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도 정사를 각색한 스토리텔링…이야기에 힘이 있다

이야깃거리를 찾는 인류의 본능
때는 1569년 선조 3년 6월 20일 저녁. 창경궁 문정전에서 국왕과 신하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경연(經筵)이 열리고 있었다. 선조가 물었다. “장비가 고함을 지르자 놀란 상대방 군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고 하는 얘기가 ‘삼국지’ 정사(正史)에는 없다. 그런데 소설(삼국지통속연의)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고 들었다. 어찌된 일인가.”

선조가 말하는 ‘장비의 고함’ 사건은 대체 무엇일까. 나관중의 소설에는 장비가 조조 군대에 단기필마로 맞서는 장면이 나온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장판교에 이르렀는데, 다리 건너편에 장비가 장팔사모를 든 채 떡하니 혼자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문제는 장판교 뒤로 흙먼지가 일고 있어 복병이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조조는 신중했다. “장비도 관우에 못지않은 용장이다. 섣불리 접근하지 마라.”

그때 장비가 고함을 질렀다. “내가 바로 연인(燕人) 장익덕이다. 목숨이 아깝지 않거든 누구든지 나서라.” 장비의 천둥 같은 소리에 조조 옆에 있던 하후걸이 깜짝 놀라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혼비백산한 조조가 말머리를 돌렸다. 전 군대가 ‘걸음아 날 살려라’ 황급히 퇴각했다.


‘장비의 고함’ 사건은 진실일까
문제는 나관중이 묘사한 장판교 사건은 정사와 다르다는 점이다. 정사에는 “장비가 물을 의지하여 다리를 끊고 나서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질렀다. 적들이 모두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장비는 위기를 모면했다”는 정도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장비가 용맹하다고 한들 바로 코앞도 아니고 저 멀리 다리 건너편의 장비가 고함을 질렀다고 조조 군대의 장수가 낙마하여 죽었다? 과장이 심하다. 더구나 하후걸이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도 아니다. 어쨌거나 나관중의 이러한 작법이 밋밋한 정사에 비해 독자들을 흥미진진하게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게 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시 창경궁 문정전의 경연장으로 돌아가 보자. 선조의 질문을 받고 대답한 사람은 고봉 기대승이다. 기대승은 논쟁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특히 그가 1559년부터 8년간 스물여섯 살 연상의 거유인 퇴계 이황과 서신을 통해 벌인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조의 질문에 답하는 기대승의 나이는 42세다. “소설 ‘삼국지’가 나온 지 오래지 않아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사옵니다.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이 많다고 하옵니다. 원래 역사의 기록이란 훗날에는 억측하기 어려운 법인데 이것저것 덧붙여 매우 괴상하고 허탄하다 하옵니다. 단언하건대 이는 별로 믿음성이 없는 자가 잡된 말을 모아 옛이야기처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기대승은 깐깐한 성리학자다. 그와 같은 유학자들에게 공맹학의 정수를 계승하는 역사와 철학이 아닌 픽션은 요즘 말로 하면 삼류 무협지나 B급 판타지 소설에 불과했을 것이다.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목적은 수양을 통해 공자와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들이 고상한 수양을 방해하는 삿된 창작을 용납할 리 만무하다.

기대승이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특히 동승이 허리띠 속에 헌제의 밀서를 숨겨 온 이야기라든지, 적벽대전에서 오나라와 촉나라 연합군이 대승을 거둔 이야기 등은 전부가 괴상하고 거짓된 것으로 근거 없는 말로 부연하여 만든 것이옵니다.”

기대승과 같은 성리학자들은 정사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상상력을 발휘해 꾸며내는 창작을 쳐 주지 않았다. 공자가 말한 ‘서술은 하되 창작은 하지 않는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영향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역대 왕조에서 ‘삼국지’와 관련된 고사를 숱하게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정사다.

그러므로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허수아비를 세운 배를 앞세워 조조에게서 10만 개의 화살을 얻어냈다든지, 천신에 제사를 지내 동남풍을 불러온다는 식의 호풍환우(呼風喚雨)를 성리학자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재미있고 발칙한 상상력은 기대승과 같은 성리학자들에게는 한낱 괴이한 헛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픽션을 용납하지 않았던 성리학자들
인류가 생겨난 이후 이야기는 사람들의 본능이다. 이런 스토리 본능은 꼭 문자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문자가 발명된 것은 불과 6000년 전의 일이다. 그럼 그전에는 이야기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밀림 오지에서 원시적인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문자가 없는 부족들도 이야기를 지어내고 들려주고 듣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수렵과 채집을 하고 살았던 석기시대 사람들에게도 이야기는 중요한 삶의 활력소였을 것이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스페인의 한 동굴에 남겨 놓은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나 신석기시대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유심히 살펴보라. 그곳에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가 그림으로 서술되고 있다.

매머드나 들소, 혹은 고래 사냥을 나섰던 석기시대 남자들은 목숨 걸고 사냥을 하면서 느꼈던 긴장감과 쾌감을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들려주면서 이야기 본능을 발산했을 것이다.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에다 소감까지 곁들여 가면서, 혹은 과장과 허풍을 섞어 가면서 말이다. 이러한 스토리 본능은 문자가 발명되면서 더욱 정교하게 발전했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실제 사건 속의 인물과 픽션 속의 가공인물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뜻밖에도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과 우리를 동일시하지 않고 그들에게 공감하지 않으려면 엄청난 의지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의 저자 조너선 갓셜은 “영화 보는 사람의 뇌를 기능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하자 스크린의 모든 감정이 뇌에 점염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로 시작하는 가수 양희은의 노래 ‘부모’가 사실은 김소월의 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두근두근 울렁울렁 가슴 뛰지만/ 무섭고도 두려워서 겁이 나지만/ 신밧드야 오늘은 어디로 가나/ 우리 모두 듣고 싶다 얘기 보따리”는 만화영화 ‘신밧드의 모험’의 주제가다. 남녀노소를 떠나 스토리 본능은 우리를 자극한다는 것을 소월의 시나 만화영화의 주제가가 잘 보여준다.

사족. 18세기 조선시대 소설의 유행을 주도했던 사람은 영조다. 그는 병상에서도 소설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소설을 창작한 사람도 사대부였고 독자층도 사대부거나 양반가의 규수였다. 더군다나 18세기 영조 시절의 조선도 임진왜란 전 기대승이 경연장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성리학적 사회였다.

요컨대 기대승은 실제로는 소설을 즐기면서도 임금 앞에서는 성리학자로서의 당위론을 펼친 위선자였거나 아니면 진실로 성리학적 수양에 힘쓴, 그러나 답답한 샌님형 교조주의적 주자학자였을 것이라는 소리다. “소설 ‘삼국지’ 한 번 보고 싶다”는 임금에게 “제가 구해 드리지요” 할 것이지 자신이 읽지도 않은 소설을 두고 저렇게 대놓고 정색할 건 뭔가. 선조가 많이 무안했을 것 같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