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스타트업이 성장하는데 벤처캐피털(VC)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성장 과정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 ‘성장 윤활유’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력 구성을 비롯해 어려운 문제들을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며 때로는 더 큰 사업 기회를 위해 사업 파트너를 찾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한국의 대표적 VC인 LB인베스트먼트의 박기호 대표에게 ‘VC의 눈으로 본 투자를 부르는 스타트업의 조건’을 들어봤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펄어비스·마켓컬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박 스타트업’들에 사업 초기부터 투자를 주도했습니다.
“LB인베스트먼트의 투자 전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선택과 집중’입니다. 처음부터 가능성이 높은 투자 분야를 선별하고 그 분야에서 ‘될성부른 기업’이라는 판단이 서면 초기부터 최소 20억~30억원 규모의 자금을 과감하게 베팅합니다. 그 가능성을 믿고 베팅하는 만큼 ‘끝까지 함께 가는 것’도 중요한 투자 원칙입니다. 실제로 투자 기업 중 절반 이상에 후속 투자를 진행했습니다. ‘선택과 집중’ 전략은 물론 실패하면 타격이 크지만 좋은 기업을 선별하기만 한다면 스타트업으로서도 안정적으로 장기적인 파트너십 관계를 유지하면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어 좋습니다.”
-‘될성부른 스타트업’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네 가지를 기준으로 봅니다. 먼저 창업자와 창업그룹이 얼마나 우수한지 가장 중요하게 봅니다. ‘우수하다’는 것은 단지 좋은 학교와 경력을 쌓은 사람들을 찾는 게 아닙니다. 해당 비즈니스에 대해 얼마나 이해도가 깊은지, 이를 수행할 기본적인 기술과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지 더 중요하게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팀원들 간의 협력이 얼마나 유기적이고 탄탄하게 이뤄질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둘째는 이 회사의 ‘코어 콘텐츠’ 경쟁력을 매우 면밀하게 따집니다. 아무리 기발한 사업 아이템이나 아이디어를 갖고 있더라도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이 회사가 실제로 ‘코어 콘텐츠’를 뒷받침할 만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지, 이를 비즈니스로 얼마나 탄탄하게 풀어내는지 등을 살펴보는 겁니다. 셋째는 시장의 차원에서 ‘국내 1위’가 될 수 있는 기업인지 아닌지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패션’ 분야 스타트업이라고 하면 그중에서도 1위를 할 수 있는 기업이라는 확신이 서야 투자하는 겁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면 ‘해외 시장에 나갈 수 있는 기업’인지를 봅니다. 충분히 큰 시장에서 승부를 볼 수 있는 기업에 투자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투자자로서 ‘미래의 수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당연하겠죠. 정말 이 회사가 충분히 성숙했을 때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을 고려한다면 얼마나 매력적일지 고려하고 있습니다.”
-VC 투자자의 눈으로 볼 때 투자 유치를 원하는 스타트업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있나요.
“실제로 굉장히 좋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갖추고 있지만 투자자를 전혀 설득하지 못하는 팀들도 적지 않습니다. 투자 업체를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창업자와 창업팀’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기업에 투자를 결정할 때는 한두 번의 만남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여러 번 만나고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 창업자가 어떤 사람인지, 팀원들은 얼마나 열정적인지 자연스레 알아가게 됩니다. 창업팀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쌓여야 확신을 갖고 투자를 진행할 수 있으니까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업계획서입니다. 간단하게 비유해 어떤 사람의 최종 목적지가 대전이라고 하면 이때 자신이 ‘대전’을 가겠다고 백번 강조하는 것보다 ‘지금부터 어떻게 대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의 교통량은 어떤지, 이를 바탕으로 언제 어떤 길을 활용하는 것이 빠른지 등의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 가능한 계획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잘 준비된 창업팀’과 함께 ‘치밀한 사업계획서’야말로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가장 중요한 무기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내 VC업계도 많은 변화가 예상됩니다. 투자 심리 위축에 대한 우려가 큰데요.
“단기적으로 투자 심리 위축 등의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투자를 진행하기보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그로 인한 시장의 변화가 눈에 보일 때까지 투자자금을 들고 기다리는 경향이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작되는 초입에 서 있습니다. 코로나19는 기존의 경제 체계를 단단히 둘러싸고 있던 둑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둑이 다시 구축될 때까지 혼란이 예상되지만 역사적으로 봐도 위기 다음에는 반드시 기회가 옵니다. 제도적이거나 관습적인 이유로 기존 경제에서 수용하지 못했던 많은 분야들에 과감히 도전하고 기회를 찾는 스타트업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야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을까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1차적으로 나타난 변화를 꼽자면 ‘비대면’의 확산이겠죠. 이커머스 분야의 성장이나 메디컬 분야에서도 그동안 제도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던 원격 의료 분야 등에서 많은 발전이 있을 겁니다. 코로나19로 국내 진단 키트가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그 외에도 글로벌 의료 진단 기기들 가운데 우수한 업체들이 세계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융 시장에서는 비대면 자산 운용 시장이 발달하면서 로보어드바이저가 굉장히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러한 변화를 아우르는 공통적인 키워드는 ‘인공지능(AI)’입니다. 지금까지 글로벌 스타트업들의 투자 트렌드는 주로 O2O(Online to Offline) 플랫폼 기업들에 몰려 있었습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현재 글로벌 유니콘의 65%가 인터넷 소프트웨어, 온디맨드 업체 등입니다. 지금까지가 모바일 환경 속에서 플랫폼이 구축되는 단계였다면 앞으로는 AI 등 기술 경쟁력에서 우위에 있는 업체들이 두드러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판단에 따라 LB인베스트먼트는 지난해부터 ‘딥 테크’ 업체들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LB인베스트먼트는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등에서도 활발하게 투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07년 처음 중국에 진출했으니 벌써 중국에서 활동한 지 13년째입니다. 중국에서 활동 중인 외국계 VC만 해도 2000여 개를 넘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중에서도 LB인베스트먼트는 중국 내 VC 상위 50위 안에 들 만큼 큰 성과를 얻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장을 놓고 보면 가장 중심이 되는 두 시장이 실리콘밸리와 중국입니다. 특히 이커머스나 플랫폼의 변화는 중국이 한국보다 훨씬 빠릅니다. 중국 진출을 통해 자연스럽게 글로벌 시장의 이와 같은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점이 큽니다. 글로벌 시장의 최신 동향을 국내 스타트업에 알려주고 더 큰 기회를 만들도록 VC가 촉매 역할을 해주기도 하고요, 국내 업체들과 중국 등 해외 업체들을 연결해 줌으로써 양쪽 시장에서 더 큰 기회를 창출해 내기도 합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등으로도 활동 영역을 적극적으로 넓혀 가는 중입니다.”
-국내 VC업계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스타트업들에 대한 국내 VC들의 투자 규모가 커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글로벌 VC와 비교하면 작은 규모입니다. 실리콘밸리의 8분 1 정도니까요. 한국 유니콘 기업들 역시 대부분은 한국보다 해외 투자자들이 주도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특히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한다면 필요한 자금의 규모 역시 커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점은 국내 VC업계가 앞으로 성장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것은 국내 VC업계에 그 어느 때보다 우수한 인력들이 많이 유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타트업계는 물론 최근에는 투자심사역에도 좋은 젊은 인재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VC는 그 어떤 산업보다 최첨단의 기술에 관심을 갖고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분야입니다. 앞으로 국내 VC업계가 우수한 인력들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스타트업들에 충분한 재원을 공급하면서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vivajh@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5호(2020.05.04 ~ 2020.05.1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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