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11년 전 919개 수출 중소기업 3조원대 피해
-은행 책임·보상 둘러싼 길고 긴 분쟁 11월 결론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키코(KIKO) 사태가 터진 지 올해로 11년이 됐다. 2008년 국내 수출 중소기업들에 큰 손실을 안겨 준 키코 사태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악몽’으로 남아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은 키코 사태에 대한 재조사를 결정했고 4개의 피해 업체가 민원을 신청하면서 현재 피해 보상을 위한 분쟁 조정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르면 11월 중 분쟁조정위원회를 열고 지난 1년 반 동안 진행된 재조사에 대한 결론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키코 사태, 10년 만에 재점화…왜?
키코(Knock-In Knock-Out)는 2007년부터 국내 은행들이 수출 위주의 중소기업들에 집중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환헤지 통화 옵션 상품이다. 기업들은 환율 변동 위험을 줄여 이익을 내거나 손실을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환율이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게 될 때가 문제다. 만약 만기 이전에 환율이 한 번이라도 정해진 범위 이상으로 올라간다면 기업들은 계약 금액의 두 배 이상의 외화를 마련해 은행에 약정 환율로 팔아야 했다. 만약 환율이 정해진 범위 밑으로 떨어진다면 키코 계약은 무효가 된다.
키코는 상품 구조가 복잡한데다 원금 손실 가능성이 높은 파생상품이었지만 당시 은행들은 이 상품을 중소기업들에 ‘환헤지 상품’으로 소개했다. 당시 국내 많은 수출 기업들이 환율 변동에 의한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말에 키코 상품에 대거 가입했다. 수출 기업들은 은행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은행에서 키코 상품에 가입하면 다른 은행들도 잇달아 찾아와 키코 상품 가입을 권유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다수의 기업들이 외화 매출액의
2배가 넘어서는 규모(오버헤지)의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2008년 문제가 불거졌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은행들은 환율이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상품을 판매했다. 하지만 미국발 금융 위기의 여파로 원·달러 환율이 급격히 치솟은 것이다. 당시 919개의 기업이 피해를 봤고 그 금액만 3조1588억원에 달했다.
키코 사태에 대한 논란이 증폭됐고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2008년 6월 키코 피해 기업 중 8곳이 키코 약관에 대해 공정위에 심사를 청구했지만 한 달 뒤 공정위는 ‘키코는 불공정 계약이 아니어서 약관법상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후 11월 100여 개의 키코 피해 기업들로 구성된 키코 공동대책위원회가 키코 상품을 판매한 은행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하며 5년여 간의 법적 공방이 시작됐다. 이에 대해 2013년 9월 대법원은 “키코는 불공정 거래 행위가 아니다”고 확정하며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당시 일부 사건은 적합성 원칙과 설명 의무 위반을 이유로 은행 측에 일부 배상 책임을 물었다. 키코 상품은 환헤지 목적의 정상 상품이므로 은행이 상품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다면 피해 책임은 원칙적으로 가입자가 져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면서도 ‘불완전 판매’ 등에 대해서는 은행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에 따라 일단락되는 듯 보였던 키코 사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17년 무렵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더불어민주당이 ‘금융 3대 적폐’로 키코를 지목한 것이다. 당시 금융위원장 직속 금융행정혁신위원회는 ‘키코 재조사와 피해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방안을 모색하라’고 권고했는데 당시 위원장이 윤석헌 현 금융감독원장이었다. 지지부진하던 키코 재조사는 2018년 5월 윤 원장의 취임 이후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윤 원장은 취임 후 분쟁조정2국 내에 ‘키코 분쟁조정전담팀을 꾸렸다. 키코 공대위를 만나 피해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 방안과 분쟁 조정을 약속하고 키코 공대위는 피해 입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4개 기업(일성하이스코·남화통상·원글로벌미디어·재영솔루텍)에 대해 분쟁 조정을 신청했다.
지난해 6월부터 본격적으로 키코 재조사에 들어간 금감원은 당초 1년이 되는 올
6월쯤 분쟁조정위원회(이하 분조위)를 열고 결과를 내놓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키코 사태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나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데다 관련 자료를 찾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상황이어어서 분조위 일정은 거듭 미뤄져 왔다. 지난 10월 8월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출석한 윤 원장은 “얼마 전 조사가 끝났고 그 내용을 토대로 은행들과 조정 과정을 거치고 있다”며 “10월 내 분조위를 열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분조위 일정은 11월로 한 차례 더 미뤄진 상태다.
키코 공대위 관계자는 “지난 10월 24일 4개 피해 기업 대표자와 조붕구 키코공대위 공동대표가 금감원 측과 만나 조만간 조정안이 나올 것이라는 전달을 받았다”며 “분조위 일정이 11월로 미뤄지긴 했지만 우선 윤 원장의 의지가 강한 만큼 분조위 일정이 또다시 미뤄지는 일 없이 11월에 열릴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법적 강제력 없는 ‘조정안’, 은행들 수용여부 관건
키코는 이미 2013년 대법원에 의해 ‘사기가 아니다’고 판결이 난 사건이다. 이 때문에 이번 분조위의 핵심 쟁점 또한 은행들의 ‘불완전 판매’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키코 피해 기업들에 대한 분조위가 의미를 갖는 것은 10년이 넘게 국내 많은 기업들에 큰 상흔을 남긴 키코 분쟁을 마무리 짓는다는 데 있다. 이번 분조위에서 나온 키코 피해 기업들에 대한 조정안은 향후에도 비슷한 결정에 대한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한번 결정된 분조위 조정안은 다시 조정할 수 없는 만큼 금감원이 피해 기업과 은행 양측이 모두 수긍할 만한 조정안을 마련하는 데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금융 분쟁 조정은 금감원이 금융사와 소비자의 합의를 유도하고 분쟁을 원만히 해결하는 제도다. 여기에서 도출된 최종 조정안은 ‘권고’의 성격이 강하고 법적 강제력은 없다. 다시 말해 은행들이 자체 판단에 따라 조정안을 거부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더욱이 키코 사건의 민사상 손해배상 시효가 지났다는 점에서도 피해 기업이 소송을 제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이번 조정안에 대한 은행들의 수용 여부가 관건이라는 얘기다.
아직까지 키코 사태 피해 기업들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안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대략 피해 금액의 20~30% 선에서 거론되고 있다. 각 은행별로 불완전 판매 정도, 상품 구조 등이 달라 일부 차이가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해당 은행은 신한은행·KDB산업은행·우리은행·KEB하나은행·씨티은행·대구은행 등 6곳이다. 이번 분조위 대상이 되는 4개 기업의 피해 금액은 약 1500억원으로 추정된다. 보상 비율이 20%만 돼도 보상 금액은 약 300억원을 넘어간다. 더욱이 향후 피해 기업들에 대한 보상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은행들은 후폭풍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키코 사태와 관련해 사법적 판단이나 조정 절차를 거치지 않은 피해 기업들은 약 150곳 정도로 추산된다.
하지만 은행들이 조정안을 무조건 거부하기도 어려운 분위기다. 최근 파생결합펀드(DLF) 등의 사태가 잇따라 터지며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DLF 사태와 관련해 우리은행과 KEB하나은행은 이미 “금감원 분조위의 결정을 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특히 DLF는 금융 당국이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부회장과 손태승 우리은행장(우리금융지주 회장)에 책임을 물을 경우 향후 거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 은행들로선 DLF는 물론 키코 사태까지 여론의 뭇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분조위 결과 키코 피해 기업들에 보상한다고 하더라도 해당 기업이 아닌 은행에 돌아가는 구조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현재 분쟁 조정 절차가 진행 중인 4개 기업 중 일성하이스코의 대주주는 지분 95%를 보유한 유암코다. 유암코는 은행들이 출자해 설립한 기업 구조조정 전문 회사로, 부실기업의 채권을 인수한 뒤 정상화하는 작업을 한다. 이들의 이익은 배당을 통해 지분을 보유한 은행들에 돌아간다. 이 때문에 키코 공대위 측에 따르면 피해 기업들은 이번 조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배상 금액이 기업의 법인 통장이 아니라 피해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금융 당국에 요청해 놓은 상황이다.
조붕구 키코공대위 공동대표는 “금감원이 그간의 분쟁 조정 진행 과정 등을 설명하고 이번 조사 대상이 되는 4개 업체 외에 나머지 업체는 키코 판매 은행과의 자체적인 자율 협의를 통해 조정을 유도하겠다는 방침을 설명했다”며 “특히 불완전 판매뿐만 아니라 당시 은행들이 기업들에 오버헤지를 권했다는 정황을 비롯해 불법적인 부분까지 분조위가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vivajh@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9호(2019.11.04 ~ 2019.11.1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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