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루이 뷔통


목수 집에서 태어나 14세에 파리로…가죽 공방 취직
여행 때 드레스와 모자를 포장하는 ‘패커’로 이름 날려

사각으로 발상 전환… 루이 비통, 최고 명품 길 열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사각으로 발상 전환… 루이 비통, 최고 명품 길 열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사각으로 발상 전환… 루이 비통, 최고 명품 길 열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한경비즈니스 칼럼=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루이 비통(1821~1892년)은 열네 살 때인 1835년 집을 떠나기 위해 보따리를 쌌다. 열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소지품 몇 가지만 들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 모험에 나섰다. 믿을 것은 목공 기술뿐이었다. 그의 가족은 대대로 프랑스와 스위스에 걸쳐 있는 척박한 땅 쥐라산맥의 작은 마을에서 목수를 가업으로 이어 왔다.


그가 향한 곳은 꿈의 도시 파리. 파리로 가는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손에 든 돈이 그리 많지 않아 걸어서 갔다. 파리에 도착하기까지 2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기간은 그에게 소중한 인생 수업의 기회였다. 여러 도시와 마을을 거치면서 자신의 목공 기술을 연마하고 변화하는 세상의 일면을 관찰하는 배움의 길이었다.
사각으로 발상 전환… 루이 비통, 최고 명품 길 열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루이 비통은 1837년 화려한 부유층과 빈민층이 공존하는 도시 파리에 도착했다. 당시 파리의 귀부인들은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깃털과 리본 장식이 화려한 모자를 쓰는 게 유행이었다. 여행할 때는 이 모자들과 드레스를 구겨지지 않고 잘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포장하는 기술을 가진 ‘패커(packer)’와 나무 상자들이 필요했다. 루이 비통은 당시 이 분야에서 유명한 무슈 마레샬의 가죽 공방에 취직해 패커로서의 경력을 쌓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루이 비통은 33세가 되던 1854년 독립해 파리 방돔 광장 근처 뇌브데카푸신 4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메종(점포)을 냈다. 나폴레옹 3세의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의 전속 패커로 활약하며 파리의 저명인사들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루이 비통은 인체공학적인 디자인 연구뿐만 아니라 내구성이 강하고 가벼운 여행 가방을 제작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젊은 루이 비통은 파리에서 일어난 정치와 사회 경제의 변화상을 최일선에서 목격하고 이에 맞춰 자신의 미래 계획을 세웠다. 당시 프랑스는 자본주의의 급격한 성장 과정에 있었다. 그에 따라 휴양과 여행 문화도 번성했다. 이는 루이 비통에게 큰 부를 안기는 계기가 됐다. 1850년대는 화려한 드레스인 크리놀린과 폭이 넓은 치마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이 때문에 여행 때 이런 의상들을 구겨지지 않고 안전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독창적인 상자와 노련한 기술이 요구됐으나 당시 여행용 트렁크들은 포플러 나무 상자의 둥근 형태여서 여러 개를 쌓기 어려웠다. 마차에 싣고 코너를 돌 때 가방들이 넘어지기 일쑤였다. 루이 비통은 차곡차곡 쌓을 수 있는 네모난 가방을 고안했다. 뚜껑이 평평한 트렁크가 기존의 원형 디자인보다 훨씬 실용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발상을 전환한 것이다. 그가 만든 평평하고 네모난 형태의 트렁크는 현대적인 여행 가방의 시초가 됐다. 둥근 가방에서 사각 가방으로 발상을 전환한 것은 오늘날까지 루이 비통을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지탱해 준 힘이 됐다.
사각으로 발상 전환… 루이 비통, 최고 명품 길 열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아니에르 공방, 헤밍웨이 책 보관 트렁크 제작

유성 페인트로 칠한 캔버스를 가볍고 방수 효과가 지속되는 트렁크 겉면의 소재로 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 가방을 만든 것도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 루이 비통은 1859년 자신의 하우스를 설립한 지 5년이 되던 해 보다 큰 규모의 새로운 거점이 필요하다고 판단, 파리 교외 북서부 지역 아니에르에 공방을 열기로 결심했다.


이는 루이 비통이 살아생전 내린 현명하고 과감한 행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니에르는 센 강변의 강둑에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막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루이 비통 트렁크 제작에 필요한 포플러 나무 원목 등 원자재를 수월하게 나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루이 비통의 첫 매장 부근의 파리 생라자르역까지 잇는 철도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공방은 당시 미래 지향적인 에펠탑 스타일로 만들어져 채광이 잘 들어오고 환기도 잘 됐다. 파리의 어두컴컴한 다른 공방과 비교해 훨씬 세련되고 현대적이었다.


아니에르 공방은 트렁크, 여행 가방, 전 세계 각지로 보내는 특별 주문 제작 제품을 만드는 루이 비통 장인 정신의 심장부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이후 160년 넘는 동안 고객의 특정 희망 사항과 요구에 맞춘 수많은 특별한 가방들을 제작해 왔다. 프랑스의 탐험가이자 정치·외교가인 피에르 사보르냥 드 브라자가 아프리카 탐험을 위해 의뢰한 것으로 잘 알려진 침대 트렁크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패션 디자이너 잔 랑방과 폴 푸아레 등이 20세기 초 디자인한 명사들의 화려한 슈트와 세면도구를 보관하는데 사용된 많은 케이스도 아니에르 공방을 거쳤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프랑수아 사강 같은 대문호와 작가들 역시 자신들의 책과 필기도구를 보관할 맞춤 제작 트렁크를 만들기 위해 루이 비통을 찾았다. 현재 아니에르 공방에서는 옷장 트렁크, 칵테일 트렁크, 시계와 향수 트렁크에서 부터 다양한 게임 박스, 주얼리 케이스 등 섬세한 제품에 이르기까지 특별 주문 트렁크가 제작되고 있다.
사각으로 발상 전환… 루이 비통, 최고 명품 길 열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루이 비통은 1859년 아니에르 공방 완공 뒤 맨 위층을 자신의 가족이 거주하는 집으로 사용했다. 그의 아이들은 정원에서 놀다가 공방에서 가업을 잇기 위한 기술을 배웠다. 이들은 이런 과정을 거친 뒤 비즈니스에 입문했다. 루이 비통의 아들 조르주 루이 비통이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한 아르누보 스타일의 대가들과 함께 고안해 19세기 말 리노베이션한 저택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사각으로 발상 전환… 루이 비통, 최고 명품 길 열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2호(2020.11.09 ~ 2020.11.1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