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민주주의’의 실패로 협력 중요성 배워…정당보다 국가와 국민 우위에 둬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전 총리는 5월 22일 오전 11시 경기도의회 본회의장에서 ‘독일의 통일 및 연정 경험과 한국에 주는 교훈’이라는 주제로 특별 연설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동서독 통일 과정과 정당을 초월해 협력한 연정에 대해 경험을 나눴다. 약 40분간 진행된 슈뢰더 총리의 연설에는 남경필 경기지사와 강득구 도의회 의장을 비롯해 경기도의원, 도청 간부 공무원 등 300명이 빈 틈 없이 자리를 채웠다. 동시 통역기는 일찍이 동이 났다.이날 연설의 초점은 단연 연정에 쏠렸다. 내각책임제 국가인 독일은 선거에서 승리한 제1당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한 적이 없다. 1949년 서독 지역에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현재까지 연합 정부를 수립해 국가를 이끌어 왔다. 사민당의 슈뢰더 전 총리는 독일 통일 후 혼란 속에서 녹색당과의 연정을 실시했다. 이후 정치적·사회적 통합을 바탕으로 ‘하르츠 개혁’ 등 독일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해 독일 제2의 경제 부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얻는다. 경기도는 한국 최초로 연정(경기 연정)을 시행하고 있다. 연정의 본고장에서 온 슈뢰더의 연설에 경청과 박수로 화답한 이유다. 슈뢰더 전 총리는 “정당보다 국가와 국민을 더 우위에 두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연정은 두 개의 뿌리가 서로 자라나 하나의 성공을 향해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슈뢰더 전 총리의 연설 내용이다.
경기도가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정당을 초월한 연정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연정은 두 개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 뿌리가 자라서 하나의 성공으로 나아가야 한다. 독일은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제1 민주주의가 있었지만 나치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나치의 경험은 학습의 과정이었다. 제1 민주주의 시기에 정당과 화해·화합하지 못하고 대립했는데 민주주의 수호와 국가 안녕을 위해서는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정당 간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간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을 때 정당은 당의 이해보다 국가와 국민을 우선해야 한다.
서독 수립 후 한 번 제외하고 계속 연정
독일은 연방 정부이고 연방 하원과 연방 상원을 두고 있는 양원제다. 정부 여당이라고 상원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총리 재임 중에도 연방 상원의 다수 석을 확보하지 못했고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연방 주 및 야당과 타협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독일은 선거법상 단독 정당으론 국정 운영이 불가능하다. 독일은 정부 수립 이후 한 번을 제외하고 계속 연정을 해 왔다. 현 정부도 기민당이 기사당·사민당, 자민당과 바꿔 가면서 연정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과거 사민당 시절에도, 니더작센 연방의 주총리(주지사)나 연방 총리로 재임할 때도 모두 녹색당과 협력해 일했고 그 결과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다.
어떤 타협은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연정은 평화롭게 국정을 운영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독일에서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연정은 연방 하원, 연방 상원 간 협력을 비롯해 합의에 기초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문화다. 이것이 정치체제 문화로 뿌리 내렸다.
한국에서도 정당을 초월하는 협력이 시작됐다. 경기도에서 그것을 시도했다. 협력은 상호 존중과 신뢰가 바탕이 됐을 때 가능한 것이다.
독일과 한국 양국은 공동의 운명을 가진 바 있다. 한국과 독일은 분단의 아픔을 뼈아프게 겪은 나라들이다. 독일은 40년 이상 고통을 겪다가 다행히 통일을 이뤘고 분단을 극복했다. 한국은 아직도 철조망과 지뢰밭이 한국 국토를 갈라놓고 있으며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독일과 한국의 공통점이 많지만 차이점도 있다. 독일의 분단은 의심할 여지없이 나치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이 야기됐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한국은 전쟁에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고통을 당했다. 어두운 역사적 시기를 청산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한국 국민들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역사의 청산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동독과 서독은 서로 상반된 체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번도 전쟁을 한 적이 없다. 체제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정치가 있었다. 이것이 훗날 빌리 브란트 총리 시절 광범위한 긴장 완화 정책으로 귀결됐고 독일 통일을 위한 초석이 됐다.
서독이 동독에 다가서는 방식에서 핵심 슬로건은 ‘접근을 통한 변화’였다. 이러한 슬로건하에 마련된 정책 덕에 동독 주민은 서독으로부터 고립되지 않을 수 있었다. 수백만 명의 독일 사람들은 이 시기에 상호 방문했고 다른 한편으로 동독은 동유럽에서 재야의 시민운동을 크게 벌이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투쟁했다.
“비현실적이라고 말한 그때 통일이 왔다”
한국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위해 북한에 대화의 손을 내밀고 있다. 북한이 당장 손을 잡지 않는다고 해서 내민 손을 거둬들이면 안 된다. 한국이 통일로 향하는 길에서 북한과의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일에 경기도가 선구자적인 역할을 할 것을 바란다.
과거 독일 분단은 40년 이상 지속됐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통일은 이뤄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시점에 통일이 찾아왔다. 대규모 시위 속에서 동독 주민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외쳤다. 동독 체제는 불과 1주일이 채 되지 않아 붕괴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통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시위대의 요구는 통일 과정에 큰 반향을 미쳤다. 동독 주민들은 당시 서독의 화폐였던 마르크화를 즉각적으로 동독에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독일 마르크화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가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이는 통일 과정에 어떤 위험과 부담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대량 탈출의 위험이 크다. 한국 통일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예견할 수 있다.
독일은 세 가지 큰 결정을 했다. 첫째, 화폐를 비롯한 신속한 경제 통합을 이뤘다. 내용은 시장경제를 동독에 즉각적으로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동독의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것이었다. 셋째, 동독의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한 재건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들은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것이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쇼크를 초래했다. 쇼크를 막기 위해 엄청난 사회적 자금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흘러 들어갔다.
분단 극복 개혁 프로그램인 ‘어젠다 2010’은 통일 후 반드시 필요한 구조 개혁이었다. 통일 후 10년이 지나 관철된 점은 돌이켜 보면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 것이었다. 고통이 수반되지만 통일 직후 바로 실천에 옮겼어야 했다고 본다. 물론 과거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은 통일 후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고 경제와 사회체제 통합이라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했다. 독일의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고 대외적 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시급히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러나 구조 개혁에 소홀해 독일은 통일 후 10년 만에 ‘유럽의 병자’로 불려야 했다. 국가 부채가 10년도 채 되지 않아 약 5000억 유로에서 1조1000억 유로로 두 배 규모로 늘어났다. 노동시장은 동독과 서독 모두 실업이 늘어났고 사회보장제도는 재정적으로 한계에 부딪쳤다.
1998년 연방 총리에 선출되면서 당시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공약을 했다. 세금 인하, 사회보장제도 개선, 노동시장 유연화 등이 그 내용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반드시 필요한 구조 개혁이었다. 그리고 그 후 독일은 경제적으로 국제적 경쟁력을 갖게 됐다.
독일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 과정에서 엄청난 비용과 고통스러운 구조 개혁이 수반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만나야 한다. 이것이 어떤 정책에서도 우선돼야 하는 부분이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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