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김현석 한국경제 뉴욕 특파원]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1998년 6월 6일 처음 방송돼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주인공은 뉴욕에 사는 싱글 여성 캐리와 샬럿, 미란다, 사만다 등 4명이다. 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이 드라마를 통해 세계의 젊은 여성들은 뉴욕을 꿈과 희망이 실현되는 도시로 인식하게 됐다.
이 드라마에서 쿨하고 이지적인 싱글 맘, 변호사 미란다 역을 맡았던 배우 신시아 닉슨은 정말 뉴욕을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도시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뉴욕 토박이인 닉슨은 지난 3월 뉴욕주지사 민주당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9월 당내 경선에서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를 꺾으면 11월 6일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게 된다.
닉슨 후보는 무료 건강보험, 마리화나 합법화, 부패 청산, 불법 이민자 체포 금지 등 매우 진보적인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레즈비언인 닉슨 후보는 이전부터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높여 왔다. 2011년 동성 결혼 법제화를 위해 활동했고 2016년에는 여성 인권에 관한 글을 타임지에 기고해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를 강하게 비판했다.
◆사회문제에 관심 많은 레즈비언 배우
닉슨 후보는 2012년 여성 성소수자(LGBTQ) 활동가인 크리스틴 마리오니 씨와 8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전 남편인 사진작가 대니 모제스 씨와의 사이에 낳은 딸과 아들을 포함해 총 3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닉슨 후보가 뉴욕주지사에 당선되면 뉴욕 최초의 여성 및 레즈비언 주지사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닉슨 후보의 출마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다. 닉슨 후보는 쿠오모 주지사와 몇 년째 갈등을 빚고 있는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의 열렬한 지지자다.
역시 민주당 소속으로 쿠오모 주지사 밑에서 유명 정치인으로 자라난 더블라지오 시장은 2013년 뉴욕시장 선거 때 내걸었던 첫째 공약인 ‘부자 증세’ 정책이 세금 인상을 반대하는 쿠오모 주지사의 벽을 넘지 못한 뒤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다. 더블라지오 시장이 쿠오모 주지사를 견제하기 위해 닉슨 후보의 출마를 부추겼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하지만 닉슨 후보 앞에 닥친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선 경쟁자인 쿠오모 주지사는 차기 민주당 대선 주자로 손꼽히는 유명 정치인이다. 1983~1994년 뉴욕주지사를 지낸 마리오 쿠오모 전 주지사가 부친이고 동생인 크리스 쿠오모는 CNN에서 ‘쿠오모 프라임 타임’이라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스타 기자다. 케네디가에 맞먹는 정치 명문가 출신인 셈이다.
닉슨 후보가 여성이고 레즈비언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닉슨 후보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여성은 ‘자격을 갖췄다’는 사실을 다섯 차례 이상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지율 뒤지지만 무시할 수 없는 파급효과
경선 출마 초기 닉슨 후보는 쿠오모 주지사와의 지지율 격차를 줄이며 선전했다. 3월까지만 하더라도 지지율이 13%에 불과했지만 지난 5월 퀴니피악대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2배 이상 올라 쿠오모 주지사를 맹추격했다.
하지만 6월 시에나칼리지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쿠오모 주지사는 61%를 얻어 26%에 그친 닉슨 후보를 다시 35%포인트 차이로 앞서는 것으로 집계됐다. 시에나칼리지의 지난 4월 조사 때보다 쿠오모 주지사는 지지율이 2%포인트 증가한 반면 닉슨 후보는 1%포인트 하락했다.
시에나칼리지의 스티븐 그린버그 대변인은 “쿠오모 주지사의 지지율이 닉슨 후보가 출마를 선언하기 전인 지난 1월에 비해 27%포인트나 하락했다”며 “쿠오모 주지사가 타 후보를 압도하며 크게 앞서고 있지만 아직 예비선거까지 몇 달이 남아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닉슨 후보에게 매우 고무적인 일이 생겼다. 연방 하원의원 뉴욕 주 14번 선거구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28세의 젊은 여성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테즈 후보가 10선 현역 하원 의원인 조 크롤리 후보를 제치는 대역전극을 만든 것이다. 크롤리 후보는 민주당이 올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탈환하면 하원 의장이 될 것으로 예상되던 거물이다.
푸에르토리코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무명이던 오카시오 코테즈 후보는 경선 3주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크롤리 후보에게 36%포인트나 뒤져 있었다. 하지만 집집마다 찾아다니고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며 밑바닥에서부터 지지 기반을 다졌다.
최종 개표 결과 코테즈 후보가 57.48%를 얻어 크롤리(42.52%) 후보를 크게 앞질렀다. 다만 이 지역의 등록 민주당원 가운데 경선에 투표한 사람은 12.9%에 불과해 민심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닉슨과 코테즈 후보는 서로를 지지해 왔다. 닉슨 후보는 코테즈 후보의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에서 “기업 민주당에 대한 진보적인 민주 당원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코테즈와 닉슨 후보는 함께 기업 기부금을 거부하고 이민세관국(ICE) 폐지 등 같은 공약을 내걸고 있다.
실제로 코테즈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하자 닉슨 후보의 선거 캠프에는 24시간 동안 기부금 2만5000달러가 답지했고 e메일 구독자도 1200명 늘었다. 코테즈 후보의 선거 돌풍 주역인 수천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은 닉슨 후보의 승리를 위해 뛰기로 했다. 멜리사 마크-비베리토 전 뉴욕시의장이 닉슨 후보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는 등 몇몇 민주당 중진이 닉슨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닉슨 후보의 출마 효과는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기호용 마리화나 합법화에 반대하던 쿠오모 주지사는 닉슨이 마리화나 합법화 이슈로 여론의 지지를 얻자 최근 합법화를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닉슨 후보가 뉴욕주지사에 당선돼 정말 ‘섹스 앤드 더 시티’와 같은 화려한 삶을 뉴욕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83호(2018.07.30 ~ 2018.08.0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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