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 명참모진에도 관도대전서 패배…조조·제갈공명도 ‘역모 관상’ 꺼려

충신도 어쩌지 못하는 군주의 의심
중국 송나라 때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에 장마로 자신의 집 담장이 무너졌다.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빨리 수리하지 않으면 집 안에 도둑이 들지도 몰라요.”

이웃집 노인도 같은 말로 걱정했다. 공교롭게 며칠 지나 그 집에 진짜 도둑이 들었다. 부자의 반응은 달랐다. 같은 충고도 아들의 것은 선견지명이었다. 이웃 노인은 공연히 도둑이 아닌지 의심만 들었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얘기다.

옛말에 ‘의심암생귀(疑心生暗鬼)’라는 말이 있다.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면 실제로 있지도 않은 귀신도 생긴다는 말이다. ‘구약’에 나오는 사울왕도 마찬가지였다. 즉위 초와 달리 거듭된 실정으로 민심을 잃기 시작하자 사울왕은 온갖 의심과 망상에 빠져 주위 사람들을 의심했다.


의심과 망상에 빠진 사울왕
사울이 다윗과 함께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무찌르고 귀환하는 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소리로 노래 부르며 이들을 맞았다. 문제는 노랫말이었다.

“사울이 죽인 사람은 수천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수만이로다!”

그 순간 사울의 낯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내 앞에서 수금(하프)이나 연주하던 보잘것없는 양치기 출신이 왕위를 노리고 있구나!”

사울은 그렇지 않아도 민심의 이반에 신경이 쓰여 스트레스가 극한에 이른 참이었다. 사울의 의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틈만 나면 다윗을 죽이려고 들었다.

‘삼국지’ 초반부의 절대 강자였던 원소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원소가 워낙 그릇이 작은 데다가 고집불통에 의심까지 많은 탓이었다. 원소 막하에는 탁월한 참모가 많았다. 전풍과 저수 같은 명참모는 주군을 잘못 만나 감옥에서 일생을 마쳤다. 조조에게 투항해 중용된 허유나 순욱도 원래는 원소의 참모였다.

관도대전에 앞서 조조의 움직임을 간파한 전풍(田豊)은 원소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조조가 유비를 치기 위해 동쪽으로 원정을 가는 사이에 후방을 급습함이 가한 줄 아뢰오!” 원소는 무시했다. “내 아들이 지금 많이 아픈데 무슨 전쟁이란 말이요?” 전풍은 낙담했다. “죽을병도 아닌데, 아들의 소소한 병을 핑계로 대세를 그르치다니….”

관도대전이 시작되자 전풍은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조조 군대의 진을 빼는 지구전이 필승 작전입니다!” 원소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엉터리 전법은 우리 병사들의 사기만 꺾을 것이야!” 끈질긴 주청도 묵살하고 원소는 전풍을 투옥해 버렸다.

관도대전에서 대패한 원소가 다시 근거지인 업성으로 돌아오자 주위에서 전풍을 위로했다. “자네 말대로 됐으니 이젠 원소가 자네를 다시 중용할 걸세.” 전풍은 고개를 저었다. “의심 많은 원소가 나를 보면 자존심이 더욱 상해 나를 죽일 겁니다.” 당대 최고의 참모 전풍은 못난 주군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조의 참모였던 사마의(司馬懿)도 조조에게 의심의 대상이었다. 조조는 사마의가 마음속에 ‘큰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신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늘 경계했다. 특히 조조는 사마의가 낭고상(狼顧相)이라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 낭고상은 이리나 늑대처럼 고개를 180도 뒤로 돌릴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반역을 뜻하는 흉한 관상이다.

게다가 조조는 어느 날 밤, 말 세 마리가 나타나 한 구유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꿨는데 매우 불쾌해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 꿈이 사마의 3부자가 위나라를 집어삼키는 것을 예언한 꿈이라고 해석한다. 구유를 뜻하는 조(槽)와 조조의 성씨인 조(曹)가 발음이 같은 데다 세 마리의 말은 사마의와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 3부자에게 공통으로 들어간 말 마(馬)자를 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갈공명이 장수 위연(魏延)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조가 사마의를 바라보던 의구심과 비슷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됐을 때 한중을 지킬 태수를 물색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백전노장 장비를 추천했다. 제갈량이 “위연이 뒷머리에 반골(反骨)이 있습니다. 반대하옵니다”라고 주청했지만 유비는 끝내 위연을 임명했다.


“의심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배반당한다”
위연은 용맹한 장수로 많은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자존심이 지나치고 오만해 많은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승상인 제갈량을 ‘겁쟁이’라고 무시하기까지 했다. 일은 제갈량 사후에 터졌다. 제갈량은 병세가 위독해지자 강유·양의·비의 등을 불러 유언을 했다. “내가 죽으면 철군하라. 혹시 위연이 따르지 않더라도 철수를 결행하라!”

평소 위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양의가 철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자 위연이 반란을 일으켰다. 공명의 예언 그대로였다. 양의와 위연의 군대가 맞붙었다. 이때 양의는 공명이 미리 남겨 놓은 비단 주머니에서 묘책을 발견하고 실행에 옮겼다.

“네 이놈 위연아! 네 놈이 진정 대장부라면 말 위에서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느냐?’라고 세 번만 외쳐 봐라. 그럼 내가 네게 한중성을 바치겠다.”

영문도 모르는 위연이 시키는 대로 외쳤다.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느냐?” 첫 번째 소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내가 너를 죽이겠다!” 공명의 비밀 명령을 받고 위연을 따르는 척하고 있던 마대가 이렇게 외치며 위연의 목을 쳤다. 공명의 의심이 영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손견의 맏아들 손책이 요절하자 손책의 동생 손권에게 후사가 넘어갔다. 손권은 인재를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오나라를 세우고 초대 황제가 됐다.

그러나 성공적인 창업은 건실한 수성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손권은 날로 교만해지고 신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감찰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책임자에 여일(呂壹)을 앉히고 총애했다.

군주가 충신을 의심하고 뒤에서 사찰하는 자를 감싸고도는 나라가 잘될 리 있겠는가. 손권의 신하들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국정에 대한 오판은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다. 손권은 자신의 잘못으로 후계 문제까지 꼬이게 만들어 놓고도 오히려 그 배후에 원로 중신 육손이 있다고 의심하며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오나라가 쇠락하지 않았다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사족: 제갈량이나 조조처럼 결과적으로 볼 때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합리적 의심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근거 없는 편견과 속단으로 상대방을 의심하고 모략한다.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의 영화 ‘다우트(2009년)’는 편견과 속단에 둘러싸인 완고한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 분)가 성당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젊고 활기찬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분)를 밑도 끝도 없이 의심하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을 치밀한 심리묘사와 함께 담담하게 잘 보여준다.

감독은 플린 신부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의심이란 녀석은 확신만큼 강력하고 지속적입니다. 확신이 없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물론 답안은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일어나면서 볼테르의 말이 생각났다. “의심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배반당한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