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난쟁이는 여전히 아프다

사랑 없는 욕망으로 뒤덮인 사회
인간은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역사가는 시대를 기록한다. 문학은 그 위에 사람과 삶의 모습을 다양한 무늬로 그려낸다. 문학이 반드시 사회성을 지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문학이 반드시 예술성만으로 평가되는 것만도 아니다. 좋은 문학은 사회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다. 그런 작품은 드물다. 고전은 그런 점을 동시에 갖춘 것이 많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에 나타난 작품 가운데 최고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1970년대 산업화의 그늘 그린 고전
1970년대의 대한민국은 독특한 모습을 갖는다. 1960년대 갑자기 불어 닥친 산업화는 전통적인 사회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고 그 과정에서 저임금 노동의 착취를 토대로 산업이 발달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권력과 재력의 층이 형성됐고 사회는 자연스럽게 양극화되는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그러한 산업사회가 기존의 생산 체계와 경제구조를 대체하고 가진 자의 탐욕과 횡포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세희 작가의 이 작품은 그러한 한국 사회의 단면과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일한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연작이다. 1975년 말부터 3년간의 기간을 두고 이어서 발표한 것을 1978년 단행본으로 묶어 펴냈다. 이 연작소설에는 문학·정신·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두루 담고 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나는 불행하게도 그들은 아버지의 모습만 옳게 보았지 그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는 것을 맹세할 수 있다. 우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하였으며,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일 수밖에 없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과연 이 가족뿐일까. 그의 아버지가 난쟁이이기 때문일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참는 것뿐일까.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잘 참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 허접쓰레기 같은 조반을 드시면서 철거계고장이 날아들자 참기 힘드신 것 같았다. 내용은 낙원구청장으로부터 날아온 강제철거에 관한 경고장이었다. 동네골목은 아파트 입주에 관한 게시판 공고문 앞에 몰려든 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지는 철거계고장 소리를 듣고 일을 그만두고 돌아오신 듯 했고, 나는 아버지 옆으로가 아버지의 공구들이 들어있는 부대를 둘러메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난쟁이는 못 가진 자, 힘없는 자, 배우지 못한 자를 상징한다. 그런 난쟁이들을 도와주기는커녕 ‘문둥이(한센씨병 환자) 콧구멍의 마늘 빼먹 듯’ 오히려 그들의 약한 처지를 악이용해 더 가혹하게 착취하는 거인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존중도 배려도 예의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러한 비극적 현실이 생겨난 환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산업화 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아무런 가치관도 없이 인간의 존엄성마저 철저하게 짓뭉개는 사회였다. 그것은 돈으로 왜곡된 산업화 사회의 모순마저 삼켜버리는 거대한 블랙홀이다. 조세희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산업화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구체적 삶의 형태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흔히 말하는 문학의 사회성과 미학성을 함께 갖췄기 때문에 그러한 평가가 가능하다.
조세희 작가는 현실을 미화하지도 호도하지도 않으며 억지로 과장하지도 않고 마치 사진의 프레임에 담듯 하나하나 풀어낸다. 그 화면의 내용이 분명 아프고 시린데도 슬픔보다 연민과 연대감이 일어나는 것은 작가의 깊은 통찰과 견고한 문학 정신 덕택이다. 마치 심층 르포를 따라 읽듯이 빠져드는데 너무 따라가기 힘들어 혹은 외면하고 싶어 뒷걸음질하게 하거나 혹은 과도한 감정이입을 이끌어 내 격하게 분노하며 뛰쳐나가지 않게 하는 것 또한 작가가 냉정을 유지하면서 던지는 현실 인식의 힘이다.

‘난쟁이’들만 남는 사회
조세희 작가는 이 작품집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않아 많은 독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물론 작가로서 전작이 워낙 반향이 커 그것을 능가할 작품을 내놓기 어려워 그럴 수 있고 마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할 바는 다했다고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르며 혹은 그렇게 혼신을 다해 쏟아 놓아도 미동도 하지 않는 현실을 보며 깊이 좌절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체 이야기의 중간 부분에서 난쟁이 일가의 비참한 몰락을 보게 된다. 이러한 몰락을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자본 계층의 삶이 대조적으로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대조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세계의 모습에서 난쟁이의 존재는 하나의 좌절된 삶의 상징처럼 부각되고 있다.
“공장사람들은 우리를 배신했다. 처음엔 함께 일손을 놓고 사장을 만나 담판하기로 했던 아이들이 우리를 배반해 형과 나 이렇게 둘이만 사장과 그의 참모들에게 대항하는 꼴이 되었다. 우리는 이길 수 없었다. 공장사람들은 우리의 일을 빼앗았다. 그날 밤 승용차 안의 사나이가 우리 동네의 나머지 입주권을 모두 사버렸다.”
조세희 작가가 상징했던 난쟁이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비정규직 노동의 증가다. 정부의 발표를 따라도 600만 명이 넘고 노동계 발표에 따르면 800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 삶은 세습되기 쉽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난쟁이의 삶으로 자신의 사회적 삶을 시작한다. 과연 미래가 있는가.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묘하게도 지금의 기성세대는 과거에 더 힘든 질곡의 과정을 겪으며 자랐기에 알게 모르게 내성이 생겼다. 그것이 난관을 이겨 내는 인내력의 힘으로 자랐으면 모르되 어지간한 일은 그러려니 하고 내 일 아니면 관심을 접으며 사회가 퇴행해도 무덤덤하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형태로는 그것은 착시일 뿐이고 헛된 바람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서서히 난쟁이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1%의 특권층이 나머지 99%에게 관심이나 공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의 불의를 물리치고 함께 일어나야 자기 미래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카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