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디파이 기업 ‘빗고’ 인수설 솔솔…꾸준히 이어지는 ‘비트코인의 토큰화’ [한경비즈니스 칼럼=한중섭 한화자산운용 디지털 자산팀 과장, ‘비트코인 제국주의’, ‘넥스트 파이낸스’ 저자] 페이팔이 지난 10월 비트코인, 이더리움, 비트코인 캐시, 라이트 코인 가상 자산을 취급한다는 뉴스가 나오자 가상 자산 시장이 모처럼 가격 상승세를 탔다.
페이팔은 2021년 간편 결제, 송금 애플리케이션(앱) 벤모에도 가상 자산 매매 기능을 제공하고 서비스 지역을 글로벌로 확장한다고 발표했다. 페이팔은 경쟁사인 스퀘어의 행보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스퀘어는 2018년부터 비트코인 매매·수탁 기능을 지원했다. 심지어 2020년에는 회사 자기 자본으로 약 550억원에 달하는 비트코인을 매수했다.
페이팔이 가상 자산을 지원한다는 소식 이후 블룸버그는 페이팔이 가상 자산 수탁 업체 빗고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를 냈다.
필자는 이 뉴스를 보고 페이팔이 디파이(Defi : 탈중앙화 금융)를 활용해 비트코인을 매수한 고객들에게 이자를 지급하는 시나리오를 상상해 봤다. 페이팔이 이를 염두에 두고 빗고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다양한 퍼즐 조각들을 맞춰 보면 이는 언젠가 실현될 가능성이 높은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이더리움 활용하는 빗고의 매력
2013년 설립된 빗고는 골드만삭스로부터 투자 받은 글로벌 가상 자산 수탁 업체다. 한국의 주요 가상 자산 거래소도 빗고의 보안 솔루션을 사용했을 정도로 빗고의 기술력은 뛰어나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빗고가 단순히 고객의 가상 자산을 보관해 주는 회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빗고는 올해 디지털 자산·블록체인업계에서 화제가 된 디파이 생태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회사 중 하나다. 바로 빗고의 히트 상품인 WBTC(Wrapped BTC) 덕분이다.
WBTC는 이더리움 네트워크에 기반한 ERC-20토큰으로, 오리지널 비트코인인 BTC와 가치가 동일하다. 빗고가 BTC를 보관하고 WBTC를 발행하면 파트너십을 맺은 상인이 시장에 유통하는 방식이다. 사용자가 WBTC를 BTC로 바꾸기를 원하면 상인은 빗고에 의뢰하고 BTC를 반환하는 대신 WBTC를 소각한다.
멀쩡한 BTC를 왜 굳이 WBTC로 바꿀까. 그 이유는 스마트 콘트랙트 기능이 탑재된 WBTC를 통해 이더리움 기반의 디파이 생태계에 참여해 추가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BTC 자체는 이자나 배당과 같은 현금 흐름이 없는 상품성 자산이다. 하지만 BTC를 WBTC로 전환하면 사용자는 디파이 프로토콜에 WBTC를 예치하거나 유동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추가 수익을 낼 수 있다. 비유하자면 금을 단순히 금고에 보관하는 것(BTC를 보유)이 아니라 금고지기가 금과 가치가 동일한 증표를 발행(빗고를 통해 BTC를 WBTC로 전환)해 사용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금융 활동(디파이 생태계 참여)을 하면서 부가적인 수익(디파이 이자 농사)을 올릴 수 있게끔 하는 것과 유사한 개념이다. 실제로 WBTC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 업체 듄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2020년 10월 30일 기준, WBTC 공급량은 11만7585개로 이는 6개월 전에 비해 3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상상해 보자. 페이팔 사용자는 간편하게 비트코인을 매수한다. 사용자가 약관에 동의하면 매수한 비트코인을 단순히 보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디파이를 통해 추가적인 이자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사용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백엔드에서 페이팔과 빗고 간 BTC와 WBTC를 변환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빗고는 WBTC를 활용해 디파이 프로토콜에서 이자 농사를 한다. 그중 100의 수익을 거뒀을 때 50은 사용자에게 제공하고 50은 페이팔과 빗고가 나눠 갖는다면 고객과 기업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페이팔이 빗고를 원만하게 인수할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페이팔이 결제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의 DNA가 있고 가상 자산 활용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아예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라고 본다.
디파이 생태계에 스며드는 비트코인
디파이 생태계에 활용되는 비트코인이 WBTC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비트코인 토큰화를 통해 비트코인을 이더리움 디파이 생태계에 접목하려는 실험을 하고 있다. 비트코인의 토큰화는 특정한 메커니즘에 따라 비트코인을 동결하고 별도의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비트코인과 가치가 동일한 토큰을 생성하는 것을 뜻한다. 비트코인 보유자는 비트코인을 스마트 콘트랙트 기능을 탑재한 토큰의 형태로 변환한 뒤 디파이 생태계에 참여해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비트코인과 토큰화된 비트코인의 가치는 동일하게 유지되고 사용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토큰화된 비트코인을 본래의 비트코인으로 변환할 수 있다.
비트코인 토큰화의 종류는 수탁 형태에 따라 중앙화 방식과 탈중앙화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중앙화 방식의 대표적인 예는 앞서 언급한 WBTC다. WBTC는 중앙화된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어 빗고를 비롯한 상인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상당한 시스템 리스크에 직면할 수 있다. 반면 비트코인의 토큰화를 탈중앙화된 비수탁형 방식으로 구현하려는 프로젝트들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렌BTC(renBTC)다. 렌BTC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기계들로 구성된 다크노드에 의해 작동하는 REN 버추얼 머신(VM)에서 작동하는데 비트코인의 가치와 동일한 수준을 유지한다.
다크노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10만 개의 렌(Ren) 토큰이 필요하다. WBTC에서는 빗고와 같은 중앙화 기관이 수탁자 역할을 하는 반면 REN VM에서 renBTC의 수탁자 역할을 하는 것은 탈중앙화된 형태의 다크노드다. 이더리움에 기반한 REN VM은 비트코인뿐만 아니라 비트코인 캐시, 지캐시, REN VM의 유틸리티 토큰인 Ren을 지원한다.
tBTC도 renBTC와 마찬가지로 킵(KEEP)이라는 네트워크에서 탈중앙화된 방식으로 운영된다. KEEP 네트워크에서는 누구나 tBTC의 발행자와 수탁자가 될 수 있는 대신 발행할 tBTC의 150%에 해당하는 가치의 이더리움을 담보로 맡기고 수탁자 역할을 한다. 부정한 행위를 할 경우 KEEP 네트워크 참여자는 담보로 맡겨 놓은 이더리움을 잃게 된다. 이 밖에 sBTC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비트코인을 토큰화해 이더리움 디파이 생태계에 접목하려는 실험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10월 30일을 기준으로 토큰화된 비트코인의 총공급량은 15만612개다. 전체 비트코인 공급량이 1852만9468개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비트코인 중 토큰화된 비트코인의 비율은 0.8% 수준에 불과하다. 비트코인을 보유한 채 추가 수익을 얻으려는 투자자들의 수요가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트코인의 토큰화는 성장성이 여전히 높은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신원 확인, 과세와 같은 적절한 규제가 마련되고 페이팔 같은 빅 플레이어가 관련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비트코인을 통해 이자 수입을 올리는 일은 디지털 자산·블록체인업계의 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다.
호모사피엔스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것을 믿는 능력’이 있는 종이다. 호모사피엔스의 독특한 인지 능력 덕분에 우리는 별 볼일 없는 종에서 단숨에 지구의 지배자가 됐다. 인류가 구축한 금융 시스템과 화폐 경제의 발전 역시 인지 능력 덕분이다. 금이라고 불리는 노란색 돌덩어리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과 가치가 연동된 증표를 발행하고 유통한 것이 근대 은행업의 출발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수백 년 전 금융의 패러다임을 바꾼 유럽의 금 세공업자들이 오늘날 비트코인과 디파이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본 기고는 회사의 공식 의견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3호(2020.11.16 ~ 2020.11.2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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