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 ‘완전한 무신뢰’가 ‘신뢰’를 만들다…글로벌 금융회사들도 본격적 투자 개시

[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 ‘스마트 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올가을 이더리움과 비트코인캐시 커뮤니티가 뜨겁다.

이더리움은 작업증명(PoW)에 대한 합의 방식과 데이터 저장 방식을 바꾸려고 한다. 비트코인캐시는 프로토콜 자체를 업그레이드하는 방안과 블록의 용량을 키우는 방안 등을 놓고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백가쟁명의 소란 가운데 길을 찾아야 한다.

두 블록체인은 그동안 소통형 리더십에 기초한 선한 관리를 표방하며 정체에 빠진 비트코인과 차별화해 왔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자랑인 거버넌스가 시험대 위에 오른 셈이다. 일반인들로서는 참여는커녕 논쟁을 구경하기도 벅차다. 난생 처음 듣는 어휘들의 폭력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면 외계어에 가까운 용어를 조합해 배포하는 게 블록체인업계의 주된 업무 중 하나다. 사실 이는 일반인들의 접근을 차단하면서 지적 우위를 드러내 결국 외부자들이 돈을 지불하고 지식을 구입하게 만드는 전문가 집단의 관행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트코인이라는 파괴적 개념이 등장한 이후 10년이 지나면서 소위 ‘캄브리아기’로 불리는 ‘응용 기술의 대폭발’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만큼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으로도 보인다. 그러면 정말 쏟아지는 신조어의 수만큼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을까.
‘단순해서 강하다’ 비트코인의 마력
[사진] 비트코인을 하드포크한 암호화폐 비트코인캐시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크레이그 라이트 박사는 최근 비트코인캐시를 또 다시 하드포크한 '비트코인캐시 SVC'를 주도 중이다.


◆수많은 코인은 ‘스펙트럼’의 한 지점일 뿐

사실 새로운 기술은 대체로 블록체인 딜레마의 해결과 관련이 있다. 분산성과 용량(스케일)의 딜레마다. 데이터를 저장하고 승인하는 과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블록의 용량을 늘려야 한다. 그런데 용량을 늘리면 노드가 줄어 분산성이 후퇴한다.

중앙 서버 방식은 데이터 처리와 저장 효율에 최적화돼 있다. 반면 블록체인은 효율을 희생하는 대신 분산을 추구한다. 비트코인 블록체인은 전 세계에 흩어진 1만여 개의 노드들이 지난 10년 동안의 거래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1만 개의 노드가 동일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몇 개의 노드를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비트코인의 역사를 바꿀 수 없다. 해킹과 변조가 불가능한 블록체인의 속성은 블록체인의 분산성에서 나온다.

비트코인 그리고 블록체인을 활용하는 2000여 개의 코인들은 분산성과 용량의 극점 사이에서 펼쳐진 넓은 스펙트럼 중 한 지점이다. 새로운 기술적 제안들은 스펙트럼 위의 어느 한 지점이 최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블록체인을 만든다.

평면도 위에 펼쳐 놓고 보면 이 같은 제안들은 발전이라기보다 특성의 선택적 조합이다. 하지만 새로운 용어에 달린 난해한 기술적 각주가 경외감을 자아내기 마련이므로 블록체인 기술은 비트코인만 놓아두고 지난 10년간 숨 가쁘게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비트코인은 망하겠지만 블록체인은 성공한다’는 기술자들의 주문(呪文)이 먹혔던 이유다. 업계의 다수파는 여전히 이 주문을 믿고 또 외우는 쪽이지만 아직도 비트코인이 건재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주문이 그다지 신통하지 않다는 것을 말없이 증명한다.

‘관절이 많을수록 고장이 잦다’는 것은 기계공학의 상식이다. 비트코인의 매력은 단순성과 그 결과물인 예측 가능성에 있다. 복잡성이 증가하면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관리의 위기로 전개돼 결국 시스템이 변형된다. 10년 동안이나 정체된 비트코인의 미래는 예측할 수 있지만 비트코인보다 발전했다는 다른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미래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쩌면 기술의 발달이라는 암호화폐의 내생변수보다 금융업의 적응이라는 외생변수가 더 결정적일 수 있다. 비트코인의 단순성이야말로 금융업계로서는 환영할 만한 속성이다. 여기에 비트코인의 단점이라는 저효율은 장애가 아니라 기회로까지 여겨진다.

신용카드나 온라인 계좌 이체, 외국환 송금의 속도와 편리함은 기술적 발전에 의한 것이기보다 금융 솔루션 혹은 신뢰 솔루션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다. 신용카드는 한 달에 한 번 정산할 때까지 신용카드사가 거래를 보증해 준다. 온라인 송금이나 외국환 송금은 은행 간 결제를 지원하는 신뢰망이 제도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즉 사용자들만 매번 정산됐다고 느낄 뿐이지 시간과 잔액의 차이를 누군가가 보증해 주기 때문에 원활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거래 자체는 무신뢰 기반이다. 하지만 여기에 신뢰를 결합하면 블록체인에 일일이 거래를 등록할 필요가 없으므로 속도와 용량의 제약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물론 철학적 비트코인 근본주의자들은 비트코인이 금융기업들의 돈벌이 수단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근본주의자들의 비율이 매우 높아 비트코인이 시스템 자체를 변경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비트코인에서 비트코인캐시로 분리해 나온 이들이 사업가적인 면모가 훨씬 강했다. 비트코인캐시의 추월을 조심스럽게 가늠해 볼 수 있었던 것도 사업가적 유연성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트코인캐시가 끊임없이 기술적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단순성을 희생하고 있는데 반해 비트코인은 근본주의자들 때문이라도 변하기 어렵다는 믿음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금융업계는 이 믿음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레이스케일인베스트먼트의 7월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상반기 기준 암호화폐에 대한 총투자금 2억5000만 달러 가운데 절반이 금융회사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총투자금의 63%가 비트코인 한 종목에 쏠렸다.

금융업의 선택이 기술적으로는 가장 낙후됐다는 비트코인에 쏠리는 것은 블록체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미스터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미스터리는 모두가 놓쳤던 요인 하나가 사실은 핵심 변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돋보기]암호화폐 담보대출 서비스 개시…‘비트코인 은행’의 탄생인가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는 지난 8월 스마트 콘트랙트를 전자적으로 이뤄지는 계약의 하나로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보기술(IT) 산업에서 캘리포니아 주, 즉 실리콘밸리가 누려 온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블록체인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또 8월에 블록파이(Blockfi)는 암호화폐 담보대출 서비스 면허를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받았다. 이 면허를 통해 블록파이는 미 전역에 걸쳐 서비스가 가능하다. 이 서비스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을 담보로 삼아 달러를 빌려주는 단순한 금융 서비스다.

비트코인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전당포에 가까운 이 서비스가 사실은 암호화폐 은행의 초기 형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트코인을 담보로 빌린 달러를 다시 비트코인에 투자하거나 비트코인을 처분해 세금을 내는 대신 이자 비용만으로 실물화폐의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비트코인은 집이나 귀금속으로는 따라오기 어려운 균질성을 보증하므로 보관된 비트코인의 대여도 가능하다.

인터컨티넨털거래소(ICE)가 주도하는 백트(Bakkt)의 궁극적인 사업 모형도 암호화폐에 기초한 신용카드 결제 서비스다. 보관의 위험을 금융기업에 떠넘기는 대신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활용성이 높다. 신용카드 역시 암호화폐 담보대출 서비스에서 출발한다. 그다음엔 암호화폐 담보대출 서비스들 간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소액 결제를 보증하고 여신을 제공하는 암호화폐 은행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89호(2018.09.10 ~ 2018.09.1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