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돋보기]
[곽수종의 경제돋보기] 마르크스에게 ‘블루보틀’의 의미를 묻다
[곽수종 한국조지메이슨대 경제학과 교수] 플라톤의 이데아(Idea)가 종교로 확대되면 기독교의 신앙이 된다. 그가 세상을 인간의 세상과 신의 세상으로 나누지 않았다면 어쩌면 인류는 약 2563년 전에 부처에 의해 제기됐던 ‘진아(眞我)’, 즉 참나를 찾는 인간 중심의 도량이 세계 종교의 원형이 됐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돈오돈수’가 맞을지 아니면 ‘돈오점수’가 맞을지를 놓고 경쟁하고 있지 않을까. 전자는 마음몸(體)상(相)움직임(用) 등이 결코 하나가 아니라 같이 움직이는 것이니 깨달음, 곧 그 찰나에 모든 것이 깨쳐지니 따로 닦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후자는 모든 깨달음은 별도의 독립된 깨달음이니 더욱더 용맹 정진해 큰 깨달음으로 가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서양의 가치체계를 완성하고 있는 기독교와 개척정신 혹은 노마드 정신은 이분법적 가치관에 좀 더 잘 적용되는 듯 보인다. 불(佛)은 모든 것을 하나, 즉 공(空)으로 보는 사상인 듯하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연역법과 귀납법적 가치체계를 보다 구체화했고 그 가치를 프리드리히 니체가 받아들여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정의한다. 스콜라철학의 쇠퇴, 중세 봉건적 가치체계의 붕괴와 함께 당시 물리학의 발전과 민주화의 여정이 급속한 사회적 현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서양 근대문명의 가치체계는 그렇게 인간이 초인, 즉 신이라는 권력의지를 스스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권력을 패권으로 해석하면 큰일이다. 권력은 행복이고 권력에의 의지는 행복추구권을 말한다. 필자로선 이 정도 상식적 해석이면 매우 족하다.

이러한 가치체계의 확장을 경제활동에 대입해 보면 인간의 의지가 루터와 캘빈의 종교개혁과 맞물려 알지도 못하는 천국과 극락세계에 집착하기보다 이태백의 장진주와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와서 잘 지내고 놀기”에 목적함수를 두는 것이다. 경제학 용어로 효용의 극대화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산업혁명은 인류의 사회적 신분 가치를 경제적 이분법 개념으로 구체화한다. 소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혹은 노동자농민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란 것이다. 후자는 늘 전자가 가지는 유일한 가치인 노동 가치 특히 노동의 잉여가치를 착취함으로써 더 부자가 된다는 간단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한 가지 있다. 인류 최초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성공한 곳은 영국도 독일도 프랑스도 아닌 당시 유럽에서 산업혁명에 가장 뒤처져 있던 러시아였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었다. 왜 하필 러시아였을까.

마르크스는 신이 아닌 인간으로 중세 봉건 이후 종교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한 축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상에 색깔 논쟁의 단초를 이론화했다. 니체는 이를 보고 혹여 무릎을 치며 “내 말뜻을 거의 다 알아들었는데, 직진하지 않고 유턴했네”라며 탄식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정은 이랬다. 러시아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산업 시설이 변변치 않은 우리가 어떻게 혁명을 완수할 수 있나”라고 물었다. 마르크스의 대답은 “……”이었다. 그도 답을 몰랐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코민테른의 완성을 그의 이론대로 적용하면 미국이 제1순위 후보다. 자본주의가 꽃피우고 극정상까지 간 다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책처럼 마르크스의 깊은 속내도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5G와 디지털 시대는 이런 논쟁이 재미없어진다. 노동의 잉여가치보다 기술과 그 기술을 개발할 자본을 지닌 자들의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중국 사회주의가 미국 자본주의를 앞지를 수도 있다. 중국은 국가가 거대 자본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잉여가치 착취가 아니라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자본의 세계가 미래 세계가 된다. 왜 그럴까. 이미지 가치 혹은 브랜드 가치라는 자본과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제3의 무형적 가치가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정치도 여기에 접목하면 쉽게 해석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이미지가 모두 동일하다. 자본주의는 이미지를 중시하고 자본적 가치로 인정한다. 그러니 블루보틀 커피와 애플 스마트폰을 사기 위해 하룻밤, 9시간씩 줄을 서는 이유는 명백하다. 마르크스에게 재차 묻고 싶다. “당신이 놓친 이미지라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5호(2019.05.20 ~ 2019.05.2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