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이던 1886년 선물한 것이다. 정식 이름은 ‘세계를 밝히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지만 통상 ‘자유의 여신상’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5월 16일 리버티섬에는 새로운 관광 명소가 하나 더 생겼다. 바로 새로운 ‘자유의 여신상 박물관(the Statue of Liberty Museum)’이다.
◆드론 영상으로 관람객 사로잡는 박물관
지난해 자유의 여신상을 찾아온 관광객은 420만 명에 달했다. 동상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보안 검색을 거친 후 맨해튼의 배터리 파크에서 페리에 탑승한다.
이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즐기는 방법은 크게 3가지다. 리버티섬에 내려 여신상 주변을 한 바퀴 걸으며 돌아보는 방법이 가장 많다. 추가 요금을 내면 여신상의 발이 있는 받침대 부분까지 올라갈 수 있다. 왕관까지 계단으로 올라가는 티켓을 살 수도 있다. 이 티켓의 가격은 3달러 더 비싸지만 발행량이 하루 500명으로 제한돼 있어 통상 서너 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
방문객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유의 여신상의 발까지 오를까. 불과 20%에 불과하다. 왕관까지 오르는 사람의 비율은 전체 방문객의 7%밖에 되지 않는다.
여신상 내부 받침대 부분에는 조그만 박물관이 있다. 여신상이 들었던 원본 횃불을 비롯해 각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던 곳이다. 현재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횃불은 모조품이다. 원래 여신상이 1886년 만들어졌을 당시 오른손에 들려 있던 이 조각은 세월 속에 심하게 부식되는 바람에 1986년 수리할 때 모조품으로 대체됐다. 이후 원본은 내부 박물관에 전시돼 있었다.
하지만 박물관을 찾지 않은 80%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다.
여신상을 관리하는 ‘자유의 여신상-엘리스섬 재단’은 이 사실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한 해 평균 450만 명 정도가 이 섬을 찾아오지만 실제 자유의 여신상에 대해 잘 알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 2012년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덮치면서 섬의 70% 이상이 물에 잠겼다. 1억 달러 정도가 소요되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진행하기로 하면서 재단은 오래된 고민을 해결하기로 했다. 자유의 여신상 옆 공터에 훨씬 큰 규모의 새로운 박물관을 짓고 섬을 방문하는 모든 관람객들에게 공짜로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2016년 박물관 신축 공사가 시작됐고 3년간의 건설을 거쳐 이달 문을 열었다.
이제 페리를 타고 리버티섬에 내리면 오른쪽에 자유의 여신상이, 왼쪽에 새로운 박물관이 보인다. 과거에는 내리자마자 곧장 여신상의 받침대 부분으로 향했지만 이제는 박물관부터 들러 자유의 여신상에 대해 듣고 본 뒤 천천히 여신상을 찾으면 된다.
2415㎡ 규모의 이 박물관은 전체적으로 납작하고 넓다. 1층에는 전시관이 들어서고 건물 위에는 루프톱 테라스가 설치돼 있다. 외부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탁 트인 맨해튼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닉 개리슨 건축가는 “맨해튼 경관을 최대한 해치지 않기 위해 이런 디자인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박물관 안에는 전시 공간 세 곳이 마련돼 있다. 내부에 들어서면 우선 구불구불한 흰 벽면이 눈에 띈다. 여신상의 치맛자락을 형상화한 이 벽에는 관련 영상 자료가 게시된다. 기존 박물관이 문서 위주였다면 이제는 영상을 통해 더욱 직관적으로 관람객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여신상의 건설 배경과 과정을 생생히 담은 1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상이 펼쳐진다. 드론으로 여신상의 내부 모습을 촬영한 희귀 영상도 공개된다.
◆이민자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자유의 여신상
다큐멘터리를 보면 자유의 여신상에 대해 숨겨져 있던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떻게 자유의 여신상이 이 섬에 왔는지,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150피트 높이의 거대한 선물을 건설하고 이곳에 가져왔는지, 동상이 세계 자유의 상징이 된 연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수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우선 여신상은 처음 기획될 때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한 게 아니었다. 1865년 동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 에두아르트 드 라부라예는 공화정을 옹호하던 공화파였다. 그는 미국이 남북전쟁을 거쳐 노예제를 폐지한 데 감명 받아 이 동상을 제안했다.
제작을 담당한 프랑스의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만든 초기 모델을 보면 여신상은 왼손에 부서진 사슬을 쥐고 있어 노예해방의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바르톨디는 최종 모델에서 동상의 손에 사슬 대신 태블릿(청동 명패)을 쥐여 줬다. 이 명패엔 ‘1776년 7월 4일’이라는 미국 독립일도 새겼다. 이 때문에 통상 독립선언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법치를 상징하는 태블릿이라고 한다.
바르톨디는 그 대신 여신상 발아래에 부서진 족쇄와 쇠사슬을 배치했다. 하지만 높은 받침대 위에 있는 여신상의 발은 쉽사리 볼 수 없다. 박물관의 디자인을 이끌었던 에드윈 슐로스버그는 “숨겨진 비밀이긴 하지만 이 사슬은 헬리콥터를 타지 않으면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박물관이 제공하는 다큐멘터리에는 조각상의 공중 촬영 장면이 포함돼 있어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부서진 쇠사슬을 볼 수 있다.
박물관의 전시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원본 횃불이다. 박물관의 끝까지 걸어가면 통유리로 시원하게 트인 공간이 나오는데 이 공간에 받침대 내부 박물관에 있던 원본 횃불이 옮겨져 설치돼 있다.
횃불 뒤에는 동으로 만든 여신상 얼굴 부분의 모조품이 보인다. 가까이에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게 한 배려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자세히 볼 수 없었던 여신상 발 부분의 모조품도 전시돼 있다. 받침대에 부착돼 있는 엠마 래저루스가 지은 시 ‘새로운 거상(The New Colossus)’의 복사본도 박물관에 있다. 이 시는 자유를 갈망하며 모여든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여신상을 묘사했다.
이 시가 묘사하듯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인에게 노예해방보다 이민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동상이 이민자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은 여신상이 세워진 뒤 몇 년이 지난 뒤부터다.
이 동상이 공개된 것은 1886년 10월 28일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6년 뒤 바로 옆 엘리스섬에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검문소를 세웠다. 이후 수십 년 동안 1200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이 엘리스섬을 통과하면서 자유의 여신상은 자유와 번영을 찾아 온 이민자들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됐다. 래저루스의 시가 1903년에야 부착됐다는 것도 박물관을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재단의 스티븐 브리간티 최고경영자(CEO)는 “이 프로젝트는 1억 달러가 드는 대규모 공사”라며 “정부의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오로지 기부만으로 진행했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12개 언어로 오디오 투어를 제공한다. 전 세계의 역사적인 사회정치 운동의 기록도 전시해 놓았다. 마하트마 간디와 넬슨 만델라의 활동 그리고 1989년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졌던 민주화 시위도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자유의 여신상 박물관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자세히 볼 수 있다. 재단은 애플과 협력해 가상현실(VR)을 사용한 앱과 팟캐스트를 만들었다. 앱의 이름은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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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5호(2019.05.20 ~ 2019.05.2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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