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 디파이의 미래를 가늠해 볼 세 가지 궁금증…‘과신’도 ‘무시’도 하지 말아야 [한중섭 한화자산운용 디지털 자산팀 과장 ‘비트코인 제국주의’, ‘넥스트 파이낸스’ 저자]
2020년 디지털 자산 블록체인업계의 핫한 키워드는 단연 디파이(Defi : 탈중앙화 금융)다. 디파이(decentralized finance)는 말 그대로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미들맨의 개입이 거의 없는 금융 시스템이다. 국가·은행·금융회사 등 특정한 중앙 기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코드에 기반해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디파이 시장 참여자들은 중앙 기관의 허락을 받을 필요 없이 자유롭게 디파이 시스템에 참여해 수익 취득(업계에서는 이것을 ‘이자 농사’라고 부른다), 대차 거래, 스테이블 코인 발행 등 다양한 금융 활동을 할 수 있다. 이때 디파이 생태계에서 취급되는 디지털 자산은 은행과 같은 중앙 기관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스스로 관리한다. 디파이는 주로 이더리움 기반의 토큰들을 취급하는 것이 특징이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기타 가상 자산뿐만 아니라 외환·주식·원자재 등 전통 자본 시장에 존재하는 자산까지 취급하려는 시도가 디파이 생태계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아마 시파이(centralized finance : 중앙 기관에 의존하는 중앙화 금융)에 익숙한 일반 사람들은 디파이 개념이 쉽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업계 종사자들에게도 빠르게 변하고 있는 디파이 발전 속도가 따라가기가 벅찬 수준이라 ‘디포자(디파이 포기자)’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일반 사람들에게 비트코인을 설득하는 것만큼 완강한 비트코인 신봉론자들에게 디파이를 납득시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소크라테스 마인드로 디파이를 공부하다 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많을 것이다.
◆금융공학의 역사 속에 있는 디파이
디파이는 금융공학의 역사와 궤를 함께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는 정크본드와 차입 매수(LBO) 기법이 주목 받았고 1990년대에는 노벨상 수상자들로 구성된 헤지펀드 드림팀 LTCM이 부상했다. 2000년대에는 부채담보부증권(CDO)·주택저당증권(MBS) 같은 파생 상품이 인기를 끌었다. 2010년도에는 알고리즘에 기반한 초단타 매매, 차익 거래 등을 하는 퀀트 전문가들이 금융 시장에 등장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각 시대를 풍미한 금융공학의 끝은 좋지 못했다. 정크본드에 투자한 저축 대출 업체들이 파산하면서 정크본드 시장이 무너졌고 ‘정크본드의 왕’이라고 불렸던 마이클 밀켄이 세운 드렉셀 번햄 래버트는 파산했다. 승승장구하던 LTCM은 러시아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불능) 선언을 예측하지 못해 순식간에 파산했고 무분별하게 커진 파생 상품 버블이 터지자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고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2010년대는 플래시 크래시(금융 시장이 매우 짧은 시간에 갑작스럽게 폭락하는 사건)가 발생해 관련 규제가 강화됐고 부당한 이득을 취한 사람들은 기소됐다.
디파이는 2020년대 금융공학 역사의 새로운 포문을 열었지만 현재 디파이 열풍은 비이성적 과열 단계이고 언젠가 버블이 터질 것이라는 점이 필자의 견해다. 마치 2017~2018년 암호화폐 공개(ICO)처럼 말이다.
하지만 버블이 터진 이후 디파이 생태계가 잘 성장하면 금융공학의 패러다임이 한 단계 도약할 잠재력이 있다고 본다. 특히 디파이 프로토콜이 향후 수년 내 탈중앙화돼 구동된다면 금융 산업에 파괴적인 혁신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으로 필자는 믿는다. 디파이처럼 중앙 기관의 허락 없이 시장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디지털 금융 시스템에 참여하는 것은 금융공학의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필자가 디파이에 대해 생각해 본 아주 기초적인 내용이다. 모든 내용을 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디파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감을 잡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디파이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면 직접 공부해 보기 바란다. 부디 고수익의 유혹에 홀려 ‘묻지 마 투자’를 하는 것은 지양했으면 한다.
① 유틸리티 현재 디파이의 주요 유틸리티는 투기성 돈놀이다. 투기와 돈놀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투기는 투자자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자본과 인재를 산업에 유치하는 데 유용하다. 또 돈놀이는 금융업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파생 상품뿐만 아니라 헤지펀드, 고위험 주식, 정크 본드, 기회 추구 부동산 등도 따지고 보면 세련된 돈놀이다. 중요한 것은 돈놀이에도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금융업은 실물 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대체로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다. 하지만 현재 디파이는 투기성 돈놀이 외의 명분이 없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실물 경제와 딱히 연관도 없어 보인다. 물론 이것은 디파이뿐만 아니라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 자산업계 전체가 일반 사람들에게 공격받는 논리다. 업계에서 자주 회자되는 통계인 17억 명의 ‘은행 계좌가 없는(unbanked)’ 인구가 디파이 커뮤니티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수천~수만 명 남짓한 디파이 유저 수를 보면 디파이는 아직 ‘그들만의 잔치’로 생각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언젠가 디파이로 인해 아프리카에 사는 미혼모가 일본에 사는 고령 투자자에게 돈을 대출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일본 투자자는 돈을 빌려준 대가로 고수익을 얻는다면 디파이는 훌륭한 명분과 유틸리티를 지니게 될 것 같다.
② 스토리 새로운 패러다임이 세상에 전파되기 위해서는 기존에 존재하던 개념을 활용한 새로운 스토리가 필요하다. 마치 ‘말 없는 마차(자동차)’처럼 말이다. 블록체인을 일반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어렵다. 그나마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이라는 강력한 스토리가 있어 일반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다, 물론 이 스토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디파이는 정말이지 모호하다. 누군가 ‘탈중앙화 금융’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면 어떤 스토리를 떠올릴까. P2P, 인터넷 금융, 디지털 뱅크…. 이는 이미 존재하는 개념인데 일반 사람들에게는 사실 디파이와 이것들이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크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디파이의 개념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디파이는 ○○다’라는 심플한 스토리가 필요하다. ‘디파이는 회사가 아닌 코드를 신뢰한다’는 명제는 사실 이 업계에서나 통용되지 일반 사람들이 수용하기는 어려운 헛소리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넥스트 파이낸스’ 공저자 차두휘 씨의 ‘디파이는 금융의 유튜브다’가 핵심을 잘 짚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유튜브를 통해 대형 미디어를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또 이것이 전 세계 관객들에게 노출된다. 마찬가지로 개발자들은 디파이를 통해 레고를 조립하듯이 다양한 금융 시스템을 인터넷상에 구현할 수 있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 여기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③ 규제 국제 자금 세탁 방지 기구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앞으로 가상 자산 관련 규제가 강화되면 강화됐지 완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당국에 디파이는 세금, 자금 세탁, 해외 자금 유출 등 골치 아픈 문제가 많다. 가상 자산 거래소가 라이선스제로 바뀌고 있듯이 디파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에도 라이선스 의무가 부과되면서 디파이 업체는 결국 규제를 준수하는 시파이 업체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때 디파이 프로토콜에 대한 규제는 모호할 수 있다. 만약 향후 수년 내 특정 디파이 프로토콜이 비트코인처럼 충분한 수준으로 탈중앙화된다면, 다시 말해 미국 법정에 세울 주체가 없어진다면 이것은 금융공학의 역사에 족적을 남길 중요한 이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 사람들에게 디파이는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개념일 것이다. 높은 수수료, 불편한 사용자 인터페이스, 자금 세탁, 세금 이슈 등 디파이는 극복해야 할 수많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디파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디파이가 금융공학의 역사를 새로 쓸지, 아니면 폰지 사기 해프닝으로 역사에 기록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기다’, ‘권위 있는 전문가(주로 경제학자)들이 코인은 전부 사기라고 했다’, ‘정부가 규제하면 없어질 것이다’는 식으로 지적 탐구 대상으로나 투자와 사업화 관점에서 디파이를 무시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이는 마치 ‘비트코인은 사기’라고 단정 짓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무시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난 10년간 스쳐 지나간 수많은 기회를 날려버린 것과 같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대할 때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과감하게 인정하고 개방적인 학습 태도를 갖출 필요가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4호(2020.09.14 ~ 2020.09.2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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