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얼굴로 새긴 역사의 현장
무거운 입술, 탄탄한 어깨, 검푸른 핏줄로 기억되던 당신의 모습은 어느새 오랜 흑백사진 속에 박제돼 버렸습니다. 아비의 모습을 빼닮은 아들의 시간이 시작되자 당신의 등은 이내 굽어 버렸고 처진 눈꺼풀 아래론 세월의 더께 같은 눈물이 주책없이 맺히곤 합니다.

흘러간 유행가 가사처럼 ‘갈 수 없는 나라’가 돼 버린 당신의 세월.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치욕의 역사를 뒤집었던 광복의 기쁨도, 피붙이를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던 전쟁의 참화도, 폐부를 찔렀던 열사의 기운도 오롯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견뎌냈음을….

아버지, 당신의 세월이 곧 이 땅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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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남침하면서 발발했다. 남과 북이 분단된 이후 막대한 군비를 갖춘 북한의 김일성은 무력 통일을 꿈꿨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북한의 준비된 전쟁은 발발 초기 일방적인 승리를 가져다줬다. 하지만 미국과 뒤이어 16개국의 연합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전세는 1953년 7월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 사령관 사이에 휴전이 조인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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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남북을 합해 사망한 군인은 191만3000명, 민간인은 33만 명에 달했다. 이 밖에 도로와 교통 시설·주택·철도·항만 등 사회 기간 시설들이 대부분 파괴됐고 당시만 해도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남쪽의 환경도 대부분이 황폐화됐다. 산업용 건물의 44%, 시설의 42%가 포연에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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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광부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명분으로 한국 정부는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간호조무사 7900여 명을 파견했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 정책은 반대로 농촌 붕괴 현상을 초래했는데, 그 결과 막대한 실업과 외화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를 위한 대책이 광부와 간호사의 해외 송출이었다. 1963년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지원할 정도로 당시 한국의 실업난은 심각한 상태였다. 3년 계약의 광부들이 받았던 돈은 매월 600마르크(160달러)로 당시 국내 일반적인 임금의 5~6배에 달했다. 일각에선 서독 정부의 주선 아래 코메르츠방크가 1963년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급여를 담보로 1억5000만 마르크의 상업 차관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의 희생이 직간접적으로 당시 지구상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의 경제 발전에 공헌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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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베트남전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4년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한국은 8년간에 걸쳐 국군을 파병했다. 누적 파견 병력은 총 31만2853명에 달한다. 수많은 전투는 한국군의 우수함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됐는데, 무엇보다 경제적 측면에서 거둔 성과를 무시할 수 없다. 상징적인 장면이 바로 ‘브라운 각서’다. 한국은 월남 파병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 발전 지원을 약속 받았다. ‘바이 아메리칸(미국 상품 우선 구입)’ 정책의 완화와 한국 상품의 월남 수출량을 연간 6000만 달러로 한다는 것을 비롯해 한국군이 월남에 주둔하는 한 군원 이관(군사원조 감축)을 계속 중지한다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6개 항목의 합의 외에도 증파하기로 한 추가 병력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예산 부담, 월남 내 각종 사업 참여 같은 합의가 이뤄졌다. 이 밖에 기술자들의 월남 파견을 통한 기술 발달 및 외화 획득도 경제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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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건설 신화
1973년 가을부터 시작된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한국 경제는 1974년부터 극심한 무역수지 적자, 교역 조건 악화, 경기 침체 및 실업 증가 등을 겪게 됐다. 이를 타개한 결정적 계기가 중동 지역 산유국의 건설 붐이었다. 1973년 말 삼환기업이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400만 달러의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시작된 ‘중동 특수’는 1974년 요르단·아부다비, 1975년 바레인·쿠웨이트 등으로 확대됐다. 수주 실적도 1974년 8800만 달러, 1975년 7억5000만 달러, 1976년 24억 달러, 1977년 34억 달러로 폭발적으로 늘었고 1978년에는 약 80억 달러의 건설수주를 기록함으로써 한국은 세계 제일의 건설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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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상봉
이산가족 상봉 방송은 한국방송공사(KBS)가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 총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했던 프로그램이다. 단일 생방송 프로그램으로는 세계 최장 기간 연속 생방송 기록이다. 당시 KBS 내부 인력(아나운서·PD·조연출·음향·조명 스태프 등)과 전화를 받는 대학생 아르바이트까지 합하면 이 기간 동안 동원된 인력만 1000명에 육박한다. 방송 기간 동안 5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여의도를 찾았고 방송에서는 10만952건이 접수됐으며 그중 5만3536건이 방송되고 총 1만187명의 이산가족들이 상봉했다. 생방송은 11월 중순까지 편성됐지만 이후로도 헤어진 가족을 찾으려는 사람이 몰려들어 여의도광장에 설치됐던 ‘만남의 광장’은 이듬해인 1984년 여름까지 유지됐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