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 관리 ABC] [한경비즈니스 칼럼=장동한 건국대 국제무역학과 교수·한국보험학회 회장] 어느 날 갑자기 다국적 기업 A사에 영어로 된 내용 증명이 외국 로펌으로부터 날아든다. 누구누구로부터 귀사 제품에 대한 시비가 걸렸으니 몇 년 몇 월 며칠까지 답을 하라는 내용이다. 이를 무시하고 그냥 넘어가면 당사의 책임을 인정하는 셈이 될 수 있으므로 원칙적으로 답을 하는 게 좋다. 통상 비즈니스의 배상 책임 시비는 이렇게 시작된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의 민사 소송 과정을 검토해 보자. 원고 측의 피해 주장, 법원의 소환장 발급, 피고 측의 답변, 사실 조사, 소송 시작, 배심원단 구성, 법정 공방, 배심원단의 평결, 판사의 판결, 항소·상고…. 답답하고 별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가운데 변호사 비용 등 소송비용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실제 케이스를 바탕으로 한 영화 ‘시빌 액션’은 미국 민사소송 체계의 불합리함과 비효율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환경 오염 기업과 피해 주민 간의 소송 싸움은 10년 가까이 이어지다가 결국 쌍방 간에 전혀 신통치 않은 합의로 끝나고 담당 변호사는 파산한다. 기업 규제 도입과 확대는 신중해야
미국의 민사 소송은 무시무시한 개념의 배상 책임이 있다. 소위 징벌적 배상(punitive damages)이다. 한국에서 흔히 얘기하는 손해 배상(compensatory damages)은 사고에 따른 수입 손실이나 치료비 등 객관적인 기준이 명확한 피해에다 위자료 등이 더 붙는 개념이다.
반면 징벌적 배상은 민사적이라기보다 형사적인 성격의 페널티 개념이다. 피해 내용이 굉장히 악질이고 가해자가 피해 유발의 의도성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에선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가해자를 금전적으로 벌함으로써 향후에 유사한 일이 반복되지 않게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미국에선 손해 배상액의 20~60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징벌적 배상을 배심원단이 평결한 예가 많다. 1990년대 미국의 자동차 3사 모두 차체 결함 등의 이유로 탑승자 사망 사고가 발생해 유죄 평결을 받은 바 있는데 징벌적 배상 액수가 가히 천문학적이다. 배심원단은 1993년 제너럴모터스(GM)에 1억500만 달러(손해 배상 4백만 달러+징벌적 배상 1억100만 달러), 1997년 크라이슬러에 2억6200만 달러(손해 배상 1200만 달러+징벌적 배상 2억5000만 달러), 1999년 포드에 2억9500만 달러(손해 배상 500만 달러+징벌적 배상 2억9000만 달러)의 배상을 평결했다. 평결 액수가 비현실적일 정도로 엄청난데 이게 미국 민사 소송 세계의 현실이다.
지난 40년 과도한 징벌적 배상을 포함해 집단 소송, 변호사의 성공불 보수, 석면 소송 급증 등으로 미국 사회가 소송 천국이 되자 민사 소송 체계의 개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소위 불법행위법 개혁(tort reform)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불법행위법 개혁 자체에 대해선 찬반양론이 엇갈리지만 배심원의 배상 평결에 대해선 과도하다는 게 중론이다. 미국 비즈니스엔 배상 책임 리스크 관리가 실로 엄중한데 무엇보다 소송 남발과 과도한 배상 책임으로 인해 비즈니스가 본연의 사업에 충실할 수 없게 된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최근 한국 정부는 기업 규제인 집단 소송제와 징벌적 손해 배상제를 확대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50년의 고속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이 선진국에 비해 소비자 보호에 소홀했고 소송 체계의 미흡으로 많은 피해자들이 법적인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경험을 반추해 보면서 우리는 배울 바가 분명 있다. 과도한 배상과 소송 남발로 반기업 정서가 심화되고 비즈니스의 경쟁력이 떨어져 결국 사회의 부담이 됐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굳이 남들이 겪은 어려움을 답습할 이유는 뭘까. 기업 규제의 도입과 확대 과정에서 제발 신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9호(2020.10.17 ~ 2020.10.2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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