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치판에선]
여야 간사 합의 ‘1분 만’에 뒤집히며 ‘무차별 기업인 소환’ 재현


[김형호 한국경제 정치부 기자] “멘탈 붕괴 상태입니다. 어떻게 여야 간사가 합의한 사안을 단 1분 만에 뒤집을 수 있습니까.”
국회를 출입하는 정보기술(IT) 대기업의 한 대관 담당자는 “국회가 기업인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대기업 대관팀들은 개천절인 10월 3일에도 대부분이 출근해 비상 대책 회의를 하는 등 분주하게 보냈다. 전날 국회에서 무더기로 기업인 증인 채택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삼성전자·LG전자·SK텔레콤·KT 등 주요 IT 기업 대표들은 물론 현대차그룹·포스코 최고경영자(CEO)도 갑작스레 증인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NHN의 이해진 글로벌투자최고책임자(GIO),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2년 연속 국감 증인 리스트에 포함됐다.

올해부터 기업 대표 증인 채택을 최소화하고 실무자급 증인으로 국정감사를 운영하겠다는 여야의 약속이 무색한 무차별적 증인 채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대관팀 임원은 “행정부 감시라는 본연의 업무보다 기업 대표와 오너들을 불러 국감의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고 반발했다.
정부 감사하라니 기업 감사하는 국회의원들
‘멘붕’에 빠진 기업 대관팀

10월 2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 여야는 간사 간 협의 끝에 5G와 통신 보안 현안 질의를 위해 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 3대 통신사의 실무자급 증인 신청에 합의했다. 그런데 오후 4시께 김경진 민주평화당 의원이 “왜 대표들을 부르지 않느냐”고 문제 삼으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평소 통신사 요금 인하를 주장해 온 노웅래 과방위원장이 “지적에 일리가 있다. 여야 간사가 다시 합의해 오라”고 호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바른미래당 간사인 신용현 의원이 “제가 대표들을 증인으로 부르자고 할 때는 ‘안 된다’고 하더니 여야 간사 간 합의가 끝난 상황에서 바꾸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고동신 삼성전자 사장, 조성진 LG전자 부회장,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황창규 KT 회장,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 등과 함께 이해진 GIO, 김범수 의장 등을 증인으로 부르는 안건이 순식간에 통과됐다. 고 사장은 지난해 국감에 출석했고 조 부회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같은 시각, 대기업들과 무관한 상임위인 농식품위에서도 기업인 증인 채택이 줄을 이었다.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 서경석 현대차그룹 전무, 장동현 SK 대표, 정도현 LG전자 대표, 이종현 롯데지주 전무 등 대기업 대표와 임원들을 국감 증인으로 결정했다.

자유무역협정(FTA) 피해 구제를 위한 농어촌상생기금 조성에 대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출연하기로 했는데 실적이 저조하다는 이유에서다. 정운천 바른미래당 의원은 “2017년부터 매년 1000억원씩 총 1조원을 조성하기로 한 농어촌상생기금이 2년째인 현재 378억원에 그치고 있다”며 “이마저도 공기업이 374억원을 내고 대기업들의 출연금은 4억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농어촌기금을 전혀 내지 않은 기업은 대표를, 조금이라도 출연한 기업은 임원급으로 증인을 채택했다. 해당 대기업 관계자는 “전 정부의 미르재단 등으로 트라우마가 있는 상황에서 선뜻 자금을 출연하기 어려운 현실적 사정이 있었다”며 “무더기로 대기업 대표를 증인 소환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농해수위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지난 9월 열린 평양 정상회담에 동행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이 북한 양묘장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증인 채택을 요구했으나 더불어민주당의 반대에 무산됐다. 이날 산자위에서는 최정우 포스코 회장, 이동걸 KDB산업은행장이 증인으로 채택됐다.

상임위의 동시다발적 증인 채택에 국회를 담당하는 각 기업의 대관 관계자들은 사실상 ‘패닉’에 빠졌다. ‘기업인 증인 채택을 최소화하겠다’는 정치권의 약속에 ‘혹시나’ 기대했던 기업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묻지 마 증인 채택 관행’에 고개를 흔들었다. 무엇보다 여야 간사가 합의한 내용이 불과 1분여 만에 뒤집히는 상황을 두고는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온다.

IT 대기업에서 근무한 한 관계자는 “대표가 증인으로 나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상층부에 보고했는데 손쓸 시간도 없이 합의 내용이 뒤집어졌다”며 “비교섭단체인 의원 한 명의 문제 제기에 합의를 손바닥 뒤집듯이 엎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정치권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업인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드루킹 댓글 사건‘의 쟁점화를 위해 네이버·다음 등 주요 포털의 창업자를 증인으로 소환했다. 이해진 GIO와 김범수 의장은 지난해에 이어 2년째 국회 증인으로 불려나오는 기록을 갖게 됐다. 김 의장은 지난해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아 국회에 고발 당한 상황이어서 올해는 출석이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기업인 증인 채택의 먹이사슬

기업인 증인 채택은 국감의 단골 메뉴다. ‘누구를 부를 것인지’를 두고 여야 의원실과 기업 대관팀은 해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승강이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의원실과 기업 간 독특한 먹이사슬도 형성된다. 의원실에서 기업 대표급을 증인으로 신청한다는 내용을 흘리고 이를 기업 대관팀이 회사에 보고하면 해당 기업들은 증인 채택을 취소하기 위한 총력전에 나선다. 의원실이 취소를 염두에 둔 엄포성 증인 명단을 흘려 각 기업 대관팀에 생색을 내는 일도 빈번하게 생긴다.

실제로 지난 9월 국토위 간사인 박덕흠 자유한국당 의원은 삼성전자와 현대건설 등 주요 기업 대표, 이재명 경기지사 등 총 67명의 증인 명단을 외부에 공개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국토위 여야 의원실에는 진위를 묻는 각 기업의 전화가 빗발쳤다. 민주당 국토위 관계자는 “여야가 합의가 안 된 증인 명단을 외부에 공개한 것은 대관팀들에게 알아서 로비해 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사실상 대놓고 갑질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1988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부활시킨 국정감사가 언제부터인가 기업 감사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묻지 마 소환’ 관행 때문이다. 행정·사법부 감시라는 본연의 기능보다 ‘기업인 망신주기’ 행태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최근 들어 국정감사에 불려나오는 기업인은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17대 국회(2004.4~2008.4) 연평균 51.75명이던 기업인 증인은 18대 국회(2008.4~2012.4)에서는 연평균 76.5명으로 늘어난 데 이어 19대 국회(2012.4~2016.4)에서는 120명으로 급증했다. 2016년 5월부터 시작된 20대 국회 첫해의 기업인 증인 규모는 최순실 사태로 인해 150명으로 크게 늘었다. 증인을 채택한 해당 의원의 이름을 공개하는 증인 실명제를 처음 도입한 2017년에는 41명으로 다소 주춤했다. 하지만 여야가 바뀐 지난해부터 다시 ‘묻지 마 증인 소환’ 관행이 다시 되살아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기업인 증인 소환 관행에 대해 “국정감사와 국정조사조차 혼동하는 국회의원들의 전형적인 갑질”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 교수는 “국정조사는 예산 사용 감사 등 정부를 감시 견제하는 게 본연의 역할인데 국회의원들이 기업인들을 불러 군기잡기용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증인으로 불러 야단치고 호통치면서 위력을 과시하겠다는 국회의원들의 특권 의식이 문제”라고 지적했다.chsan@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3호(2018.10.08 ~ 2018.10.1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