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돋보기]
WTO 총장 인선 과정으로 본 외교 전략의 한계 [강문성의 경제 돋보기]
[한경비즈니스 칼럼=강문성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세계무역기구(WTO)의 새로운 사무총장을 인선하는 과정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2013년 9월 사무총장에 임명되고 2017년부터 두 번째 임기를 수행하던 브라질 출신의 아제베도 사무총장이 1년의 재임 기간을 남기고 돌연 사퇴했다.


이후 새로운 WTO 사무총장을 인선하는 과정이 지난 8월부터 시작됐다. WTO 사무총장을 그만두고 식음료 회사인 펩시의 최고 기업업무책임자(Chief Corporate Affairs Officer)로 간다는 것이 WTO의 추락한 위상을 알려주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국의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나이지리아 재무장관 출신의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후보와 최종 2인에 들었지만 과반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정확한 지지의 정도를 알 수 없지만 외신을 종합해 보면 164개 WTO 회원국 중 90~100여 국이 나이지리아 후보를 지지하고 있고 유 본부장은 60여 개국의 지지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유 본부장 지지를 선언하고 나이지리아 후보에 대해 거부 의사를 표명하면서 사무총장 인선 과정이 꼬이기 시작하고 있다. 11월 9일 열리는 일반 이사회에서 어떤 결론이 도출될지 미지수이지만 몇 가지 시사점을 도출해 볼 수 있다.


먼저 이번 사태로 또다시 표출된 문제가 WTO의 비효율적인 의사 결정 구조다. WTO 규정에 따르면 회원국 중 만장 일치(WTO 기본 원칙의 변경), 4분의 3(다자무역협정의 해석), 3분의 2(특정 조항의 수정) 등이 동의해야 하는 이슈를 제외한 나머지 이슈에 대해서는 합의를 통해 결정한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등 5개국의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가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기금의 지분만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국제기구보다 WTO는 훨씬 민주적이다.


하지만 164개국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해 합의를 도출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만큼 비효율적이란 뜻이다.


이번 사무총장 인선 과정에서도 합의가 도출되지 않아 투표를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향후 진행될 WTO 개혁 작업이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WTO 역시 투표를 강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경험(합의 도출 실패 이후 1999~2005년 무어-수파차이 사무총장 시대)을 활용한다면 4년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두 후보가 3년씩 사무총장을 수행하는 대안 역시 고려할 수 있다.


또 다른 시사점은 미국의 불확실한 의도다. 미국의 숨은 의도를 찾기 위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미국이 원하는 WTO의 미래가 무엇인지, 이번 인선 과정에서 미국이 얻고자 하는 실익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 이후 다자 체제에서의 미국 리더십이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미국이 보여준 다자 체제에서의 사전 조율 역할과 통솔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고 그 방향 역시 정해지지 않은 느낌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불확실성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세계 무역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한국으로서는 다시 한 번 유럽의 역량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세계 무대에서 유럽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지 못한다면 세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의 4강 외교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한국의 외교 전략을 전 세계 관점에서 다시 고민해 봐야 할 때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2호(2020.11.09 ~ 2020.11.1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