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현장서 직원과 부대끼며 격려, 태양광도 끈기 있는 투자로 결실

‘광어회’ 사막 공수…멀리 보는 ‘뚝심 경영’
‘화나이글스’에서 ‘마리한화’로의 극적인 변신이다. 2015년 프로야구 역전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한화이글스다. 이같은 환골탈태는 김성근 감독의 힘이 컸다. 한화이글스로서는 김 감독 영입이야말로 ‘신의 한 수’였던 셈이다.

그런데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바로 이 ‘신의 한 수’를 가능하게 한 한화의 사령탑이 있다. 평소 야구 사랑이 뜨겁기로 유명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다. 꼴찌 탈출을 염원하는 한화의 팬들이 먼저 ‘김성근 감독’을 요구하며 나서자 이를 전해 들은 김 회장이 직접 김 감독 영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화의 꼴찌 탈출을 위해선 큰 변혁이 필요하다”며 “팬들이 원하는 데 못할 이유가 뭐냐”는 것이 김 회장의 의중이었다고 한다. ‘김승연식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일화다.


경영 복귀 후 사업 재편 고삐
요즘 한화는 야구에서만 잘나가는 것은 아니다. 한화그룹 전체적으로도 풀 죽어 있던 직원들 사이에 점차 활기가 돌고 있는 분위기다. 그 전환점에 김 회장이 자리 잡고 있다. 2014년 11월 경영에 복귀한 그는 복귀하자마자 삼성과의 ‘빅딜’을 성사시키며 한화의 사업 구조 재편에 고삐를 틀어쥐었다. 한화의 모태 사업인 석유화학과 방위 사업에 확실히 힘을 실어준 것은 물론 한화그룹은 재계 10위에서 9위로 한 계단 올라서게 됐다. 물론 이는 그의 복귀 이전부터 추진된 인수·합병(M&A)이다. 하지만 ‘M&A 승부사’로 일컬어지는 김 회장이기에 이 같은 ‘초대형 빅딜’이 가능했다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이후에도 그의 행보는 숨 가쁘게 이어졌다. 지난해 12월 8일엔 전쟁 위험 지역인 이라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에서 대규모 주택 건설 사업을 하고 있는 한화건설과 협력 업체 임직원들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때 김 회장의 손에 들려 있었다는 ‘광어회 600인분’은 김 회장의 리더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막 한가운데서 일하는 직원들이 가장 먹고 싶어 했던 음식이기 때문이다. 운송은 물론 보관 문제까지 여간 까다롭지 않은 생선회를 직접 챙길 정도로 애정을 쏟은 김 회장은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사흘을 부대끼며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를 계기로 이라크 현장의 직원들 사이에 자신감이 생기고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돌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실제로 김 회장 방문 이후 한화그룹은 지난 4월 이라크로부터 낭보를 전해 들었다. 이라크 정부가 학교·병원·도로·상하수도 등 기반 시설 공사를 한화건설에 추가로 맡긴 것이다. 그 규모만 해도 21억2000만 달러(2조3000억 원)에 달한다. 이에 따라 김 회장은 “이라크에서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자신의 말을 보란 듯이 증명해 낸 것이다.

태양광 사업 역시 김 회장의 복귀를 기점으로 뚜렷하게 두각을 나타내고 이다. 지난 4월 20일 한화큐셀은 미국에서 둘째로 큰 전력 회사인 넥스트에라에너지에 1.5GW의 모듈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태양광 업계 단일 공급 건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다. 업계에서는 이번 계약에서 역시 김 회장의 ‘뚝심 경영’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010년 솔라펀파워홀딩스를 인수하며 태양광 사업에 진출한 한화는 이후 태양광 업황이 극심한 침체기에 접어들며 장기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유럽과 중국에서 수백 개의 태양광 업체가 쓰러졌지만 이 같은 상황에서도 김 회장은 끈기 있게 태양광에 대한 투자를 지속해 왔다. “태양광과 같은 미래 신성장 사업은 장기적인 시각에서 투자하며 그룹의 새 역사를 이끌 소중한 토대로 키워 가야 한다. 당장 눈앞의 이익이나 불확실한 사업 환경에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해낼 수 있다’, ‘꼭 해낸다’는 믿음으로 묵묵히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태양광 사업이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2011년 김 회장의 발언은 그의 신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실제로 김 회장의 복귀 이후 긍정적인 성과들이 이어지면서 내부에서도 ‘한번 해보자’는 진취적인 분위기가 되살아나고 있다”며 “현장의 소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면서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김 회장의 리더십이 그동안 한화그룹 전체에 퍼져 있던 패배 의식을 지우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터닝 포인트’마다 정면 승부
위기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김 회장의 리더십은 과거에도 수차례 입증된 바 있다. 한화그룹의 성장사는 M&A의 역사라는 말이 과언이 아닌 이유다. 수많은 M&A를 통해 과감하면서도 끈질긴 승부사의 면모를 보여 준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김 회장은 고비마다 ‘정면 승부’를 통해 한화그룹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해 왔다.

김 회장은 1981년 7월 한화그룹의 전신인 한국화약그룹의 창업자 김종희 회장이 갑작스럽게 타계하며 당시 29세의 나이에 경영권을 승계 받았다. 김 회장의 승부사 기질은 이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석유화학이 전 세계적인 불황기였고 1982년 당시 한양화학의 경영 부진으로 최대 주주였던 다우케미컬이 철수를 결정한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를 기회로 봤다.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컬(현 한화케미칼)을 인수하고 합작사인 경인에너지(현 인천정유)의 경영권을 확보했다. 당시만 해도 두 회사의 적자는 각각 80억 원과 430억 원에 이르는 수준이었고 당연히 임직원들의 반대가 쏟아졌다. 하지만 김 회장은 “다우케미컬의 철수는 본사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하려는 해외 자산 처분 계획의 일환일 뿐 석유화학의 장래가 어두운 것은 아니다”는 판단이 확고했고 이는 맞아떨어졌다. 1980년 매출 7300억 원 규모의 한국화약은 1984년 2조1500억 원으로 3배 증가했는데, 이 매출의 거의 절반이 한양화학과 경인에너지로부터 나왔다. 이후 높은 성장을 지속한 한국화약은 1992년 그룹 명칭을 ‘한화그룹’으로 변경한다.
‘광어회’ 사막 공수…멀리 보는 ‘뚝심 경영’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도 김 회장의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기로 꼽힌다. 그는 직접 구조조정을 총괄 지휘하며 경향신문을 비롯해 한화에너지 등 알짜 사업을 매각했다. 당시 한화그룹 1차 구조조정의 목표는 1200%에 달하던 부채비율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한화그룹은 전체 그룹 매출액의 35%를 차지하던 한화에너지와 에너지프라자를 현대정유에 매각한 것을 비롯해 공작기계·과산화수소 사업 부문을 해외에 매각하며 외자 2000억 원을 조달했다. 이와 함께 수익성이 높고 재무구조가 건실한 한화바스프우레탄(1200억 원, 1997년 12월)·한화NSK정밀(200억 원, 1998년 1월)·한화GKN(32억 원, 1998년 5월)·SKF한화(22억 원, 1998년 10월)·한화자동차부품(43억 원, 1999년 1월) 등의 합작회사를 매각해 총 1497억 원을 조달했다. 그 결과 2000년 한화그룹의 부채비율을 130%까지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김 회장의 리더십은 ‘의리 경영’이란 별칭을 얻었는데, 계열사 매각을 협상할 때 직원들의 고용 승계 보장을 우선 협상 과제로 추진한 영향이 크다.

이 같은 험난한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며 김 회장은 “삼성생명과 같은 금융 계열사가 있었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 회장은 3년 뒤인 2002년 대한생명 인수에 나서며 다시 한 번 ‘승부사’의 기질을 발휘한다. 당시만 해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의 누적 손실은 2조3000억 원에 달했다. 이 때문에 김 회장이 금융감독위원회를 직접 찾아가 입찰 제안서를 제출할 때만 해도 금융 업계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 대세였다. 한화그룹 내부적으로도 부정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김 회장의 뚝심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는 대한생명 경영이 정상화될 때까지 무보수로 근무하겠다고 선언하며 책임 경영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이후 6년 만인 2008년 누적 적자를 완전히 해소하고 2012년 한화생명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