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극심한 수요 절벽은 정유업계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만든다. 유가 폭락, 마이너스 정제 마진, 수요 절벽 등 전례 없던 3중고에 부닥친 정유업계의 생존 전략은 무엇일까.
올 1분기 정유 4사(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가 낸 적자는 4조3775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4사의 연간 합산 영업이익이 3조1000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1분기 만에 1년 치 영업이익보다 1조원이나 많은 손실을 본 셈이다.
◆수요 회복은 내년부터 가능할 듯
정유업계 1위인 SK이노베이션은 가장 많은 적자를 냈다. SK이노베이션 1분기 매출은 11조1630억원, 영업손실은 1조7752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1962년 회사가 정유 사업을 시작한 이후 최악의 실적이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도 1조원이 넘는 적자를 냈다. GS는 자회사 GS칼텍스의 1분기 영업손실은 1조318억원, 매출은 7조715억원이라고 발표했다.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작년 동기와 전 분기에 흑자였다가 모두 적자 전환됐다. 정유 부문에서만 영업손실이 1조1093억원이었다.
에쓰오일도 창사 이후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에쓰오일 1분기 영업손실은 1조73억원에 달한다. 사업부분별로는 역시나 정유 부문 영업손실이 1조1900억원을 기록해 적자 폭을 키웠다.
반면 석유화학 부문은 코로나19의 글로벌 확산으로 인한 수요 약세에도 불구하고 유가 하락에 따른 원재료 가격 하락으로 스프레드가 소폭 상승하면서 전 분기보다 상승한 665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현대오일뱅크의 1분기 영업손실은 5632억원이다.
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상반기까지 수요 약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국신용평가는 5월 14일 보고서를 통해 “당분간 유가, 정제 마진과 주요 제품의 수급 상황에 연계된 정유업계의 실적 부진이 예상된다”면서 “현금 창출력 저하, 투자 자금 소요에 기인한 재무 부담이 지속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SK이노베이션·SK에너지·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SK인천석유화학 등 6개 정유사 회사채 신용 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GS칼텍스는 종전처럼 ‘안정적’으로 등급 전망이 유지됐다.
정유업계는 사상 최악의 업황을 탈출하기 위해 비정유 부문의 포트폴리오를 계속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유가와 정제 마진은 외생 변수이기 때문에 기업 차원에서 컨트롤할 수 없고 관련 모니터링을 강화하며 가동률 조정 등 가능한 수준의 제한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며 “정유업계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비정유 부문의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비정유부문은 투자를 이어가며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정유 부문은 공장을 보수적으로 가동하며 수요 개선을 기다리겠다는 의미다.
SK이노베이션은 업황 악화에 따라 공장 가동률을 추가적으로 낮출 계획이다. 지난 3월 정유 공장 가동률을 85%로 낮춘데 이어 5~6월 예정된 정기 보수를 1~2주 정도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보수에 들어가면 가동률은 현 수준보다 약 10%포인트 더 내려간다.
◆SK이노는 배터리·GS는 올레핀에 미래 건다
정유 부문에서 보수적인 공장 가동 계획을 발표한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사업 확대에 미래를 걸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1분기 배터리 사업 영업손실은 전 분기보다 75억원 개선된 1049억원을 기록하며 선방했다. 작년 말 완공한 중국과 헝가리 생산 공장을 올해 상반기부터 양산 가동하며 초기 가동비가 발생했지만 운영 효율화 등을 통해 손실을 줄였다.
1분기 소재 사업은 전기차용 리튬이온배터리 분리막(LiBS) 판매가 늘며 영업이익이 전 분기보다 36억원 늘어난 270억원을 거뒀다.
SK이노베이션은 특히 ‘포스트 반도체’라고 불리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분야는 자본 투입 기간이 긴 사업으로 매년 2조원을 투자해 왔고 올해도 비슷한 규모로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 예정된 설비 투자비는 3조원 후반대에서 4조원 초반대로, 60%가 배터리와 전기차용 LiBS에 투입된다.
시장 조사 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올해 1분기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 기준 점유율 4.5%로 7위를 기록했다.
작년 업체별 순위에서 처음으로 10위에 진입한 뒤 계속 상승세다. 특히 작년 말 완공된 중국 창저우 공장과 헝가리 코마롬 공장이 본격 상업 생산을 앞두고 있어 단숨에 톱5 진입까지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은 올 연말까지 전기차 80만 대에 공급할 수 있는 배터리 생산 능력을 확복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올해 4월 미국 조지아 주에 11.7GWh 규모의 둘째 배터리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2년 뒤인 2023년에는 총생산 능력 71GWh 규모를 갖추고 2025년에는 100GWh 규모의 생산 설비를 갖출 계획이다.
GS칼텍스는 올레핀 생산 시설 투자 등을 통해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GS칼텍스는 2018년 전남 여수 제2공장 인근 약 43만㎡ 부지에 2조7000억원을 투자해 에틸렌 70만 톤, 폴리에틸렌 50만 톤을 생산할 수 있는 복합분해설비(MFC) 생산 시설을 건설하고 있고 2021년 상업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GS칼텍스 MFC 생산 시설은 석유화학 제품의 기초 유분인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을 생산하는 시설이다. 주로 나프타를 원료로 투입하는 석유화학 회사의 나프타 분해 설비(NCC)와 달리 나프타는 물론 정유 공정에서 생산되는 액화석유가스(LPG)와 부생가스 등 다양한 유분을 원료로 투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에쓰오일은 석유화학 부문에 12조원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에쓰오일은 2018년 총 5조원을 투자해 건설한 복합 석유화학 시설 프로젝트에 이어 '석유화학 2단계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석유화학 2단계 프로젝트에는 2024년까지 총 7조원을 투자할 것으로 예상된다. 에쓰오일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지난해 6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와 전략적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석유화학 2단계 프로젝트는 나프타와 부생가스를 원료로 연간 150만 톤 규모의 에틸렌과 기타 석유화학 원재료를 생산하는 스팀 크래커와 폴리에틸렌(PE)·폴리프로필렌(PP) 등 고부가 가치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올레핀 다운스트림 시설로 구성된다.
에쓰오일은 2단계 프로젝트를 위해 울산시 온산공장에서 가까운 부지 약 40만㎡를 현대중공업으로부터 매입하기도 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정유부문의 수요개선을 기대하며 설비 효율을 높일 계획이다. 현대오일뱅크는 하반기 수요개선을 대비해 5월 22일까지 예정된 제2공장 정기 보수 기간 동안 정유·석유화학 설비의 효율성 개선 작업을 진행해 원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전략이다.
또 비정유 부문으로 포트폴리오를 분산하기 위해 석유화학 부문의 투자를 차질 없이 진행할 계획이다.
현대오일뱅크는 2010년 이후 석유화학·윤활기유·제철화학·유류터미널 분야에 계열사를 설립해 비정유 부문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석유화학 부문 대표 계열사인 현대케미칼은 2021년 가동을 목표로 복합 석유화학 공장(HPC)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의 합작 투자로 2조7000억원이 투입된 프로젝트다. HPC가 완공되면 연간 폴리에틸렌 75만 톤, 폴리프로필렌 40만 톤이 생산된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HPC를 통해 올레핀 석유화학 부문에 진출하게 되면 비정유 분야 영업이익 비율이 45%까지 늘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내년부터 정유업계 실적이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신용평가는 보고서에서 “2021년에는 추가적인 유가 상승 효과에 따른 긍정적 시차 효과가 반영되고 저유가와 글로벌 경기 회복이 석유 제품 수요 회복에 기여하면서 2019년 수준 이상의 영업이익이 가능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7호(2020.05.16 ~ 2020.05.2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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