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7년째·1회 비용 3500만원…사회 각계각층 오피니언 리더가 직접 선정
‘30자에 담은 시대의 희망’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의 매력
[한경비즈니스=정채희 기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2012년 봄편).’

늘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로 가득한 서울의 중심가 광화문 사거리. 이들의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사색에 잠기게 하는 풍경이 있다. 교보생명 빌딩 외벽에 걸린 가로 20m, 세로 8m의 ‘광화문글판’이다. 30자도 안 되는 이 짧은 글귀는 바쁜 일상 속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절로 미소 짓게 하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며 시민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 온 광화문글판이 어느덧 27주년을 맞았다. 글판을 수놓은 글귀만 벌써 80여 편. 공자, 헤르만 헤세, 파블로 네루다, 서정주, 고은, 도종환, 김용택 등 50여 명에 이르는 동서고금의 현인과 시인의 작품이 광화문글판으로 재탄생했다. 그 사이 광화문글판은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아 신문 칼럼의 단골 주제로 등장할 만큼 사회·문화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계몽적 성격에서 희망 주는 메시지로

광화문글판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1991년 1월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제안으로 시작된 광화문글판의 첫 문안은 ‘우리 모두 함께 뭉쳐/경제활력 다시 찾자’였다. 이후에도 ‘나라경제 부흥시켜 / 가족행복 이룩하자’, ‘개미처럼 모아라 / 여름은 길지 않다’ 등 초기 문안은 계몽적 성격의 직설적인 메시지가 담긴 표어와 격언이 대부분이었다.

광화문글판이 지금의 감성적인 모습으로 변화한 것은 1998년부터였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고통과 절망을 겪는 이들이 많아지자 신용호 창립자는 “기업 홍보는 생각하지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이듬해 봄 고은 시인의 ‘낯선 곳’에서 따온 ‘떠나라 낯선 곳으로 / 그대 하루하루의 / 낡은 반복으로부터’라는 글이 걸리면서 광화문글판에 시구가 녹아들었다. 광화문글판이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후 광화문글판은 시민들의 가슴에 남는 명작도 많이 남겼다. 외환위기로 암울했던 1998년 겨울에는 ‘모여서 숲이 된다 / 나무 하나하나 죽이지 않고 숲이 된다 / 그 숲의 시절로 우리는 간다(고은)’로 희망을 말했고 2000년 5월에는 ‘길이 없으면 / 길을 만들며 간다 / 여기서부터 희망이다(고은 ‘길’)’라는 글귀로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줬다.

광화문글판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변한 것은 문안뿐만이 아니다. 글씨체나 디자인 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광화문글판에 본격적으로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여름편부터다. 문안의 의미가 보다 잘 표현될 수 있도록 글씨체와 디자인을 활용하면서 광화문글판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거듭나게 됐다.

손글씨를 디자인에 활용하는 캘리크래피를 적용하고 때로는 전문 화가에게 의뢰해 문안과 어울리는 그림과 서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주로 시인들의 작품이나 명언·명구에서 발췌해 오던 관행에서 벗어나 시대 변화에 발맞춰 젊은 감각을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30자에 담은 시대의 희망’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의 매력
서울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1년에 4번, 계절의 변화에 발맞춰 새 옷을 입는 광화문글판의 문구는 시인·소설가·카피라이터·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와 시민 참여를 통해 선정된다.

지금까지 유종호 평론가, 최동호(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공선옥 소설가, 정호승 시인, 안도현 시인, 은희경 소설가, 언론인 노재현 씨 등 문인·문학평론가·교수·언론인 등 사회 각 계층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선정 위원에 포함됐다. 최근에는 성석제 소설가, 진은영 시인, 신준봉 중앙일보 부장, 박웅현 TBWA 대표 등 4인이 2017년 1월부터 지금까지 9기 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다. 위원회 임기는 2년이다.

광화문글판 문안은 서너 단계에 걸친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야 영광스러운 자리에 들어설 수 있다. 먼저 선정 위원들의 추천작과 교보생명 홈페이지에 올라온 시민들의 공모작 중에서 최종 후보작을 선정한다. 선정 위원들은 후보작들이 시대의 관심사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 계절과 잘 어울리는지, 의미가 쉽게 전달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후보작을 선정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표와 토론이 이뤄진다. 이렇게 선정된 문안에 가독성 높은 서체, 예술적인 디자인을 적용해 멋진 모습으로 재탄생한 후 시민들에게 선보인다.

광화문글판을 가장 많이 장식한 작가는 고은 시인이다. 무려 7번이나 이름을 올렸다. 그가 순수하게 광화문글판을 위해 지은 시도 두 편이다. 이 밖에 정호승 시인은 4편, 김용택·정현종 시인은 3편, 도종환·장석남·안도현 시인과 유종호 평론가, 파블로 네루다는 각각 2편의 작품을 글판에 올렸다.

광화문글판에 대한 반응도 상당하다. 2007년 12월 사람이 아닌데도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이름을 올렸고 2008년 3월에는 한글문화연대가 주최하는 ‘우리말 사랑꾼’에 선정됐다. 또 2010년 ‘옥외광고학연구’ 가을호에 이명천 중앙대 교수팀이 광화문글판을 주제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 교수팀은 논문에서 “다른 광고물과 달리 공익적 주제의 옥외광고로 문학 콘텐츠를 활용해 차별화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며 “하루 유동인구 100만 명, 차량 통행량 25만 대에 이르는 노출 효과, 20년간 지속돼 온 캠페인 기간은 옥외광고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글판에 들어가는 비용은 1회 평균 3500만원이 소요된다. 연간으로 셈하면 약 1억4000만원으로 적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교보생명은 사회공헌 차원에서 앞으로도 계속 광화문글판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광화문글판이 시민들로부터 오래도록 사랑받아 온 이유는 자사 홍보와 광고 문구가 아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성적인 메시지로 시민들과 소통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앞으로도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귀로 글판을 운영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poof34@hankyung.com

캡션
서울 광화문 사거리 교보생명 빌딩 외벽에 걸린 2018년 광화문글판 ‘여름편(채호기, ‘해질녘’)’.

1 광화문글판의 첫 시작(1991년 1월, 격언).
2 힙합과 그래피티 아트를 적용한 글판(2010년 여름편, 키비 ‘자취일기’).
3 시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글판(2012년 봄편, 나태주 ‘풀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