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의료기기 생산 준비…여러 국가에서 요청받아 생산 태스크포스 꾸리기도
마스크·소독제·인공호흡기…코로나19로 생산 라인 바꾸는 유럽 기업들
[베를린(독일)=이유진 한경비즈니스 통신원]유럽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적극적으로 생산 라인을 바꾸는 기업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연합(EU) 국가들은 그동안 마스크·소독제 등 방역 물품 생산을 대부분 아시아에 의존해 왔다. 손세정제는 희귀품이 됐고 공급이 거의 불가능했던 마스크는 착용을 장려하지도 못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자 현지 기업들도 하나둘 손을 보탰다.

알코올을 원재료로 둔 기업들은 소독제를, 의류 회사는 마스크를 생산하고 있다. 심지어 폭스바겐은 3D 프린터를 이용한 인공호흡기 부품 생산을 저울질하고 있다.
◆화학·화장품 회사, 소독제 생산해 판매·기부

독일 미디어 ‘도이체벨레’ 보도에 따르면 독일 화학 기업 바스프는 소독제를 생산, 본사가 있는 루드비히스하펜 지역 병원에 손소독제를 무료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원래 생산 라인에 소독제는 없었지만 아 이소프로판올 등 소독제 생산 원료를 이미 갖추고 있었기에 비교적 빨리 생산 라인을 바꿀 수 있었다.

물론 라인란트팔츠 주정부 보건 당국에 특별 허가를 받고 생산에 들어갔다. 이미 1000리터에 해당하는 첫 생산 물량을 병원 측에 전달했다. 평상시 제품을 탱크에 실어 운반했는데 병원용 손세정제처럼 작은 용기에 담는 것도 새로운 일이었다. 바스프 측은 “얼마나 많은 양이 언제까지 생산될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병원은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훌륭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병원 의사들과 전체 의료진을 위해 기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니베아 브랜드로 유명한 바이어스도르프도 코로나19 위기 대처에 나섰다. 바이어스도르프는 함부르크·작센 주와 스페인 등에 있는 생산 공장에서 손소독제 500톤을 생산해 병원·경찰서·소방서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회사 측은 여기에 드는 비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면서 “코로나19에 대항해 모든 사회가 함께 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독일 전역의 클럽·술집 등 유흥업소 영업이 전면 금지되면서 주류 업체의 위기도 눈앞에 닥친 상태다. 하지만 알코올 원료 덕분에 코로나19 위기에 필요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독일 주류 회사는 너 나 할 것 없이 손소독제 생산에 뛰어들고 있다. 판매도 하고 기부도 한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예거마이스터는 본사 근처 지역 병원에 기부할 손소독제 생산에 알코올 5만 리터를 사용하기로 했다.

베를린에 있는 증류주 회사 DSM도 생산 라인을 조정해 술 대신 손세정제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생산한 손소독제 80%는 판매하고 나머지 20%는 베를린 양로원에 기부했다.

그런데 양로원에 기부한 손소독제에 ‘주세’가 부과돼 논란이 일고 있다. 손소독제 생산에 사용된 알코올이 마시지 못하는 알코올이 아니라 술에 쓰이는 식용 알코올이라는 이유로 주세가 부과된 것이다. 양로원 기부 물량 500리터에 해당하는 주세 5000유로(약 668만원)가 부과됐다. 회사는 예외 상황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국은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DSM 측은 “소독제 한 통 한 통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서 소독제 생산·판매·기부를 이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주세는 부과됐지만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있다.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소독제와 손세정제 수요가 급증했고 공급에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은 약국이나 제약 회사에서 소독제 생산을 제한하는 규정이 폐지됐다. 화학 공장, 화장품·향수 제조업체는 손소독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규제 완화로 소독제 생산을 위한 에탄올 공급이 안정화됐다”고 설명했다.

‘메이드 인 독일’을 강조하던 의류 기업 트리게마도 일찍이 재사용할 수 있는 고급 마스크 생산에 돌입했다. 많은 의류 기업들이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생산 공장을 옮겼지만 트리게마는 꾸준히 독일 내 공장을 유지하던 곳이었다.

현재 많은 의류 기업들이 세계적인 공급·생산·물류 시스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트리게마는 독일 내에 모든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큰 어려움 없이 마스크 생산으로 돌릴 수 있었다. 트리게마는 이번 코로나19 위기로 ‘국내 공장’의 중요성과 함께 현지 언론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또 다른 독일 의류 기업인 에테르나는 슬로베니아에 있는 공장 라인을 마스크 생산 공정으로 바꿨다. 첫날 1만3000개를 생산했고 이후 하루 생산량 2만5000개까지 늘릴 계획이다. 마스크뿐만 아니라 방호복 생산도 현재 고려하고 있다. 지금은 일단 슬로베니아 내에서만 공급할 수 있는 상태인데 유럽 전체로 공급할 수 있도록 조정 중이다.
◆코로나19로 깨달은 ‘국내 공장’의 중요성

독일의 대표 자동차 기업 폭스바겐도 의료 기기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폭스바겐 측은 3월 20일 현지 언론에 “(코로나19 위기에) 도울 준비가 돼 있다”면서 관련 내용을 공개했다. 폭스바겐은 현재 여러 국가에서 의료 기기 생산 요청을 받아 태스크포스를 꾸린 상태다. 여러 제조 공정 중에서도 특히 플라스틱 가공 기술 분야에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폭스바겐은 세계적으로 최신식 3D 프린터 150여 개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인공호흡기 내에 들어갈 부품을 생산하겠다는 목표다. 인공호흡기 완제품은 프린트할 수 없지만 호스나 마스크 등 일부 부품 생산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직원들은 이미 생산에 쓰일 재료를 테스트하고 있고 이를 위해 필요한 원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방법을 찾고 있다. 독일 연방 정부와 긴밀하게 협의, 현재 첫 실험 생산이 이뤄졌다. 폭스바겐 측은 “우리에게 의료 기기 생산은 새로운 영역이지만 기술적 요구 사항과 생산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구축하게 되면 바로 생산에 돌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막상 의료 기기 생산 업체는 이런 움직임에 회의적이다. 독일 정부로부터 인공호흡기 1만 개를 주문받은 독일 의료 기기 기업 드래거는 생산 과부하로 현재 3교대로 바꿔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드래거 측은 현지 언론을 통해 “이 기술을 외부로 가져가거나 자동차 기업에 라이선스를 주는 것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면서 “자동차 공정에서 의료 기기를 생산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쌓아 놓은 마스크를 병원에 기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독일 업무용 소프트웨어 기업인 SAP는 독일 외무부에 힘을 보탰다. 세계 곳곳에 여행을 갔다가 고립된 독일 국민을 데려오기 위한 온라인 등록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독일 정부의 요청을 받자마자 전 세계에서 홈 오피스 중인 프로그래머 40명이 작업에 착수해 23시간 만에 솔루션을 완성했다. 여행자들의 개인 정보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가장 큰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SAP 측은 “우리 일을 과대평가하고 싶지 않다. 일은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코로나19로 기업 존폐가 우려되는 시기임에도 물리적으로 여력이 있는 기업들은 이렇게 코로나19 방역에 힘을 보태고 있다. 생산 제품을 기부하는 곳도 많지만 판매해 수익을 올리는 곳도 많다. 이런 행보는 물론 기업 마케팅에도 큰 역할을 한다.

현재 독일을 포함한 EU는 의료 기기와 방역 제품을 위한 원재료 수급, 생산 공정, 물류까지 역내에서 가능하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다. 기존에 비슷한 원재료나 공정 라인을 가진 기업들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유럽 기업들의 변화가 예상된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3호(2020.04.20 ~ 2020.04.2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