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투자자와 기관투자가, 모두 똑같은 투자 기회 가져…더 커진 ‘보안 감사’ 역할
‘페어 런치’…탈중앙화 금융을 키우는 또 하나의 성장 동력 [비트코인 A to Z]
[한경비즈니스 = 김성호 해시드 파트너] 2017년 암호화폐 공개(ICO) 붐은 과거 정보기술(IT) 버블을 연상케 하듯 엄청난 돈을 빨아들이며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라는 단어를 대중의 머리에 각인시켰다. 원래 ICO는 좋은 오픈 소스를 개발하기 위해 이더리움을 보유한 수많은 개인들에게 기부 받고 그에 대한 증서로 자신이 발행한 디지털 자산을 제공하는 간단한 스마트 콘트랙트 코드에서부터 시작됐다.


대부분 새롭게 발행된 자산의 가치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고 그저 그 소프트웨어를 후원한 만큼 미래에 그 소프트웨어를 이용할 수 있는 사용권을 받는다는 개념이었다. 거래소들은 초기 그렇게 발행된 몇몇 디지털 자산을 장밋빛 미래로 포장해 엄청난 가격 상승을 유도해 냈다. 결국 수많은 기업들이 이 성공을 좇아 ICO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시장이 급상승했던 이유는 투자 기회들이 개인 투자자들에게도 노출돼 있었고 누구나 투자해 단기간에 수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유망한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의 기회는 벤처캐피털과 같은 기관들에 우선적으로 주어진다. 업계에 큰 영향력이 있지 않은 이상 개인에게 투자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숫자‘의 중요성 알려준 ICO 열풍




하지만 ICO는 양상이 달랐다. 개인 투자자들의 빠른 움직임에 경쟁이 과열됐다. 창업자의 훌륭한 이력과 그럴듯하게 쓰여진 백서, 명망 높은 투자자들과 어드바이저들의 이름이 올라간 홈페이지만 가지고도 몇 백억원에 달하는 거금이 쉽게 모집됐다. 하지만 실제 가치보다 훨씬 부풀려진 미래에 돈이 끊임없이 모이는 버블 현상의 끝에는 엄청난 ‘폭발’이 있을 뿐이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에 엄청난 매도 물량이 풀리면서 시장은 완전히 주저앉았다. 이때 많은 투자자들은 프로젝트의 펀더멘털 가치는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결국 ‘숫자’로 측정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일반적인 스타트업에서 사용자 수나 매출 같은 지표를 이용해 펀더멘털을 측정하듯이 말이다.


최근 불고 있는 디파이(탈중앙화 금융) 붐은 다시 한 번 대중의 관심을 디지털 자산으로 끌어들였다. 이번에는 ‘숫자’가 함께 있었다. 디파이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지표 중 하나인 TVL(총예치금 : Total Value Locked)은 얼마나 많은 자산이 해당 디파이 프로젝트에 예치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TVL이 클수록 소화할 수 있는 금융 서비스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수치가 높아질수록 펀더멘털이 강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TVL이라는 지표는 블록체인에 기록된 자산의 규모이기 때문에 매우 투명하게 계산된다. 그리고 이 지표는 벤처캐피털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공개된 정보이기 때문에 기관과 개인 모두가 같은 선에서 투자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잘 설계된 디파이 프로젝트에는 기관과 개인의 자금이 급속도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2017년과 같은 붐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개인 투자자와 기관투자가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기관투자가들에게는 굉장히 낮은 밸류에이션에 투자를 받고 개인 투자자들은 공개 모집을 통해 높은 가격에 사도록 만드는 투자 모집의 구조가 굉장히 불공정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몇몇 실험적인 프로젝트들은 토큰을 서비스 론칭하기 전에 아무한테도 투자받지 않고 서비스 론칭과 함께 서비스 성장에 기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여한 수치에 따라 공평하게 나눠 주기로 결정했다. 이런 토큰 출시 방식을 ‘페어 런치(fair launch)’라고 부른다.


이 방식의 장점은 마케팅 비용을 따로 지불하지 않더라도 기관과 개인이 스스로 서비스에 들어올 동기 부여를 제공함으로써 마케팅이나 홍보 없이도 규모를 빠르게 키울 수 있고 개인 투자자와 기관투자가 사이의 차등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출시된 대표적 프로젝트인 YFI는 출시되자마자 시장에서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출시된 지 2개월 만에 전체 토큰 가치 기준 1조원 규모의 서비스로 급성장했다.


그 이후 출시된 스시스왑 역시 시장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최대의 탈중앙화 거래소인 유니스왑에 유동성을 제공하는 개인과 기관들이 스시스왑으로 유동성을 옮기면 그 규모에 비례해 자체적인 토큰을 분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니스왑에는 유동성을 제공하더라도 아무런 대가가 없었지만 스시스왑은 빨리 옮겨 놓을수록 스시스왑의 가치를 대변하는 토큰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유니스왑 전체 유동성의 80% 정도가 순식간에 스시스왑으로 옮겨 갔다. 이를 기반으로 아무런 브랜드도 없었던 스시스왑은 출시되자마자 전체 TVL 순위 기준 3위까지 올라갔다. 유니스왑과 관련 없는 많은 사람들도 이 토큰 분배에 참여하기 위해 유동성을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을 키우는데 더 도움을 줬다. 이번 사건은 명백히 프로젝트의 성장에 기여하는 사람에게 공정한 방식으로 프로젝트의 과실을 나눠 준다면 더 열정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페어 런치와 같은 실험이 적어도 유저를 끌어들이는 데 굉장히 효율적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확실하다. ‘토큰 분배→새로운 유동성 유입→TVL 증가→펀더멘털 상승→토큰 가격 상승→토큰 보상 규모 증가→더 많은 유동성 유입’ 사이클을 거치면서 토큰의 가격이 폭락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유동성 공급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 토큰 가격이 상승하지 않고 하락하기 시작한다면 반대로 유동성 공급자들이 급속도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장기적으로 충분한 규모로 상승해 규모의 경제를 통해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면 토큰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저가에 매수하는 외부 투자자가 나타나며 토큰 가격을 지지해 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분명한 부작용도 존재한다. 기관 투자를 받지 않은 프로젝트의 문제점은 이 프로젝트가 충분히 믿을 만한 창업자인지 검증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분명 기관 투자를 받은 프로젝트는 기관과 창업자 개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사회적 부채가 있고 기관과 창업자 사이에 강한 계약 관계가 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기가 쉽지 않다.
‘페어 런치’…탈중앙화 금융을 키우는 또 하나의 성장 동력 [비트코인 A to Z]




◆기관 투자의 장점도 계속 이어 가야




반대로 페어 런치로 시작한 프로젝트들은 굳이 기관에 투자를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자신의 신상 명세를 공개해야 되는 의무도 없다. 익명의 창업자로 시작하지만 프로젝트에 유동성이 모이기 시작하고 토큰 가격이 오르기 시작한다면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모을 수 있다. 그 자금이 묶여 있는 스마트 콘트랙트를 제어할 수 있는 키는 그 익명의 창업자에게 있기 때문에 창업자에게 모든 자금을 빼고 사라져 버릴 유인이 생긴다. 이때 서비스 존속 여부는 창업자의 선의에 기대는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투자자는 이러한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초기 자금 없이 시작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드는 전문 업체를 통한 보안 감사를 받지 않고 출시하는 점도 매우 우려스럽다. 창업자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안 구멍이 있다면 코드가 누구에게나 공개돼 있는 스마트 콘트랙트의 특성상 쉽게 해커의 표적이 되고 자금이 탈취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어 런치를 하려는 유능한 창업자를 지원하고자 하는 ‘페어 런치 캐피털’이라는 새로운 지지자 그룹이 생겨났다. 초기 보안 감사 비용을 대고 초반 유동성 공급 등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그 대가로 토큰을 많이 받아 가는 형식으로 이해관계를 일치시킨다.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소수의 천재 개발자들은 이런 그룹에 충분히 지원 받으면서 좀 더 안전한 페어 런치를 준비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전통적인 투자회사’ 또한 이제는 창업자들에게 단순히 자금을 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경쟁력 있게 창업자와 프로젝트 성장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외면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미 기관보다 개인 투자자 그룹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페어 런치가 투자회사들이 어떻게 더 프로젝트에 경쟁력 있게 기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5호(2020.09.19 ~ 2020.09.2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