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돋보기
RCEP 서명의 의미와 불확실한 통상의 미래 [강문성의 경제 돋보기]
[한경비즈니스 칼럼=강문성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지난 11월 15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서명됐다. 2011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됐던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RCEP 구상이 2012년 협상 개시 선언으로 이어졌고 2013년 5월 공식 협상 개시와 함께 긴 여정이 시작됐다. 아세안 10개국과 한국·중국·일본 등 3국에 호주·뉴질랜드·인도 등 총 16개국이 시작한 RCEP 협상에서 시장 개방의 부담을 두려워한 인도가 지난해 참여 포기를 선언하면서 이번 서명에는 15개국의 정상이 참여했다.


RCEP는 무역 규모, 국내총생산(GDP), 인구 등의 측면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FTA)이다. 2010년대 들어 논의되기 시작해 발효된 다수의 메가 FTA 중 미국·캐나다·멕시코협정(USMCA),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비교해도 그 규모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 개방 측면에서 RCEP는 아세안 회원국의 양허 수준을 한·아세안 FTA 수준에 자동차·철강·기계부품·의료위생용품 등을 중심으로 관세 철폐 품목을 추가해 91.9~94.5%로 상향 조정했다.


이에 반해 중국·호주·뉴질랜드와는 기존의 양자 간 FTA 양허 수준에서 개방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RCEP 회원국 중 유일하게 한국과 양자 간 FTA를 체결하지 않은 일본은 한·일 양국이 83%의 양허 수준에 합의했다. 이 수준은 한국이 체결한 FTA 중 양허 수준이 가장 낮은 한·인도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의 85%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어서 과연 한·일 양국 간 경제 통합의 효과가 기대 수준에 미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제 통상 규범 측면에서 RCEP를 USMCA·CPTPP 등 다른 메가 FTA와 비교하면 통상 규범의 범위와 경제 통합 수준은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RCEP 협정문은 상품 무역, 서비스 무역, 투자, 지식재산권, 전자 상거래 등의 분야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비해 CPTPP는 RCEP의 범위를 넘어 국영기업·노동·환경·반부패 등을 포함한다. 또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초당적인 지지를 받았던 USMCA는 CPTPP를 넘어 디지털 무역, 환율 조작 금지, 비시장 경제와의 FTA 추진 금지 등 규범의 범위를 확대했다.


특히 디지털 무역은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에 따라 무역 행위가 디지털화되고 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경제 행위가 확산되면서 디지털 무역이 향후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돼 관련 규범이 USMCA에 반영됐다. 따라서 RCEP는 통상 규범의 적용 범위 확대를 통한 경제 통합보다 기존의 시장 개방을 미세 조정하는 수준에서 합의됐다고 평가된다.


더 중요한 문제는 국제 정치 측면이다. RCEP 서명에 대한 미국 조 바이든 당선인의 즉각적인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중국 주도의 거대한 경제 블록이 동아시아 지역에 건설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고 동맹국과의 협력을 통해 통상 규범을 만들어 가겠다고 선언했다. 미·중 무역 분쟁과 기술 패권 경쟁이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바이든 당선인은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있다. RCEP가 발효된다면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중국보다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국과의 협력을 통한 지역 주의적 대응 수단으로 CPTPP를 고려할 수 있다. 다만 당장 가입하는 것보다 디지털 무역, 노동, 환경 등 USMCA에서 규정된 수준으로 재협상한 후 가입할 가능성이 높다. 또 이 과정에서 추가적인 회원국 확보를 추진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CPTPP 가입을 추진해 보다 균형적인 통상 정책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 또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 이후에도 미·중 갈등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대응과 정책 방향은 다양한 시나리오를 분석한 후 설정해야 한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7호(2020.12.14 ~ 2020.12.2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