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개방성과 검열 저항성’이 특징…주류 경제 시스템의 대안으로 부상
블록체인의 또 다른 이상  ‘탈중앙화 금융’
[우동연 해시드 심사역] 블록체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는 금융 관점에서의 블록체인에 대한 이야기다. 블록체인 생태계에서는 태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통 금융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비트코인의 창시자인 사토시 나카모토는 2000년대 후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에서 촉발된 세계 금융 위기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제네시스 블록(genesis block)이라고 부르는 비트코인의 첫째 블록에 ‘재무장관·은행에 두 번째 구제금융 임박’이라는 문장을 영구히 기록했다. 이 문구는 실제로 제네시스 블록에 들어 있는 코인베이스에 담긴 16진법 숫자를 문자열로 변환해 보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블록체인은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를 담보로 하는 국가 화폐와 달리 단일 기관을 신뢰하지 않고도 사람 간에 디지털 자산을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일반적인 중앙화된 금융 시스템에서는 국가의 통화정책에 따라 금리가 변동되거나 지급준비율이 조정되는 등 자국의 혹은 인접 국가의 경제정책에 따라 개인의 경제활동에 다양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적절한 통화정책은 국가 경제 활성화를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기관 또는 은행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개인 간에 화폐를 주고받는 가장 기초적인 거래마저도 신뢰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블록체인을 활용한 탈중앙화된 디지털 화폐 시스템에서는 국가기관이나 은행이 화폐 발행을 보증해 주지 않더라도 누구나 믿을 수 있는 화폐 시스템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노드가 정해진 프로토콜에 따라 블록 생성에 참여하고 있는 한 소수의 악성 사용자에 의해 시스템을 조작하거나 위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블록체인의 또 다른 이상  ‘탈중앙화 금융’
(사진) 비트코인의 첫째 블록에 담긴 메시지


‘스마트 콘트랙트’ 기능 통해 진화

비트코인을 비롯한 초기의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은 탈중앙화된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자산의 교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용자들은 블록체인 위에서 발행된 임의의 토큰들을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한 단계 더 복잡한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거래소를 비롯한 제삼자가 개입돼야 했다.

하지만 이더리움에서 시작된 스마트 콘트랙트(smart contract)에 힘입어 다양한 형태의 탈중앙화된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특히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전통 금융을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나타나며 탈중앙화 금융(DeFi : Decentralized Finance)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탈중앙화 금융은 좁은 의미로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중앙 기관을 배제하고도 전통금융 기법들을 제공하는 일련의 서비스들을 지칭하고 넓은 의미로는 이와 같은 금융 시스템의 가치 사슬 위에 존재하는 모든 서비스를 통칭한다.

이미 블록체인 생태계에서는 여러 종류의 탈중앙화 금융 프로젝트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암호 자산을 담보로 일정한 가치를 유지하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해 주는 프로젝트인 메이커다오의 스마트 콘트랙트에는 올해 4월을 기준으로 이더리움 전체 발행량의 약 2% 정도에 해당하는 220만 개의 이더리움이 담보로 묶여 있었다. 이용자들은 자신이 맡겨 놓은 암호 자산이 담보하는 가치 내에서 스테이블 코인인 다이(DAI)를 발행해 활용할 수 있다. 현재 다이는 이더리움 기반 탈중앙화 애플리케이션에서 가치 교환의 수단으로 폭넓게 활용되고 있고 한때 1조원의 가치를 넘는 9500만 개의 다이가 이더리움에서 유통됐다.

메이커다오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탈중앙화 금융 프로젝트가 존재한다. 유니스와프·뱅코르·카이버 등의 프로젝트는 기존의 중앙화된 거래소에서 탈피하기 위한 탈중앙화 거래소를 제공하고 있다.

이 밖에 암호 자산 단기 대출을 위한 컴파운드 프로토콜, 탈중앙화 마진 거래를 지원하는 디와이디엑스 등 다방면에서 탈중앙화 금융 서비스를 찾아볼 수 있다.

전통 금융에 비해 탈중앙화 금융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개방성과 검열 저항성을 들 수 있다. 공개 블록체인 위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접근 권한이 열려 있다. 프로토콜에 위배되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사용자라도 자신의 지갑 주소를 사용해 탈중앙화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단일 중앙 기관이 이를 막거나 통제할 방법이 이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탈중앙화 금융은 일차적으로는 금융 시스템이 미비한 지역에 거주해 금융 서비스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잘못된 정책이나 주변 국제 정세로 인해 불안정한 경제 시스템의 피해를 보고 있는 국가의 주민들, 중앙 기관의 정책과 통제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대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 범국가적 경제활동을 위한 편리한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고 전통 금융과의 공존과 융합으로부터 나타나는 파생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으로 가상현실(VR)이 보편화된 머지않은 미래에는 물리적인 화폐를 담보로 할 필요가 없고 가상 자산의 소유권을 증명할 수 있는 탈중앙화 금융이 보편적인 경제 수단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예측된다.

종종 금융과 정보기술(IT)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착안해 탈중앙화 금융을 핀테크의 일부로 다루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통 금융을 혁신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지만 지향점에서는 완전히 상이하다.

핀테크는 전통 금융 시스템을 유지하되 새로운 IT를 접목해 시스템을 효율화하는 데 목적을 둔다. 핀테크 사용자들은 전통 금융의 혜택을 일상생활에서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국가 경제정책의 영향력이 한층 효율적으로 전파되는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반면 탈중앙화 금융은 중앙화된 기관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제정책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사람들이 전통 금융에서 누리던 여러 종류의 금융 서비스를 탈중앙화 시스템에서도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이며 결과적으로는 누구나 중앙화된 기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추구하고 있다.




‘탈중앙화 금융’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

물론 여전히 탈중앙화 금융의 현주소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소수의 기관에 휘둘리지 않는 범국가적인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포부를 고려할 때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사용자들에게 제공되는 탈중앙화 금융 서비스들을 현재의 금융 서비스들과 비교해 보면 속도·처리용량·접근성·안정성 등 그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내세울 것이 없고 암호화폐 투기, 자금 세탁, 개인 정보 보호와 같은 문제에 이르러서는 정부 기관의 눈치를 보며 존속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이미 ‘탈중앙화 금융’이라는 공통의 지향점을 향한 여러 방식의 유의미한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중앙 기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프로젝트들이 있는 한편 제도권과 연계해 전통 금융과 상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 기존 금융 서비스의 비효율을 개선해 더 많은 이용자를 끌어들인 후 서서히 탈중앙화된 시스템으로 변화해 가는 방식을 선호하는 프로젝트도 있고 전통 금융회사들과 기업들을 끌어들여 거대한 생태계를 만들려는 시도도 있다. 아직 전통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은 미약하지만 잔잔한 물살을 넘어 어느덧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7호(2019.08.12 ~ 2019.08.18)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