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만고 끝 외환은행 인수한 하나금융…최근 ISD 소송 벌어지며 논란 재현돼

론스타, 12년에 세월을 이어 온 질긴 ‘악연’
2012년 1월 27일. 금융위원회가 하나금융지주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하면서 하나금융은 현재와 같은 그룹의 틀을 갖췄다. 하나금융이 론스타로부터 외환은행 인수 계약을 체결한 것은 2010년 11월 25일이었다. 무려 1년 2개월여 만에 금융 당국의 승인을 얻어 낸 것이다. 그러나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를 위한 노력은 단지 1년 2개월에 걸친 것이 아니었다. 하나금융이 외환은행 인수에 눈독을 들인 것은 2012년에서 7년을 거슬러 올라간 2005년부터였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긴 ‘악연’의 시작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론스타 펀드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것은 2003년 8월이다. 인수 가격은 약 1조3834억 원. 외환은행은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부실채권이 다른 은행 평균의 약 3배인 10조7900억 원에 달할 정도로 경영이 악화됐다. 당시 코메르츠은행의 자본 유치라는 카드로 퇴출을 피해 간 외환은행은 카드 사태 등이 터지면서 2003년 론스타에 인수된다. 서울은행·조흥은행 인수에 도전하며 국내 은행 산업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던 론스타로서는 마지막 시도에서 ‘대어’를 낚은 셈이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자 국내 금융권에서는 “또 외국계 사모 펀드냐”라는 비판이 강하게 터져 나왔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야 그렇다 치더라도 5년이 훌쩍 넘은 상황에서도 하필이면 경영보다 단기 매매 차익을 목적으로 하는 외국계 펀드에 국가 기간산업을 팔아넘기느냐는 얘기였다. 론스타의 목적이 단기 차익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인수 2년 만인 2005년 외환은행을 매물로 내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한편 투기자본감시센터는 2005년 9월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매각하는 데 관여했던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 등의 관련자들을 무더기로 검찰에 고발했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서 이들이 외환은행의 경영 상황을 왜곡해 헐값에 매각했다”며 “당시 관계자들을 허위 공문서 작성과 공무집행방해죄로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2003년 당시 외환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은 책정된 것보다 훨씬 높았지만 누군가 인위적으로 수치를 낮춰 론스타의 헐값 매각을 도왔다는 주장이었다.


사회문제로 비화된 외환은행 매각
이후 론스타와 외환은행을 둘러싼 흐름은 시장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시장 논리뿐만 아니라 검찰·감사원·정치권·시민단체·노동조합까지 얽혀 있는 희대의 ‘외국자본 먹튀 논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어찌됐든 론스타는 2006년 1월 미국 씨티그룹을 매각 작업을 위한 주간사로 선정하며 외환은행 매각 작업을 공식적으로 시작한다. 국민은행과 하나금융이 인수전에 이미 뛰어든 상황. 외환은행을 인수해 국내 최대 메가 뱅크로 발돋움하려는 국민은행과 다른 금융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하나금융의 신경전이 치열했다.

그러나 이번엔 정치권의 ‘매각 반대’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여야 가릴 것이 없었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은 “외국계 투기 자본 론스타의 주도 아래 벌어지는 매각 작업을 금융 당국이 방관하고 있다”며 “외환은행 매각 추진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도 “각종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만큼 매각 작업을 일단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쟁점은 이랬다. 외환은행 매각 직전인 2003년 6월 당시 은행 내부에서 추정한 BIS 비율은 9.14%였지만 한 달 만에 갑자기 6.16%로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외환은행은 잠재적 부실 금융회사가 됐고 대주주 자격 요건도 완화됐다. 이를 근거로 금융 당국이 은행도 아닌 사모 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했다는 것이다.

금융 당국은 당시 외환은행 재무팀의 한 직원으로부터 팩스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이 직원은 이미 간질환으로 사망하고 난 뒤였다. 죽은 이에게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론스타 외에 다른 인수자를 찾아보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비판도 컸다. 여기에 이강원 당시 외환은행장의 배임 논란도 벌어졌다. 외환은행의 문을 활짝 열어 론스타를 맞아들이는 대신 행장직 유임과 거액의 보너스를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정부 측에서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며 “함부로 매도하지 말라”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외국계 ‘투기 자본’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과 막대한 매각 차익에 따른 ‘먹튀 논란’과 정부 책임론까지 얽히면서 론스타 사태는 엄청난 사회적 이슈로 번져 갔다. 검찰은 2006년 3월 외환은행 ‘헐값’ 매각 논란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가 외환은행 매각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조사해 달라는 고발장을 접수한 것이다.

다른 한편(시장)에서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외환은행을 인수하려는 국민은행과 하나금융의 경쟁도 격화됐다. “초대형 한국 대표 은행을 만들자”는 논리와 “하나은행의 소매금융과 외환은행의 기업금융 강점을 결합하겠다”는 전략이 맞붙었다.

승자는 국민은행이었다. 론스타는 2006년 3월 국민은행을 외환은행 매각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했다. 지분 64.62%를 약 6조4100억 원에 인수하는 초대형 계약이었다. 론스타는 외환은행 인수 2년 6개월여 만에 4조 원이 넘는 차익을 챙길 수 있었다. 하나금융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건에서 밀리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수 협상자 선정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반응까지 보였다. 그러나 하나금융이 좌절하긴 아직 일렀다. 국민은행의 우선 협상 대상자 선정은 아직 긴 ‘여정’의 초반부에 불과했다.

다른 한쪽에선 검찰의 수사가 한창이었다. 동시에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자체가 무효’라는 주장도 점점 커져 갔다. 론스타는 매각 차익 일부를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역풍마저 불었다. 감사원도 나서 의혹이 해소될 때까지 매각 절차를 중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은행으로선 좌불안석,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결국 국민은행이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지 8개월 만인 2006년 11월 론스타는 국민은행과 맺었던 매매 계약을 파기한다.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은 “외환은행을 국민은행에 매각하는 작업을 더 이상 진행시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검찰 수사가 최종적으로 끝나면 다시 우리의 전략적 선택에 대해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론스타, 12년에 세월을 이어 온 질긴 ‘악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은행 인수전은 계속됐다. 물밑에서 론스타와 인수 의향자들의 접촉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번 승자는 외국계 은행인 홍콩상하이은행(HSBC)이었다. 국민은행과의 계약을 파기한 지 10개월 만인 2007년 9월 론스타는 HSBC에 외환은행 지분 51.02%를 약 5조9000억 원에 팔기로 했다고 밝혔다. 상당히 높은 가격이었다.


HSBC도 계약 파기…하나금융 ‘극적 역전’
하지만 하나금융이 외환은행을 인수할 운명이었을까. 두 번의 실패를 맛봤지만 이번에도 외환은행 매각은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국 정부와 론스타간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내용의 일부인 상황이 이때 벌어졌다. 결론적으로 이 계약에 대한 금융 당국의 승인이 미뤄졌고 금융 위기가 터지자 더 좋은 매물을 더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상황이 된 HSBC는 2008년 9월 계약을 취소한다. 이때 금융 당국의 승인이 늦어져 비싸게 팔 수 있었던 외환은행을 결과적으로 싸게 팔았다는 게 론스타가 소송을 제기한 이유 중 하나다.

2010년 11월 16일 새벽, 월스트리트저널의 한 기사가 국내 금융권에 날아들었다. 론스타가 외환은행 지분 51%를 하나금융에 팔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호주 ANZ은행의 인수가 확실시 된다는 소문이 국내 금융권에 퍼져 있던 상황. 김승유 당시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다음날 기자 간담회에서 첫마디를 이렇게 던졌다. “김인경 선수가 막판에 역전 우승을 했네요.” 미국 여자프로골프대회(LPGA)에서 막판 역전 우승을 거뒀던 하나금융 소속의 김인경 선수의 이야기였다. 하나금융이 외환은행 인수전에서 역전을 거뒀다는 감격의 표현이었다.

ANZ와 론스타의 협상은 막판에 속도가 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ANZ의 제안이 론스타의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김승유 전 회장이 나섰다. 하나금융이 제시한 액수는 총 4조7000억 원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 론스타가 이에 만족한다는 반응을 보이자 본격적으로 밀어붙여 ‘역전’을 일궈 냈다.

현재 외환은행은 하나금융지주의 100% 자회사다. 하나은행과의 합병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지만 하나금융이 인수할 때와 비교하면 ‘평온한’ 상황인 것은 틀림없다. 당시 론스타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하나금융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던 것이다. 2010년 11월 25일 주식 매매 계약을 체결했지만 여러 달이 흐르도록 금융 당국의 인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금융 당국의 고민은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2003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8년간 논란이 됐던 ‘론스타는 금융자본인가 산업자본인가’ 하는 논란이 재점화됐던 것이다. 일각에서 론스타는 비금융주력자이기 때문에 외환은행 인수 자격 자체가 없다는 주장이 계속돼 왔다. 은행법상 비금융주력자는 은행을 인수할 수 없다. 만약 론스타가 산업자본이라면 그동안 론스타의 모든 경영활동 자체가 불법이 되는 셈이다.

김승유 전 회장으로서는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자회사 편입 승인이 계속 미뤄지자 김 전 회장은 “마치 쓰나미를 맞은 듯한 충격”이라며 강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다.

해가 두 번 바뀌었다. 2012년 1월 27일. 금융위원회는 결국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자회사 편입을 승인한다. 금융위의 결론은 “론스타는 산업자본이었지만 비금융 계열사 자산을 많이 갖고 있는 계열사(PGM)를 매각한 지금은 산업자본으로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찌됐든 천신만고 끝에 하나금융은 외환은행 인수에 성공했다. 그리고 여기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외환은행의 5년 독립 경영’을 보장한 ‘2·17 합의’를 외환은행 노동조합과 맺었다. 외환은행 노조는 하나금융의 인수에 반발하며 총파업까지 고려하던 상황이었다. 2005년께부터 시작된 외환은행 인수가 눈앞에 있었던 하나금융으로서는 ‘2·17 합의’를 맺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론스타는 그렇게 한국을 떠났다. 지금도 여전히 한국 정부와 ISD가 남아 있지만 말이다. 론스타와 한국의 ‘인연’은 2003년부터 시작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외환 위기 당시 부실채권을 대거 인수했던 1997년부터 시작된 긴 ‘악연’이었다. 수많은 불법 논란이야 법정에서 그 시비가 가려지기도 했지만 이를 차치하면 론스타는 외국자본에 대한 국민감정과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여러 과정들이 뒤섞여 아직도 그 정체가 흐릿하게 보이는 존재일 것이다. 훗날 론스타는 한국 금융사에서 어떤 존재로 인식될까. 이를 정확히 규정하기엔 누구에게도 이른 ‘현재 진행형’의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박한신 한국경제 금융부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