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결과 따라 희비 엇갈려…톤당 5만원만 올려도 조선업계 추가 부담 ‘2550억원’
조선·철강사 양보 없는 줄다리기…‘후판 값’이 뭐길래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두께 6mm 이상의 두꺼운 철판인 ‘후판’은 선박이나 자동차를 제조할 때 혹은 건설 현장의 철강재로 주로 쓰인다.

이 중에서도 가장 많이 후판을 필요로 하는 곳은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업계다. 컨테이너선과 벌크 화물선에서부터 액화석유가스(LPG)·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 선박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각 선종에 필요한 후판의 종류와 기술력도 다각화되고 있다.

이러한 후판의 가격은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 조선업계와 철강업계의 희비를 가르는 요인이기도 하다. 제값을 받기 원하는 철강업계와 가뜩이나 지속된 불황으로 후판 가격 인상을 두려워하는 조선업계의 ‘줄다리기’가 지속돼 왔다.
조선·철강사 양보 없는 줄다리기…‘후판 값’이 뭐길래
◆조선업 불황으로 매년 동결·인하 반복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후판 가격은 상승세를 보이다가 연말부터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현재 후판 가격은 톤당 60만원에서 70만원 선에 형성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대부터 지속된 조선업계의 불황으로 후판가는 동결 혹은 인하를 반복해 왔다. 올해 상반기 조선업계와 철강업계는 후판 가격을 두고 협상을 지속해 왔는데 업계에 따르면 상반기에도 ‘동결 기조’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조선업계는 후판 값 인상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조선업계는 지난 3월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를 통해 철강업계에 ‘조선사들의 경영이 정상화될 때까지 후판 가격 인상을 자제해 달라’는 의견을 전했다. 협회에 따르면 후판은 선박 제조원가의 약 15~20%를 차지한다.

협회는 “수년간 이어진 시장 침체와 발주량 급감으로 조선업계는 인력·설비 등에서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다”며 “국내 후판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해 조선업계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협회에 따르면 후판 가격은 2016년 하반기부터 톤당 약 30만원 인상됐다. 또 올해 조선 3사의 예상 후판 소요량은 510만 톤 내외로 톤당 5만원이 추가로 인상되면 조선업계는 2550억원에 달하는 원가 부담을 져야 한다.

여기에 중국의 철강 수요 감소와 감산 완화 정책으로 공급량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지난해 하반기 중국의 후판 가격이 하락해 중국 조선소의 경쟁력만 높였다고 주장했다.

현대중공업은 5월 2일 2019년 1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상반기 물량에 대해 협상이 완료되지 않았다”며 “지금은 지난해 말 대비 인하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밝혔다. 또 올해 7~8%의 가격 인상을 예상하며 “최근 철광석 가격을 볼 때 하반기의 협상 가격은 인상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후판 생산에는 선형에 따라 ‘맞춤형’을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최근 각광받는 쇄빙선에는 극저온에서도 견딜 수 있는 후판을 공급해야 한다”며 “각 선형에 맞는 두께 변형 기술을 갖추고 강도나 물성을 조절하는 것이 후판의 기술력을 좌우한다”고 설명한다.

국내 철강 기업들의 후판 제조 기술력도 세계적 수준이다. 포스코는 2013년 세계 최초로 선박 LNG 탱크, 파이프용 신소재인 극저온용 고망간강을 개발했다. 포스코에 따르면 극저온용 고망간강은 섭씨 영하 196도에서도 파손되지 않아 해상에서는 LNG 이송과 연료 추진 선박의 저장과 연료 탱크에 적용할 수 있다. 이 기술은 지난해 12월 국제해사기구(IMO)에서 국제 기술 표준 승인을 받기도 했다.
조선·철강사 양보 없는 줄다리기…‘후판 값’이 뭐길래
◆수주 이어져도 후판 수요 증가까지는 1년 소요

기술력을 갖추는 것과는 별개로 철강업계는 최근 몇 년간 후판 생산 비율을 조금씩 낮춰 왔다. 신규 선박 발주가 줄자 후판의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발 빠르게 움직인 곳은 동국제강이다. 포항과 당진 공장 두 곳에서 후판을 생산하던 동국제강은 2015년 포항 공장의 가동을 중단하고 당진 공장으로 일원화했다. 현재 당진 공장은 연간 150만 톤의 후판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업계가 LNG 운반선을 중심으로 성장 기조에 들어서면서 후판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신한금융투자에 따르면 국내 조선 건조량은 LNG 운반선의 수주를 동력으로 삼아 올해 전년 대비 7.5% 증가, 2020년에는 6.1%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광래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신규 선박 건조량이 늘어난다면 판재류 내수, 특히 조선용 후판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신규 발주가 후판 판매로 이어지려면 발주부터 1년여의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신규 수주 소식이 이어진다고 하지만 현재 피부로 와 닿는 후판 생산량 증가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판 가격을 올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철강업계는 철광석 가격의 상승세를 눈여겨보고 있다. 에너지 정보 기관 플레츠에 따르면 5월 17일 칭다오항 CFR(운임포함 인도조건) 기준 중국의 호주산 철광석 분광 수입 가격이 톤당 100.4달러를 기록했다. 철광석 가격이 톤당 100달러를 돌파한 것은 5년 만의 일이다. 지난해 11월 64.7달러로 저점을 찍었던 것과 비교하면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이다.

브라질 댐 붕괴 사고의 여파로 세계 최대 철광석 생산 회사인 발레가 철광석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되면서 가격이 급등한 것이다. 이번 사고로 연간 4000만 톤의 철광석 생산량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그 여파는 2020년까지 지속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철강사들에 원재료 상승은 또 다른 부담이 될 전망이다. 원재료의 가격이 계속 오르는 데 제품 가격을 인상할 수 없다면 수익성에 큰 부담이 갈 것은 당연하다.

철광석 가격이 급등하더라도 과거 건설이나 자동차·조선 등 관련 산업의 경기가 좋다면 가격을 올릴 수 있지만 최근의 시황이 그렇지 않다는 게 큰 문제다.

mjlee@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7호(2019.06.03 ~ 2019.06.0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