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 vs 외국자본’ 구도된 인수전…하나, 서울은행 손에 넣고 소매금융 강화

론스타, ‘수익 공유’ 카드로 막판 반격
하나은행은 충청은행과 보람은행을 연이어 인수한 지 3년 만인 2002년 또다시 서울은행을 합병한다. 금융권에서 하나은행을 일컫는 말인 이른바 ‘HSBC(하나·서울·보람·충청)’가 완성된 것이다. 현재 하나은행 각 부서를 돌다 보면 보람은행·서울은행·하나은행 출신들이 모두 섞여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서울은행을 인수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대기업 연쇄 부도 직격탄…서울은행 ‘부실화’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로 불리는 5대 시중은행 중 하나였던 서울은행이 망가진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이전이었다. 한보·기아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기업 여신이 많던 서울은행도 부실화의 길을 걸었다. 당시 금융권에선 ‘서울은행=부실 은행’으로 통했다. 1997년 9월 기준으로 무수익 여신(고정+회수 의문+추정 손실)이 전체 여신의 15.1%, 약 3조 원에 달할 정도였다.

고객들의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97년 말이었다. 불과 1주일 사이에 1년간 유치한 예금이 모두 빠져나갔을 정도다. IMF는 정부에 서울은행과 제일은행의 문을 닫으라고 했다. 정부는 IMF를 설득한 후 문을 닫는 대신 부랴부랴 1조1800억 원의 출자를 발표했다. 서울은행도 ‘뱅크 런’을 막기 위해 예금 금리를 연 17%까지 올려야 했다. 한 여직원은 고객들에게 예금을 호소하는 신문광고를 자비로 실었다. 한 번 부실이 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은행 경영의 무서움을 일깨워 줬던 시기였다.

한보 사태 당시에는 장만화 행장이 국회 국정조사특위에 출석하기도 했다. 당시 의원들은 서울은행의 부당 대출을 의심했다. 대가성·외압성 대출이 많았다는 지적이다. 장 행장은 “대출 과정에서 외압이나 사전 협의는 전혀 없었다. 한보철강은 국가 기간산업이라는 점을 고려해 대출을 승인했다”면서도 “결과적으로 심사를 잘못하고 자금 소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점 등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고 책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은행은 1998년 5개 은행이 퇴출될 때 대상에 끼지는 않았다. 정부의 공적자금을 받아 2002년까지 독자 경영에 나섰다. 지금의 우리은행 체제와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된다. 이 기간에 서울은행장을 맡은 이는 훗날 국민은행장을 맡게 되는 강정원 씨다. 2000년 5월부터 2002년 11월까지 서울은행을 맡았다.

정부는 이 기간에 외국자본과 서울은행 매각 협상을 진행했다. 홍콩상하이은행(HSBC)·도이치뱅크 등이 성사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외국자본이 경영보다 단기 투자 이익에 관심이 크다는 점, 매각 후 손실 보전을 요구하는 등 조건 차가 크다는 점 등을 들어 정부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1997년 IMF의 광풍이 불어닥칠 때와 비교하면 외국자본과 ‘조건 차’가 있다는 것 자체가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금융권에서는 이 시기 한국이 IMF 체제를 조금씩 벗어나면서 한결 여유가 생겼던 점을 이유로 든다.

IMF 초기 달러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조건은 ‘언감생심’이었다. 한국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자괴감 속에서 외국자본 유치에 대한 ‘시대적 강박’과 ‘환상’이 동시에 발동했다. 외국자본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 등으로 IMF 체제를 조기에 벗어나면서 한국의 ‘고통’을 틈타 들어온 외국자본에 대한 환상은 오히려 반감으로 점차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론스타와 서울은행 인수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하나은행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 덕분이었다는 해석도 많다.

서울은행에는 5조 원이 넘는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이 때문에 2002년 매각을 추진할 당시에는 부실 정도가 상당히 완화된 상황이었다. 2002년 상반기 서울은행은 1140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고 부실 여신 비중도 2% 이하로 건전해졌다. 이 덕분에 서울은행 인수 의향서를 제출한 금융회사는 모두 8곳이나 됐다. 하나·외환·조흥은행 등 3개 국내 은행과 JP모건·론스타 펀드 등 5개의 외국자본이었다. 이 중 하나은행·JP모건·론스타가 자산 실사 권리를 받았다. 조흥은행과 외환은행은 아직 다른 은행을 인수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나머지 3개 외국계 펀드는 매각 주간사인 골드만삭스의 판단에 따라 탈락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당시 정부의 속내는 이미 하나은행이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미 1999년 제일은행 경영권을 5000억 원에 뉴브리지캐피털에 넘기면서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다. 당시엔 제일은행을 살 자본이 없었지만 상황이 바뀐 후엔 ‘헐값’이라는 말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또한 치고 빠지는 단기 투자 방식의 외국 펀드에 또다시 한국의 기간 은행을 넘기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란 분석이다. 다만 외국계 자본으로부터 불공정 시비가 나오는 것도 부담이었다. 당시 한 외국계 펀드 관계자는 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판을 통해 “정치적인 고려가 서울은행 입찰 분위기를 흐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매각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대형화 마지막 기회’…인수 총력전
서울은행 임직원들의 반발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서울은행 노조가 하나은행과 합병하면 인력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하나은행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은행 3급(차장) 직원의 평균나이는 47세였지만 ‘젊은 조직’인 하나은행의 같은 직급 평균연령은 40세에 불과했다. 합병 후 조직 융화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고용 승계 측면에서도 100% 고용 보장을 내걸었던 론스타와 달리 하나은행은 일부 감원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론스타에 매각되길 희망하는 게 서울은행 임직원들의 대체적인 희망이었다.

그러나 하나은행도 대형화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보람은행과 충청은행을 인수하긴 했지만 서울은행은 이들 은행과는 차원이 다른 대형 시중은행이었다. 전국 영업망을 갖췄고 부유층에 쏠려 있다는 평을 듣고 있던 하나은행의 약점을 보완해 줄 소매금융 기반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서울은행은 이제 안정적인 이익을 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을 듣고 있던 터라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전에도 한미은행과 제일은행 등을 인수하려고 했던 하나은행은 서울은행 인수를 대형화의 마지막 기회로 삼고 총력을 기울였다.

결국 2002년 8월 5일 하나은행은 론스타를 제치고 서울은행 매각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하나은행은 8500억 원을 써낸 론스타보다 높은 1조 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호했던 하나은행에서 가격마저 높게 쓴 것으로 나타나자 정부는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끝날 인수전이 아니었다. 이틀 후 변수가 생겼다. 론스타가 주간사인 골드만삭스에 1500억 원을 더 내고 사겠다는 수정안을 제출한 것이다. 새로운 국면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서울은행을 인수한 뒤 3년간 발생하는 이익 중 예금보험공사와 약정한 목표 수익을 초과하는 금액의 반을 예보에 주겠다는 것이다. 론스타가 자체 분석한 초과 수익은 3년간 3000억 원. 이의 절반인 1500억 원을 더 내고 사겠다는 셈이 된다. ‘수익 공유’라는 개념을 제시해 서울은행 정상화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공적자금 회수율 극대화라는 명분도 제시한다는 속뜻이었다. 게다가 론스타는 1조 원 모두 현금이었다. 반면 하나은행은 ‘하나+서울은행’ 주식을 1조 원어치 주겠다는 것이어서 차이가 있었다. 다 된 줄 알았던 하나은행은 즉각 반발했다. “조건 변경을 허용한다면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들고일어났다.

상황이 시끄러워지자 정부는 론스타의 수정 제안이 합법적이고 유효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대신 하나은행에도 같은 기회를 주기로 했다. 론스타의 수정 제안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던 하나은행도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려웠다. 서울은행 인수 조건을 수정 제안하기로 했다. 인수전은 재경합에 들어갔다.
론스타, ‘수익 공유’ 카드로 막판 반격
하나은행은 인수 가격을 1000억 원 올려 1조1000억 원을 제시했다. 또 주식으로 인수 대금을 주기로 했던 하나은행은 ‘풋옵션’을 제시했다. 주가 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해 주식 가격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져도 1조1000억 원의 가치를 은행이 보전해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제 판단은 정부의 몫이었다.

2002년 8월 19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전체 회의가 열렸다. 전윤철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공자위는 하나은행을 서울은행 매각을 위한 최종 우선 협상 대상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풋옵션을 통해 주가 하락 위험을 제거해 공적자금 회수의 분명성을 강화했다는 설명이었다.

큰 차이가 없다면 가격 외의 조건인 정책적 측면에서 하나은행에 명백히 유리한 싸움이었다. 당시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서울은행 매각 문제는 전반적인 금융 산업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며 “작은 규모의 은행이 난립하는 오버뱅킹(overbanking)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우량 은행과 합병시키는 게 최우선 처리 방안”이라고 말했다.


론스타와 한국 경제 ‘악연의 시작’
2002년 12월 2일 자산 규모 60조 원의 하나은행과 27조 원의 서울은행이 공식 합병했다. 하나은행은 단자사로 출발해 1991년 은행으로 전환한 지 11년 만에 국내 3위의 대형 은행으로 급성장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인수·합병(M&A)이었다.

하나은행 성장사(史)에서도 서울은행 합병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자산은 서울은행의 두 배가 넘었지만 어쨌든 하나은행은 후발 은행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또 프라이빗뱅킹(PB) 쪽이 강하지만 소매금융 기반이 전반적으로 약하다는 평가였다. 서울은행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후발 주자의 이미지를 씻는 발판이 됐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서울은행 인수로 고객과 저원가성 예금 등을 확보하는 데 큰 힘을 얻었다”며 “이때를 계기로 하나은행이 단자회사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인수전은 하나은행의 승리로 끝났지만 론스타와의 ‘인연’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론스타는 당시 한국 경제의 전망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부실채권(NPL) 시장을 사실상 싹쓸이하다시피 했고 현대산업개발로부터 스타타워를 인수하는 등 부동산 시장에서 왕성한 식욕을 보였던 론스타. 론스타의 서울은행 인수 시도는 부동산에 이은 금융회사 인수전의 시작이었다. 금융권에서는 “론스타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조만간 다른 은행 인수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그리고 모두 아는 대로 이듬해인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하게 된다. 론스타의 서울은행 인수 실패는 론스타와 하나은행, 나아가 론스타와 한국 경제 간 ‘인연’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악연’의 시작에 가까웠던 것이다.


박한신 한국경제 금융부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