주 권유로 동네 자체를 변신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뭔가를 만들어 보고 싶은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드는 동네를 지향점으로 내세운다.
입소문이 나면서 2016년 2000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기도 했다. ‘리뉴(Renew)’라는 이벤트 개최도 한몫했다. 지역의 전통 공예를 활용한 체험 시장으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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