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부터 EU 배출가스 규제 대폭 강화…출력 높은 슈퍼카, 전기차 라인업 필수
전기차에 미래 건 럭셔리카…내연기관 모델 단종식도
전기차 시장이 한 단계 진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가성비’가 전기차 트렌드를 관통하는 키워드였다면 2020년부터는 ‘럭셔리’와 ‘프리미엄’으로 무장한 전기차가 등장할 예정이다.

그동안 전기차는 대중차 브랜드의 영역이었다. 테슬라가 주도하는 전기차 시장에 현대차·기아차·제너럴모터스(GM) 등 완성차 브랜드가 뛰어들며 전기차 경쟁이 본격화됐다. 이 때문인지 지금까지 전기차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가성비와 주행 거리였다. 소비자들은 전기차를 구입할 때 보조금·지원금·연료비 절감 등을 꼼꼼히 따져 선택해 왔다.

대중차 업체들에 전기차는 자율주행·전동화와 함께 미래 성장 동력으로 꼽혀 왔다. 반면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소재·편안함·고성능·희소성 등 다양한 영역을 만족시켜야 하는 럭셔리·슈퍼카업계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다기통, 대배기량 엔진이 필수였던 럭셔리 슈퍼카 브랜드에 친환경을 대표하는 전기차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럭셔리·슈퍼카의 행보가 달라지고 있다.

럭셔리카 브랜드의 기술력과 희소성을 그대로 담은 전기차를 출시해 미래를 대비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런 변화는 시대의 흐름이 전기차로 향하고 있고 탄소 배출 규제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연기관차 단종식 연 마세라티
전기차에 미래 건 럭셔리카…내연기관 모델 단종식도
럭셔리카 전동화를 위해 ‘초강수’를 둔 업체들도 있다. 이탈리아 럭셔리카 브랜드 마세라티는 2019년 11월 내연기관 모델 단종식을 열고 브랜드 역사 최초로 전기차 모델 출시를 예고했다. 단종식은 생산 공장이던 이탈리아 모데나 본사에서 열렸다.

단종 대상은 스포츠카 주력 모델이던 ‘그란투리스모’와 ‘그란카브리오’다. 자동차 브랜드가 신차 발표 행사 대신 단종 행사를 개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마세라티는 마지막 생산 차량에 ‘제다(Zeda)’라는 이름을 붙였다. 알파벳의 마지막 철자 ‘Z’라는 뜻을 담은 제다는 마세라티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내연기관차의 마지막이 곧 전동화의 시작이라는 의미다. 마세라티는 2020년 전기로 가는 스포츠카와 하이브리드차(HEV)를 출시할 계획이다.

최근 마세라티의 모기업 피아트크라이슬러(FCA)는 프랑스 푸조시트로엥(PSA)과의 합병을 승인했다. 또 마세라티에 50억 유로(약 6조5500억원)를 지원해 전기차 개발을 지시했다.
전기차에 미래 건 럭셔리카…내연기관 모델 단종식도
벤틀리는 2025년까지 순수전기차를 포함해 전 차종에 전동화 모델을 선보일 예정이다. 벤틀리는 2018년 3월 세계 최초로 럭셔리 하이브리드 모델인 ‘벤테이가’를 공개했다.

2019년 12월 정식 출시된 벤테이가는 완전 전기화를 향한 벤틀리의 첫 시도였다. 제품뿐만 아니라 생산에서도 친환경을 지향하고 있다. 영국 크루에 있는 벤틀리 본사와 공장은 최근 탄소 중립 인증을 획득했다. 벤틀리는 이를 두고 “전 세계에서 지속 가능성이 가장 뛰어난 럭셔리 자동차 제조사로 도약하고 있다”고 홍보했다.
전기차에 미래 건 럭셔리카…내연기관 모델 단종식도
람보르기니 역시 2019년 9월 브랜드 최초의 하이브리드 슈퍼 스포츠카 ‘시안 FKP 37’을 공개했다. 람보르기니 역사상 가장 빠른 모델이다. 차량에 탑재된 V12 엔진은 최고 출력 785마력의 성능을 발휘하고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34마력이 더해져 총 819마력의 최고 출력을 뽐낸다.

독일 슈퍼카 브랜드 포르쉐는 100% 전기로만 달리는 전기차 ‘타이칸’을 2020년부터 판매할 예정이다. 포르쉐는 2019년 9월 한국에 ‘타이칸 터보 S’와 ‘타이칸 터보’를 시작으로 엔트리 모델 ‘타이칸 4S’를 공개하며 전기 스포츠카의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있다.

포르쉐 타이칸은 기존 전기차의 일반적인 400볼트 대신 800볼트 전압 시스템을 최초로 적용했다. 도로 위 급속 충전 네트워크의 직류(DC) 에너지를 활용해 단 5분 충전으로 최대 100km까지 주행할 수 있다.

포르쉐는 아예 2025년까지 전체 모델의 65%를 전기 구동차로 내놓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페라리도 2019년 11월 첫 양산형 하이브리드 슈퍼카 SF90 스트라달레를 공개했다. SF90 스트라달레는 최대 출력 780마력 8기통 터보 엔진과 220마력의 전기 모터가 결합해 최대 출력이 1000마력에 달한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 도달까지 2.5초가 걸린다.

초반 가속에 유리한 전기 모터가 속도를 높이면 고속 구간은 내연기관이 힘을 내는 방식이다. 전기 모터를 움직이는 동력인 배터리는 SK이노베이션 제품이 들어갔다.
전기차에 미래 건 럭셔리카…내연기관 모델 단종식도

◆더 강력해진 탄소 배출 규제

럭셔리 브랜드가 전기차 모델 생산에 적극 나서는 가장 큰 이유는 갈수록 강력해지는 내연기관 규제 때문이다. 파리 기후변화 협의에 따라 유럽연합(EU)의 이산화탄소(CO₂) 배출 규제가 2021년부터 강화된다(2015년 130g·km → 2021년 95g·km).

추가적으로 자동차 업체들은 신차의 CO₂ 배출량을 2021년 대비 2025년 15%, 2030년 37.5% 감축해야 한다. 더 이상 하이브리드만으로는 규제를 피할 수 없다. 중국의 신에너지차크레디트(NEV) 제도와 유럽의 슈퍼크레디트 제도에서는 하이브리드를 내연기관과 동일하게 취급할 만큼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다.

특히 출력과 토크가 높은 슈퍼카·럭셔리카들은 배출 가스도 많다. 배기량이 높을수록 업체에서 내는 벌금도 커진다. 시장 조사 기관에 따르면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신차를 판매하는 폭스바겐은 2021년 약 1조5000억~2조4000억원의 벌금을 내야 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럭셔리카 브랜드에서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모델 라인업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럭셔리·슈퍼카 브랜드들이 앞다퉈 전기차 양산에 돌입하면서 전기차 생산 모델도 대폭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에서 판매되는 친환경차(BEV·PHEV· FCEV) 모델 수는 2018년 말 60개, 2019년 100개, 2020년 176개로 확대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국내 전기차 시장 역시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한국에서 고가 수입차에 대한 수요가 높은 만큼 럭셔리·슈퍼카 브랜드 전기차 출시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2019년 1~11월 기준 판매 가격 2억원 이상인 차량의 판매 대수는 3900여 대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약 30% 늘어난 수치다. 3억원을 넘는 수입차도 2018년보다 더 팔렸다. 2019년 1~11월 기준 판매 가격 3억원 이상인 수입차는 전년 동기 대비 약 190% 늘어났다.

2020년 국내 전기차 시장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입차 업체들은 크게 테슬라·메르세데스-벤츠·포르쉐·아우디 등이다. 테슬라코리아는 2019년 11월 22일 경기도 과천 일대에서 모델3 고객 인도 행사를 열었다. 이로써 테슬라는 2020년 국내 시장에 모델3·모델S·모델X 세 모델을 선보인다.

메르세데스-벤츠는 2019년 ‘EQ의 해’를 선언하고 친환경차 라인업을 확장하고 있다. 최근 국내 시장에 출시한 EQC를 필두로 E클래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GLC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등 다양한 친환경차 라인업을 구축할 계획이다.

포르쉐는 국내 전기차 인프라 구축에도 나선다. 포르쉐는 전국에 9개 포르쉐 센터 외에도 10여 개의 주요 장소에 국내 최초로 320kW 초급속 충전기를 준비하고 있고 120여 곳에 완속 충전기를 설치할 예정이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7호(2019.12.30 ~ 2020.01.0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