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산업의 근간인 ‘티켓 수익’ 흔들...OTT행은 하청 기지화로 지속 가능성 위협
[커버 스토리]지금의 한국 영화 산업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한국 영화 산업의 특수성을 파악해야만 한다. 한국 영화는 외국에 비해 부가 시장이 작아 극장의 관객 수가 곧 한국 영화 산업의 기반이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극장의 매출이 한국 영화 산업 전체 매출의 약 80%를 차지한다. 이렇듯 극장 매출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구조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관객이 급감하자 한국 영화 산업 전체의 붕괴가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영화 산업, 극장 매출이 80%
현재 한국 영화 산업은 관객이 극장에 티켓 값을 지불하면 영화발전기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극장·배급사·투자사·제작사 등이 나눠 갖는 구조다. 이 때문에 관객의 감소는 영화관의 매출 급감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영화 투자·제작·배급 등 영화 산업 전 분야의 위기로 전이된다. 특히 극장의 캐시플로가 막히면 상영→투자→제작→배급으로 이어지는 영화 산업 생태계의 순환이 멈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만약 지금의 상황이 이어진다면 중소 영세 사업자가 대부분인 한국 영화 산업의 ‘도미노 붕괴’가 이뤄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티켓 수익은 관객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선사하는 원동력이 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같은 대작의 탄생에는 투자금이 필수다.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거나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는 것에도 티켓 수익이 필요하다. 또 티켓 수익은 차기작 지속 기획의 원천이 된다. 즉 한국 영화계에서 창작자가 흥행을 위한 모험과 과감한 시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극장이라는 안정적인 플랫폼이 뒷받침돼야 한다.
지난해부터 극장 개봉 대신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택한 영화들이 많아지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선 글로벌 OTT의 등장을 반기는 분위기도 있다. 하지만 OTT 사업자들은 대부분이 투자 대신 저작권을 가져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글로벌 OTT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결국 콘텐츠를 제공하는 ‘하청 기지화’ 현상이 가속화돼 한국의 콘텐츠 생태계 종속 현상이 심화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4조원대 경제 손실…“기간산업에 준하는 지원 필요”
영화업계 관계자는 “극장 관람료 분배를 근간으로 이뤄진 영화 생태계가 준비없이 무너지게 되면 영화 산업의 지속적인 성장과 K컬처 확산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지금이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으로 기간산업에 준하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점은 영화 산업 내부 붕괴가 외부로 확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극장은 상업 지역부터 관광 산업까지 주변 산업에도 이른바 ‘낙수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시설로, 자칫하면 관객 수의 급감이 골목 상권과 번화가·관광지까지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다.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이 경제를 일으키는 예시로 자주 소개되는 것이 ‘반지의 제왕’이다. 전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반지의 제왕’ 덕분에 촬영지인 뉴질랜드는 인기 관광지로 떠올랐다. 인구 400만 명에 불과했던 뉴질랜드는 영화 개봉 이후 관광객 수가 연평균 5.6%씩 증가했다. ‘반지의 제왕’으로 얻은 직접적 고용 효과만 총 3억600만 달러(약 4000억원)에 달한다. 또 관광 산업의 파급 효과는 38억 달러(약 4조20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는 ‘반지의 제왕’ 주인공의 이름을 딴 ‘프로도 경제 효과’로 정의됐다.
한국은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직후 짜파구리가 큰 인기를 끌며 라면 매출이 급증했다. 또 ‘기생충’의 주요 촬영지인 마포구 슈퍼, 종로구 자하문 터널 계단, 동작구 피자 가게 등 소위 ‘기생충 탐방 코스’가 서울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여기에 한국의 극장들은 각종 대형 쇼핑몰과 상가에 입점돼 인근 지역 상권에 유동 인구를 끌어다 주는 ‘샤워 효과’를 통해 지역 경제를 뒷받침해 왔다. 극장업계의 조사에 따르면 영화관을 방문한 관객 1명이 극장 방문 시 평균 5만6000원을 지출하는데 그중 4만원을 인근 카페나 식당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를 바탕으로 2019년 영화 관람객 2억 명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4조2000억원 규모의 경제 손실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조사한 ‘영화 산업의 경쟁력과 경제적 파급 효과 연구’에 따르면 2015년 한국 영화 산업(전체 매출 2조1000억원)의 생산 유발액과 부가 가치 유발액은 각각 9조7000억원, 3조8000억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또 고용·취업 유발 효과는 8만 명 이상으로 분석된다.
영화 산업이 전반적인 문화 산업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방송·뮤지컬·게임·음악 등 콘텐츠 산업 전반과 밀접하게 연계돼 이른바 ‘케이 컬처’를 확산한다. 무엇보다 자국 영화 자체가 지닌 대중적 영향력과 정서적 연계는 대체 불가능한 산업으로 꼽힌다. 마치 미국의 영화 산업을 이르는 ‘할리우드’가 미국의 문화·정치·경제 등을 전 세계에 확산하는 역할을 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업계 관계자는 “문화·예술적인 관점에서 영화 산업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독특하고 파급 효과 등을 감안하면 동일한 생산 규모의 다른 산업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스 인터뷰① : 권지원 리틀빅픽쳐스 대표
지난해부터 지속된 관객 수 급감으로 대형 극장뿐만 아니라 영화 배급 및 마케팅사들은 전례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불황의 최전선에 선 영화 배급 및 마케팅사 대표들에게 현재 상황과 고충을 들어 봤다.
“코로나19 이후, 더 이상 중소 영화 자리 없을 수도 있다”
-현재 영화 배급 시장의 상황은 어떠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1년 동안 최악의 상황이 지속됐다. 신규 영화가 개봉되면서 관객이 유입되고 자금이 회수돼 다시 제작 진영으로 재투자돼야 하는데 각 배급사들이 영화별 손익을 이유로 개봉을 연기하거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들에 권리를 넘기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중소 배급사들을 향한 지원책이 있었나.
“개봉 영화 할인권 정책, 영화진흥위원회를 통한 일부 영화의 개봉비용 지원이 있어 산업 전체엔 약간의 도움은 됐다. 하지만 중소 배급사에 직접적인 지원책은 없어 현재 절대적인 관객이 줄어든 상황에서 영화를 개봉해도 계속 손해를 보는 구조다. 그나마 극장사들이 올 2월부터 배급사에 관객당 부율 정산되는 비용에 추가적으로 지원하는 개봉 촉진 프로그램을 내놓아 약간 숨통이 트이고 있다.”
-영화관 개봉 대신 OTT 직행이 대안이 될 수 있나.
“OTT에 권리를 넘기면 제작비를 회수해 당장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OTT 회사들이 모든 영화를 구매하는 것은 아니고 대작과 화제작 위주로 선별하기 때문에 배급사의 연간 라인업 중 0~1편 정도만 해당되는 대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한 번 판매되면 추가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큰 흥행을 기대하는 영화는 OTT 직행에 부정적일 수도 있다.”
-중소 배급사 위축이 영화 산업에 미칠 영향은 얼마나 되나.
“극장의 좌석 간 거리 두기와 오후 9시 영업 제한으로 상영 횟수가 축소됨에 따라 중소 영화들의 관람 기회를 더 박탈당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국 중소 영화의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대기 중인 한국·외국 블록버스터들이 줄줄이 개봉되더라도 중소 영화의 상영 기회는 없거나 초단기에 그칠 것이다. 코로나19 피해에 대한 구제 없이 최소한의 상영 기회도 보장받지 못한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기에는 한국 중소 영화의 제작과 배급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
박스 인터뷰② 강효미 퍼스트룩 공동 대표 겸 영화마케팅사협회(KFMA) 회장
“영화 마케팅사 매출 ‘제로 상태’, 전문 인력 이탈도 우려”
-현재 영화 마케팅사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지난해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나아졌다 악화되기를 반복하며 개봉 시점을 정하고 마케팅 홍보를 진행하다가 중단되는 영화들이 많았다면 이제는 개봉 시점에 대한 논의조차 없다. 영화가 개봉돼야 약속한 인건비의 50%를 받을 수 있는 마케팅 회사들의 매출은 제로에 가깝다. 임대료와 직원들의 급여 모두 빚으로 버텨야 하는 마이너스 상태가 된 지 오래다. 지난해 나아질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어렵게 버텨 왔지만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한다.”
-중소 마케팅사들을 향한 지원책은 있었나.
“지난해 상반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극장 활성화 홍보 아이디어 공모의 형식을 빌려 마케팅사, 온라인 마케팅사, 예고편, 포스터 회사 등 80여 개 마케팅 회사들을 대상으로 약 6억원 정도의 예산을 지원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영화 마케팅 전문 인력의 이탈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에서 전문 인력 고용 유지를 위해 위와 같은 지원책이 어렵게 마련됐지만 1회에 그쳤고 이후 상황은 더 악화됐다. 규모 있는 마케팅 회사는 상시 노동자 수만 10명이 넘는다. 직원들의 1개월 치 급여에도 못 미치는 일회성 지원으로 전문 인력의 이탈을 막는다는 것은 난망하다. 영화 마케팅업계는 영화진흥위윈회의 지원도 부재한 동시에 정부 지원 역시 사각지대에 있다. 큰 타격을 입었지만 직접 영업 제한에 해당하는 업종이 아니기 때문에 자영업자나 소상공인 지원에서도 배제된다.”
-영화관 개봉 대신 OTT나 IPTV 직행이 대안이 될 수 있나.
“일부 영화들이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행을 결정하며 제작비를 안정적으로 회수하고 추가 수익을 거뒀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영화 마케팅사는 극장 개봉을 위한 마케팅 활동이 불필요해졌기 때문에 의사와 상관없이 계약을 중도 해지하게 된다. 이미 진행된 업무량에 따라 다르지만 계약된 금액의 일부는 포기해야 한다. 보통 개봉 1년 전에 계약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위해 비워 둔 라인업을 다시 채울 수는 없다. 마케팅 회사는 결과적으로 매출이 사라지는 것이다. ”
-극장 개봉이 위축된다면 결국 영화 산업 내 다른 업종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극장 개봉을 위한 업무를 담당하는 마케팅사, 온라인 마케팅사, 예고편 업체, 포스터 디자인 회사, 이벤트 회사 등 마케팅 관련 업체만 80개가 넘는다. 지난해 코로나19가 시작된 직후 영화마케팅사협회(KFMA)에서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이 회사들에 소속된 정규직 직원만 약 400명에 달한다. 극장 산업이 현재처럼 멈춰 버린 채 회복되지 않는다면 이 인력들은 일자리를 잃고 회사들은 도산할 것이다. 마케팅 분야를 포함해 재능 있는 전문 인력이 타업계로 이탈한다면 한국 영화 산업 전체의 경쟁력 약화는 피할 수 없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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