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치판에선] - 정당 헤쳐 모여 바람…이념·가치 알기 힘든 총선용 ‘복제·복사’ 정당 이름들 또 등장

민주통합·통합민주·미래통합당…뭐가 다르지?
[한경비즈니스 = 홍영식 대기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장수 정당은 민주공화당이다. 5·16 군사정변 세력 주도로 1963년 5월 창당돼 1980년 신군부 세력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17년간 명맥을 이어 왔다. 한국 정당사에서 10년 이상 이름을 유지한 정당은 4개에 불과하다. 민주공화당과 한나라당(1997년 11월~2012년 2월), 신민당(1967년 2월~1980년 10월), 자유민주연합(1995년 3월~2006년 1월)이다.

제헌국회가 출범한 이후 72년이 지났지만 한국 정당 정치는 아직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간 220여 개 정당(국회의원 배출 기준)이 명멸했다. 정당 평균 수명은 국회의원 임기(4년)에도 못 미치는 2년 6개월에 불과했다.

특정 인물의 권력 잡기용으로 정당이 창당되고 그 인물이 대선에서 패배하거나 집권이 끝나면 그 정당은 사라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민주공화당,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이 그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화민주당과 새정치국민회의,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신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을 만들어 대권의 발판으로 삼았다.

통일국민당(1992년)·국민승리21(1997년)·국민통합21(2002년)·창조한국당(2007년)·국민중심당(2006년)·선진통일당(2012년)·대통합민주신당(2007년)도 특정 인물의 대권 전략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1회용 정당’이었다. 2016년 안철수 현 국민의당 대표가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만든 국민의당도 마찬가지 범주에 들어간다. 이른바 위인설당(爲人設黨)이다. 대선 또는 총선을 앞두고 여러 정치 세력들이 손잡고 신생 정당들을 만들었다가 선거가 끝나면 헤어지는 현상도 우리 정치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통합민주당→민주당→민주통합당→민주당

정당 이름 ‘손바꿈’ 현상은 2000년 이후 더 자주 나타났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등 3김 정치 체제가 막을 내리면서 벌어진 ‘백가쟁명’식 다툼의 결과다. 특히 현 더불어민주당 전신(前身) 정당들의 폐업이나 신장개업 현상이 두드러졌다. 2000년 1월 당시 여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는 그해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들어 당내 친노(친노무현) 세력과 동교동계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분화됐다. 친노 세력들이 당을 뛰쳐나와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을 창당했고 새천년민주당은 2005년 5월 민주당으로 당 이름을 바꿨다.

민주당은 대통합민주신당(2007년 8월), 통합민주당(2008년 2월)으로 바뀌었다가 2011년 7월 도로 민주당이 됐다. 5개월 뒤 민주통합당(2011년 12월)이 됐다가 2년이 안 돼 민주당(2013년 9월)으로 돌아갔다. 이후 안철수 대표가 합류하면서 민주당은 새정치민주연합이 됐다. 2015년 12월 안 대표가 탈당하자 새정치민주연합은 원외로 있던 민주당 세력을 끌어들여 더불어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20년 동안 민주당 동명 정당이 세 번 등장했다. 통합이란 말은 단골 메뉴였다. 이 때문에 ‘복사·복제 정당’이란 달갑지 않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현 미래통합당 전신 정당들의 당명 변경은 민주당에 비해 비교적 뜸한 편이었다. 1997년 11월 만들어진 한나라당은 2012년 2월 새누리당으로 바뀌었다.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한 뒤 한나라당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재편됐고 당명 변경과 함께 상징색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꿨다. 5년 넘게 지속되던 새누리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후폭풍으로 비박계 의원들이 대거 당을 떠난 뒤 대선을 앞둔 2017년 2월 자유한국당으로 바뀌었다.

선거를 앞두고 ‘간판갈이’를 했지만 매번 효과를 보지는 않았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해 218석의 민주자유당을 만들었지만 2년 뒤 총선에서 149석밖에 얻지 못했다. 1997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신한국당은 한나라당으로 개명했지만 패배했다. 새정치국민회의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안정적인 의석 확보를 위해 ‘386세대’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 인사들, 각계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해 새천년민주당을 만들었지만 석패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추진했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총선을 겨냥한 정략적이란 한나라당의 비판이 보수 표심을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은 민주통합당으로 간판을 갈아 달았지만 두 선거 모두 새누리당에 패배했다.

각 정당들의 이합집산은 현재 진행형이다. 바른미래당 안철수계와 유승민계 의원들이 뛰쳐나와 각각 국민의당과 새로운보수당을 만들었다. 바른미래당은 2년 만에 해체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바른미래당 탈당 비례대표 의원들이 국민의당으로 가면서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 ‘셀프 제명’이라는 촌극까지 벌였다(비례대표 의원은 자진 탈당하면 의원직을 박탈당함). 호남계 의원들도 탈당해 민주평화당·대안신당 의원들과 함께 신당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당 이름을 2011년 등장했던 민주통합당으로 정했다가 선관위에서 제동이 걸렸다. 자유한국당·새로운보수당·미래를향한전진4.0 등은 합당해 미래통합당을 만들었다. 새로운보수당과 미래를향한전진4.0은 창당 한 달 만에 문을 닫은 것이다.

◆당명만 보면 보수당인지, 진보 정당인지 알 수 없어

흘러간 옛 이름을 재소환하면서 당명이 헷갈리기 십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명에 가치와 이념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주요 선진국들의 정당은 당 이름에서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뚜렷하게 나타내는 게 보통이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일본의 자유민주당이 그렇다. 역사도 오래됐다. 미국 민주당은 창당 190년이 됐고 공화당은 166년을 자랑한다. 영국 보수당은 186년, 노동당은 120년이 됐다. 일본 자유민주당은 65년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우리 당 이름에 등장하는 통합·미래·평화 등은 좌파 우파 모두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일 뿐이다. 자유한국당에서 미래통합당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 우리 정치 수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보수 정당에서 당명으로 자주 쓴 자유라는 기존의 정체성을 버렸다. 2월 7일 의원 총회에선 당 이름에 통합·미래·행복·혁신·평화를 넣자는 목소리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념적 가치를 판별할 수 없는 단어들이다. 이에 대해 전희경 의원이 “보수 가치를 버려선 안 된다”며 반대하고 자유를 넣을 것을 주장했지만 관철되지 못했다. 한국 정치권의 철학 빈곤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는 게 전문가들의 비판이다.

총선 결과에 따라 당 이름이 또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여러 정파들이 이념적 가치와 정책 철학에 기반을 두지 않고 선거 유·불리에 따라 이합집산하다 보니 그렇다. 100년 정당은커녕 10년 정당도 요원해 보인다. ysho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5호(2020.02.24 ~ 2020.03.0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