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기존의 기반 버리는 ‘위험한 도전’…복잡한 이해관계, 학습된 가치·문화적 상징성 넘어서야
‘변화와 혁신’의 시대…모든 변화에는 아픔이 따른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늘 똑같은 방식으로 버티면 망하기 딱 좋다. 그런데 변화와 혁신을 내걸고 말만 요란하면 더 빨리 망할 수도 있다.

겉포장만 그럴듯한 엉터리 변화, 방향 자체가 잘못된 황당한 혁신이 멀쩡한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고 일하는 사람들만 괴롭히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의 정치적 패권만 키우는 ‘숙청(purge)’을 혁신이라는 보기 좋은 단어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듯한 말로 먹고사는 교수나 컨설턴트도 마찬가지다. 최고경영자(CEO)에게 늘 변화와 혁신을 강조한다. 말로는 못할 일이 없고 뭐라도 새로운 일이 벌어져야 낄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온갖 사연들을 안고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들의 사정은 다르다. 무능한 경영자가 귀까지 얇으면 어려운 여건에서 뭐라도 해보려고 애쓴 사람들이 변화의 의지는 없고 자기 욕심만 챙기는 ‘적폐’가 된다. 변화와 혁신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어설프게 말만 요란하면 오히려 더 빨리 더 크게 망하는 지름길이 되고 만다.

◆‘엇갈리는 이해관계’는 혁신의 걸림돌


세상의 모든 변화에는 득실이 엇갈린다. 사람은 예상되는 이득보다 당장 벌어지는 손실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손해 보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 저항하면 작은 변화도 어렵게 되는 셈이다.

자유무역협정(FTA)을 생각해 보자. 국가 전체의 이득이 분명해도 당장 손해 보는 농업 부문은 반대할 수밖에 없다. 국가가 나서 농업 부문의 업종 전환이나 소득 보전을 약속해도 막상 안 하던 일을 하려면 힘들고 불안하다.

손해 보는 집단은 억울한 약자가 돼 대중의 마음을 얻으니 똘똘 뭉쳐 싸울 동력이 생기지만 이득을 보는 집단은 혜택을 받은 승자가 되니 대중의 분노가 두려워서라도 조용히 숨게 된다.

역사책에는 허망한 명분론으로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사례들이 나온다. 북방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정공법으로 싸우지 않고 비겁하게 ‘위계(僞計)’를 써 이겼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장군이 있고 이런 명분론이 부담돼 무리한 작전을 벌이다 병사들을 몰살시킨 어처구니없는 사례도 있다.

당시의 조정 대신들이 비록 전쟁을 모르는 서생들이지만 나라 망하고 자기들도 죽는 판에도 명분만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지당한 명분을 무기로 정적을 궁지에 몰아 제압하는 당시의 정치판에서 유일한 ‘절대 무기’인 명분론을 지키려는 속셈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대의를 위해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뒤로하라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은 어느 조직에서나 강조되는 덕목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해관계는 개인적 수준을 넘어 다양한 이해관계 집단들과 맞물려 일종의 이익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이해관계는 나름의 명분이 더해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나아가 해당 조직이나 기구의 정체성을 형성해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른바 전문가의 의견마저 객관적 진실인지, 정치적 주장인지 모호해지면 이해관계의 대립을 넘어선 변화와 혁신은 불가능해지고 ‘힘센 쪽이 이기는’ 싸움터가 된다.

2019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원자력발전과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주장들을 생각해 보자. 사실과 왜곡이 뒤섞인 온갖 주장들 속에서 어디까지 객관적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집단적 이익을 포장한 정치적 주장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조선의 ‘농본주의(農本主義)’는 상공업 발달로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지배력이 흔들릴 것을 우려한 정책이지만 농부의 성실한 노력을 숭상하는 소박한 정서로 포장되고 다양한 문화적 장치를 통해 조선 사회의 정체성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 결과 조선은 힘없고 가난한 나라가 된 것은 아닐까.

학습된 가치와 문화적 상징성이 변화와 혁신을 막기도 한다. 창검과 활에 의존한 기존의 수군 전술을 함포 중심으로 바꾸려는 이순신 장군의 고민을 생각해 보자. 조선 수군 최고의 검객으로 날리던 그의 검술은 함포 전술에는 무력하다. 일본군에 맞서려면 함포 전술이 불가피하지만 화약과 함포를 새로 배우려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무사의 기개는 조선 수군에서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멀리서 방패 뒤에 숨어 함포를 쏘는 ‘덜 용감한’ 전술은 자나 깨나 배우고 다짐했던 조선 수군의 정신과도 맞지 않는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는 이런 함포 전술의 고민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묘사된 바 있다. 변화와 혁신으로 새로운 체제를 만들 때 기존의 학습된 가치와 문화적 상징성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최근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라고 불리는 양성평등 가족 친화 경영을 생각해 보자. 업무 절차를 개선하고 불필요한 회의와 회식, 무의미한 야근을 줄여 구성원에게 많은 여유 시간과 자기 계발의 기회를 주면 일도 가정과 개인 생활도 모두 나아질 수 있다.

하지만 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연월차에 휴가까지 챙기다 보면 동료와 조직을 위해 불꽃 투혼을 발휘하는 헌신적 구성원의 이상과 멀어지고 만다.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 내려면 엇갈리는 이해관계와 함께 변화에 수반되는 어려움, 학습된 가치와 문화적 상징성이 만들어 내는 제약을 이해하고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

비록 전쟁에 이겨 점령한 나라일지라도 일방적으로 손해를 강요하면 저항에 직면하는데 하물며 자유롭게 회사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기업 조직에서는 더욱 절실한 일이다. 세심하게 여러 구성원과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맞추고 공동의 이득을 만들어 나누지 못한다면 어떤 변화도 만들어 낼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CEO의 ‘의지’


경영학 책에는 남다른 창의력으로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는 훌륭한 사례들이 나온다. 대단한 일이지만 그런 성공 사례들을 가능하게 만든 바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창의력은 혁신의 원재료지만 기업 조직의 꽉 막힌 현실에서 남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별로 없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여유는 고사하고 잠시 신문 기사만 보고 있어도 따가운 눈총을 느끼게 된다. 새로운 시도는 고사하고 기존 제품을 쓸 시간도 없어 사용자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자부하는 모 전자 회사에서 개발한 태블릿 PC의 데이터 전송 포트가 취약해 컴퓨터의 영상 자료를 몇 개 옮기려면 20분이 넘게 걸린다. 새벽부터 밤까지 성실하게 일만 하는 연구원들에게 예능이나 드라마 프로그램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으니 일반 사용자들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혁신에는 생각보다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새로운 제품과 기술을 도입하면 기존의 사업이 약해져 고민이고 애써 부품 판매처와 판매망을 개발하면 경쟁자에게 판을 깔아주는 경우도 발생한다. 한정된 자원을 혁신에 투입하고 보니 밑천이 딸리기 때문인데 진정한 혁신은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체제의 혁신은 짝이 맞아야 한다. 세종대왕 치세에 조선 백성의 생활은 의외로 힘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 다양한 혁신 정책들이 기존의 사회 체제와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자의 거래와 유통을 위한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폐경제를 확대하려니 백성들의 삶의 현실과 맞지 않아 혼란이 벌어졌다. 고관들에 대한 의식주 용품 상납이 요즘 말로 표현하면 ‘스폰서형 뇌물’인 것을 간파하고 이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시 시장 기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삶의 현실과 부딪치고 말았다.
‘변화와 혁신’의 시대…모든 변화에는 아픔이 따른다
공유 차량 서비스와 택시의 이해 대립에서도 일부 볼 수 있듯이 삶의 현실은 촘촘하게 얽힌 이해 구조와 대중의 소박한(때로는 막연한) 정서에 맞물려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새로운 기술과 제품, 생산 방식에 대한 기업 조직 내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실험실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는 아주 작은 변화의 시도조차 실제로는 매우 힘들고 위험한 도전이 되고 만다.

오랜 시간 형성된 나름의 ‘체제(legacy)’와 여기에 스며든 고정관념이 족쇄로 작용한다. 대책 없는 소신과 판단은 세상을 어지럽힐 뿐이다.

개인의 사소한 습관 하나도 바꾸기가 힘든데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풀어내고 진정한 변화를 실현해 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하지만 변화와 혁신이 어려울수록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된다. 최고 수준의 응시자를 위한 고난도의 시험 문제를 풀어낸 셈이다.

CEO의 의지는 변화와 혁신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다. 구성원의 창의와 헌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CEO에게 막히면 되는 일이 없다. 물려받은 회사를 지키며 마음 편히 살려는 사장에게 ‘남다른 혁신’을 들이대면 정리해고 대상이 된다. 그 자리는 아무런 실속 없는 (그러나 남 보기엔 그럴듯한) 일만 벌이는 ‘회사 정치인’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변화와 혁신이 꾸준한 개선 노력의 결과인지, 어느 날 문득 발현되는 창의적 발상의 결과인지는 논의가 엇갈린다. 하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알고 보면 꾸준히 채우고 비워 내며 생각한 결과라고 보면 결국 시간과 에너지를 계속 쓰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일정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사람들의 지적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노력과 정성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하루에 2%만 조금 더 생각하고 노력하면 100일 후에는 무려 2배의 차이가 나게 된다. 간단한 복리 계산으로도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영혼을 건 필생의 노력과 시간 때우는 눈치 노동의 차이를 더해 보면 100일에도 수십 배의 차이가 날 수 있다.

CEO는 자기 스스로, 나아가 구성원들이 조금이라도 더 남다른 생각과 노력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고 구체적인 동기(motivation)를 제공하는 에너지 공급원이 돼야 한다.

변화와 혁신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애써 쌓아 온 기존의 기반을 버려야 하는 위험한 도전이다. 경영자가 삶의 현실에 허덕이는 구성원들과 함께 이런 힘든 도전에 나서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생존 경쟁의 압박이다.

전쟁은 가장 적나라한 생존 경쟁이다. 백성의 지지를 받는 유능한 장군은 막강한 적군이 있기에 숙청당하지 않고 힘을 지킬 수 있고 새로운 기술과 무기도 당장 이겨야 살아남으니 앞뒤 가리지 않고 쓸 수밖에 없다.

기업 경영도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시간에도 기업의 창의와 혁신을 이끈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정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진정한 변화를 소망한다면 창의와 혁신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경쟁 환경을 만드는 노력이 먼저 필요하다. 그래야 부스러기 권력을 탐하며 정년을 채우려는 ‘회사 공무원’들도 설 자리가 없어진다.

도전할 용기가 있는 기업과 연구자를 도와 혁신 생태계를 살릴 수 있다. 하지만 나랏돈 받아 쓰는 일이 기술 혁신과 사업 개발보다 쉬우면 유능한 벤처기업인이 ‘국고(國庫) 헌터(hunter)’가 되고 만다. 나랏돈 받아내는 정치력이 기술과 사업의 능력보다 중요해지면 그런 나라의 경제는 늪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1호(2019.11.18 ~ 2019.11.2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