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꼼꼼한 전략과 기획에 대한 투자가 시간 낭비일 수도…때로는 빠른 포기도 ‘답’
[김한솔 HSG휴먼솔루션그룹 수석연구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다시 확산되는 바이러스에 또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진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견디고 이겨낼 수 있을까.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려 TV 예능 한 편을 보다가 ‘어?’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대한 얘기다.
개그맨 유재석 씨 한 명이 트로트를 부르는 ‘유산슬’이 됐다가 드럼을 치는 ‘유고스타’로 변신하고 라면을 끓여 주는 ‘유라섹’이 됐다가 아이돌 혼성 그룹 멤버 ‘유두래곤’도 되는 프로그램이다. 예능 하나가 힘겨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극복해야 하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 ①우연성의 힘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 원주민들을 연구하다가 ‘당장은 어디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관하는 습관’을 발견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수집하는 것이다. 이를 빗대 ‘어떤 재료로든 창조적으로 활용해 예술로 완성하는 것’, 즉 우연성에 기대는 것을 ‘브리콜라주’라고 말한다.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몇 년 후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변화 환경 속에서 ‘전략’을 세우고 ‘기획’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우연성의 힘이 필요하다.
‘놀면 뭐하니’도 그랬다. 프로그램을 만든 김태호 PD가 출연자 유재석 씨의 집에 찾아가 달랑 카메라 한 대를 쥐여주고 나온 게 프로그램의 시작이었다.
우연의 힘을 믿고 이것들이 즉흥적으로 이어지면서 만들어 내는 이야기. 그래서 유재석 씨의 초보적인 8비트 드럼이 뮤지션들을 거치며 그럴 듯한 음악으로 발전했다. 다음 뮤지션이 누구일지 모른 채, 어떤 장르가 될지도 모호한 채 드럼 비트 위에 멜로디와 목소리가 얹어지며 ‘음악’이 완성돼 나갔다. 만약 이 프로세스를 처음부터 제작진이 ‘기획’했다면 어땠을까.
드럼 비트 위에 먼저 건반을 얹고 그다음 현악기를 추가하고 가사는 누가 쓰고 멜로디는 누가 만들고 노래는 누가 부르고 등등…. 아마 ‘음악감독’이 그리는 음악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제작진이 발 벗고 섭외하기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이렇게 우연과 즉흥이 이어지면 각자 본인이 맡은 부분에서 ‘자기 색깔’이 나오고 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가 만들어진다.
많은 조직의 리더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부하 직원들을 본인이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사람이 리더는 맞다. 결과에 책임지는 것 역시 리더의 몫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구성원의 몫이다.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서는 구성원에게 맡기자. 특히 요즘처럼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시대, 그래서 과거 리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맞지 않을 때가 많은 시기에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
②집단의 힘
그럼 궁금해진다. 우연성을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집단지성이다. 집단의 힘이 크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1907년 프랜시스 골턴이 한 ‘황소 무게 맞히기’ 실험이 대표적이다. 소에 대해 아무 지식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게를 찍은 값을 평균했더니 놀랄 만큼 소의 체중과 비슷한 값이 나온 것이다.
집단지성은 단순한 수학적 계산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게놈 배열을 해석하는 알고리즘 정리가 어려워 클라우드 소싱을 이용한 덕분에, 또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태양 프로톤 현상에 대한 예측 정확도를 높이는 게 쉽지 않아 인터넷에서 해결책 공모를 한 덕분에 전문가들이 골머리를 앓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놀면 뭐하니’도 비슷하다. 최근에는 ‘싹쓰리’라는 혼성 그룹을 만들어 음원 차트를 휩쓸었는데 그 과정이 재밌다. ‘싹쓰리’라는 팀명도, 팀원 개개인의 활동명도 모두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통해 만들었다. 타이틀 곡을 찾을 때도 비슷했다. 이 곡을 누가 썼는지에 대한 정보 없이 출연자들이 ‘그냥’ 듣고 호불호를 얘기하고 곡을 골랐다. 누구 하나의 권위나 주장이 아니라 다 같이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 냈다.
집단지성이 발휘되려면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전문가’로서의 힘 빼기다. ‘뉴 타입의 시대’라는 책에 인상적인 사례가 나온다. 일본 도카이도 신칸센(고속철도) 개발 당시 철도 엔지니어들이 이 프로젝트에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신칸센이 목표로 하는 시속 200km 이상으로 달리면 레일의 변형이 생겨 열차 탈선의 원인이 된다는 우려였다.
철도 전문가들의 의견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다고 포기할 때 전투기 등을 연구·개발한 기술자들이 투입돼 다른 의견을 냈다. 항공기를 개발할 때 진동 문제를 해결한 경험을 토대로 열차 진동을 제어할 수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그들은 듣지 않았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일본은 초고속철도 신칸센을 만들어 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이 아는 게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쿨’하게 인정해야 한다. ‘내가 방송 경력이 몇 년인데’, ‘내가 이 일을 몇 년 했는데’ 등 과거의 경험만으로 밀어붙이지 말자. 세상은 이미 변했고 또 더 빨리 변하고 있다.
③포기의 힘
우연히 시도하고 다양한 지식을 모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 결과가 항상 아름답지는 않다는 게 비극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포기’다. 그래서 ‘작고 가볍게’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놀면 뭐하니’의 시작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릴레이 카메라’로 인지도를 조금씩 높여갈 때 출연자들과 지인들이 모여 릴레이 카메라 촬영본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조의 아파트’라는 콘셉트가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기존 다른 방송에서 보여준 구성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때 제작진의 선택은 ‘포기’였다. 그리고 재빨리 다른 콘셉트로 프로그램의 방향을 바꿔 나갔다.
프로그램 론칭을 앞두고 김태호 PD는 이렇게 말했다. “실패하더라도 시도해 보고 싶다.” 어쩌면 그는 다양한 시도와 도전은 필연적으로 많은 실패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우리 조직의 시도가 먹히지 않으면, 시장에서 반응이 없으면 빨리 ‘포기’해야 한다. 이때 던져봐야 할 질문은 하나다. ‘우리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어떤 차별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가’다. 이에 대해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빠른 포기가 답이다. 특히 요즘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더더욱 포기하는 것이 용기다. 매몰비용의 함정에 빠져 붙잡고 있느라 더 나은 선택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게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작게’ 시작하자. ‘무한도전’이라는 국민적 예능을 만들어 낸 김태호 PD도 공백기 이후 유재석 씨라는 고정 출연자 ‘한 명’만 두고 작은 시도를 여러 개 하고 있는 것처럼….
힘겨운 시기다. 버티기도 지친다. 그렇다고 쓰러져 있을 수는 없다. 정답을 찾기 위해 머리 싸매고 고민하기보다 ‘우연’을 즐겨보자. 전문가의 지혜도 좋지만 ‘이건 어떨까’라는 말도 쉽게 던질 수 있는 ‘다수의 힘’을 믿어보자. 하다가 안 되면 차별적 가치를 찾아 다시 다른 것을 해 보면 된다. 결국 핵심은 ‘즐기기’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4호(2020.09.14 ~ 2020.09.2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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