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선진국 클럽’ 가입…섣부른 개방 부작용도 맛봐 한국은 1996년 12월 1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Organis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에 가입해 정식 회원국이 됐다. OECD는 1961년 9월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창설된 국제기구로, 1948년 창설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에서 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경제의 부흥을 꾀하던 미국이 본격적으로 마셜 플랜을 도입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기구가 바로 서유럽 16개국 국가들이 결성한 OEEC였다. 1950년대 후반에 들며 서유럽의 경제가 회복되자 더 이상 피원조가 아닌 원조 기구로서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기존 OEEC 회원국과 미국·캐나다 등 총 20개국이 1961년 OECD 설립 협정에 서명했다.
1964년 일본의 가입을 기점으로 비회원국들의 가입이 이어졌는데 1969년에는 핀란드가, 1971년에는 호주가, 1973년에는 뉴질랜드가 새 회원국이 됐다. 사실 한국이 OECD 가입을 요청받은 것은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의 마이클 블루멘탈 재무장관이 한국의 OECD 가입 필요성을 거론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80년 OECD 사무국이 직접 한국과의 경제협의회 개최를 제의해 왔다.
가입 이듬해인 1997년 외환위기 터져
1980년대 들어 고도성장이 이어지자 외국은 이미 한국을 ‘제2의 일본’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한국도 1989년부터 OECD와 여러 협력 사업들을 벌이기 시작했고 1992년에는 ‘1990년대 중반 가입’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이어 1995년 3월 29일 외무부 장관 명의로 가입 신청서를 정식으로 제출했고 1996년 11월 국회 비준을 거쳐 12월 정식 가입서를 프랑스 외무부에 기탁했다.
OECD 회원국으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제 규모나 국민소득을 넘어 정치·역사적 환경과 투명성, 노동권의 보장, 금융자본 자유화, 사회보장 제도의 확립, 경제 발전 잠재력 등을 고루 평가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OECD 가입은 흔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로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 이뤄진 한국의 OECD 가입은 여러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공존했던 것도 사실이다.
OECD 가입은 여러 경제 제도와 규칙을 회원국(선진국) 수준으로 개방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뜻한다. 자본시장의 완전 개방과 자유화, 서비스 시장에 대한 대폭적인 규제 완화 등을 말한다. 실제로 ‘비로소 선진국이 됐다’는 감격도 잠시, 이듬해인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맞으며 국가 경제가 초토화됐다. 이를 두고 준비 안 된 개혁·개방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주장도 힘을 얻는다. 실제로 OECD 가입 직후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겪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1995년 4월 파리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에 OECD 가입을 위한 준비사무소가 개설돼 가입 승인을 주도했는데, 당시 소장을 맡은 이가 김중수 한국은행 전 총재였다.
개요
한국은 1996년 12월 12일 29번째 OECD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가입의 의의나 이점 못지않게 개방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주장도 많았다. 실제로 가입 이듬해인 1997년에는 IMF 외환위기가 터져 국가 경제가 극심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사진은 OECD 가입 당시의 공노명 외무장관.
2.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1997년 말 사상 최악 경제 위기…기업 도산·정리해고 아픔 겪어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정부의 기자회견 시간으로는 이례적으로 매우 늦은 시각이었다. 이날 회견에서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유동성 조절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임 부총리가 임명된 지 불과 이틀 만이었다. 기자회견 직후 미셸 캉드시 IMF 총재에게 전화를 건 임 부총리는 정식으로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가 국내로 점염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던 강경식 전임 경제부총리는 이미 11월 초부터 IMF 구제금융을 결정한 터였고 부총리 경질이 이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기업의 연쇄 도산, 외국자본의 급격한 유출에 따라 한국의 외화보유액은 한때 39억 달러 수준까지 급감해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IMF에서 195억 달러를 긴급 지원받으며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IMF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가 처음 경험한 경제 위기였다. 단순한 위기 수준을 넘어 ‘환란’으로 표현됐을 정도로 경제·정치·사회·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 이후 현대사를 IMF 전과 후로 나눌 정도다.
한보·기아 등 대기업·금융권 줄도산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흉으로 지탄받던 정부는 결국 정권 재창출에 실패해 여야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가장 극심한 타격은 기업들의 연쇄 부도였다. 1996년 우성과 건영 등의 도산을 시작으로, 1997년에는 한보철강·삼미그룹·진로그룹·대농그룹·기아그룹·쌍방울그룹·해태그룹·한라그룹·고려증권·청구그룹·쌍용그룹·동아그룹·아남그룹 등 수많은 재벌 대기업들이 줄도산을 맞았다.
1998년 6월 18일에는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이 55개 기업의 청산·매각 방침을 발표했다. 1999년에는 과도한 기업 확장과 방만 경영으로 대우그룹이 해체됐고 2000년대 들어서도 현대그룹이 계열 분리됐다. 1998년 6월에는 대동·동남·동화·경기·충청은행 등 5개사가 퇴출되면서 국민·주택·신한·한미·하나은행으로 넘어갔다. 관치금융과 부실 경영 결과 이들과 거래하던 수많은 중소기업들도 하루아침에 도산에 빠지고 말았다.
외환위기의 배경으로는 지급준비 정책의 변화, 외화보유액 관리의 실패, 정경유착에 따른 부정 대출, 환율 운용 정책 실패, 금융회사의 부실 등이 꼽히는데, 대외 금융 세력의 공격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국제금융의 ‘큰손’들이 단기 투자금을 일시에 회수해 가면서 중앙은행의 외화보유액을 고갈시키고 이 틈을 타 구제금융을 통한 가혹한 구조조정과 기업 인수를 시도했다는 주장이다.
김영삼 정부 이후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건설 지원과 신용카드 사용 대금의 연말정산 환급 같은 소비 촉진 정책으로 경기 부양에 성공했고 2001년 8월에는 구제금융을 조기에 상환하며 IMF 관리 체제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개요
1997년 12월 3일.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받는다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날이다. 부실기업들의 줄도산, 방만한 경영과 부실 대출이 이뤄졌던 금융사들의 구조조정, 수많은 실업자들을 양산하며 우리 경제사에 가장 큰 아픔을 남겼다. 당시 구제금융 양해각서에 사인하고 있는 임창렬 전 경제부총리.
3. ‘IT 버블’ 붕괴
인터넷 보급으로 전 세계 거품 발생…기술 혁신 촉진 계기도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술은 때론 과한 환상과 장밋빛 거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19세기 철도의 등장으로 불거졌던 철도 버블이 대표적이다. 20세기 초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정보기술(IT) 버블’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용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신문을 읽고 TV를 보고 공통 관심사가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커뮤니티까지 만들 수 있는 환경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에 가까웠다. 인터넷의 보급과 발달로 인류사는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성장의 입구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뛰어오르는 건 당연했다.
1995년에서 2000년까지 미국의 나스닥 지수는 600% 가까이 상승했다. 인터넷 관련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고 기업의 이름 뒤에 ‘닷컴’이란 말이 붙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여겨졌다. 전통적인 제조업은 몰락하고 인터넷과 통신망을 기반으로 한 전혀 새로운 산업사회가 실현될 것으로 여겨졌다.
수많은 ‘닷컴’ 기업들 역사 속으로 사라져
회사 이름 앞에 ‘e’가 붙거나 ‘닷컴(.com)’으로 끝나는 기업들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기업공개(IPO) 때 훨씬 더 쉽게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닷컴 기업의 대표 격인 야후는 1997년 1월 0.76달러에 불과했던 주가가 1999년 말에는 108달러를 넘어섰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에게 돈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투자은행과 벤처개피털리스트들이 별다른 고민 없이 엄청난 금액을 이들 IT 기업에 투자했다.
2000년 3월 10일은 IT 버블의 역사를 새로 쓴 날이다. 이날 나스닥 지수는 장중 5132.52까지 뛰어올랐다. 하지만 곧이어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를 올리며 자금 회수에 나섰고 9·11 테러가 발생했다. 미국 법원이 마이크로소프트(MS)를 독점적 지위 사업자로 지정한 것도 버블에 찬물을 끼얹었다.
IT 기업들의 비즈니스 행태도 버블 붕괴를 촉발했다.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매우 간단했는데, 무료 서비스를 통해 가입자를 끌어들인 후 이들을 통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보유하게 되면 그때부터 광고나 유료화 등의 수익 모델을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명확한 수익 모델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 번 꺼지기 시작한 거품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나스닥 지수는 2002년 10월 9일 1114.11로 최고점 대비 80% 폭락했다. 허공으로 사라진 시가총액만 5조 달러에 달했다. 한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2000년 초 1조 원을 넘겼던 코스닥 IT 기업들의 가치는 2000년 말 들어 1000억 원대 이하로 푹 꺼졌다. 고점의 10% 수준이었다. 진승현·이용호 게이트 등 악의적인 수법으로 벤처기업을 인수해 증권시장을 교란했던 게이트까지 터지면서 시장은 더욱 위축됐다.
거품은 꺼졌지만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당시 살아남은 구글·아마존 등은 지금도 기술 혁신을 이끌고 있다. 인터넷 보급을 가능하게 했던 인프라 역시 여전히 건재하다. 테슬라를 창업한 엘론 머스크, 야후 창업자 제리 양, 이베이 설립자 피에르 오미디아르 등도 모두 버블이 탄생시킨 IT 거목들이다.
개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쳤던 인터넷 열풍과 이에 따른 경제·산업의 거품 붕괴를 말한다. 닷컴 붐에 따라 ‘e’로 시작되는 수많은 기업을 등장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거품이 꺼지며 도산했다.
4. 대중 수출, 대미 수출 추월
중국, 2003년 최대 수출국 부상…지나친 대중 의존 지적도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떠오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2003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이 한국의 최대 수출국이 됐다’는 뉴스는 기존의 경제관념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계기가 됐다.
2001년까지만 해도 한국의 주요 교역국 중 수출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이 312억 달러로 1위였다. 유럽연합(EU)이 196억 달러로 2위, 중국이 181억 달러로 3위, 일본이 165억 달러로 4위, 아세안이 164억 달러로 5위를 차지했다. 이런 추세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들어서다. 그해 대중국 수출액은 237억 달러를 기록하며 전통의 2위였던 EU를 처음 따돌렸다. 급기야 이듬해인 2003년에는 351억 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해 342억 달러에 그친 미국을 제치며 수출 1위 교역국으로 올라섰다. 2001년에 전년 동기 대비 마이너스 1.4%에 그쳤던 수출 증가율은 2002년 30.6%로, 2003년에는 47.8%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기록했다.
수교 20년 만에 무역 규모 40배 늘어
한국과 중국의 교역 규모는 2003년 이후에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1992년 양국 수교 당시 26억 달러에 불과했던 대중 수출액은 2006년 694억 달러, 2008년 913억 달러, 2011년 1341억 달러를 넘었고 2013년에는 2500억 달러를 기록했다. 20년 사이 40배 가까운 규모로 성장한 것이다.
한국이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무역수지도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해 대중 무역 흑자는 469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자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에도 한국은 주요한 교역 상대국이다. 2013년 중국과 일본의 무역 규모는 2012년 대비 6.2% 감소한 2840억 달러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향후 3년 내에 한중 무역 규모가 중일 무역 규모를 제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4대 교역국은 미국·홍콩·일본·한국·대만순이다.
중국의 성장을 통해 한국 경제가 비약적 발전을 이룩한 것도 사실이다. 최근 체결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과 위안화 직거래 시장 개설 등 대중 무역 활성화를 위한 조치도 연이어 시행되고 있다.
다만 중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말 ‘중국 경제구조 변화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중국 경제구조 변화가 한국 경제 성장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진단했다. 보고서는 중국으로 수출되는 중간재의 3분의 2가량이 중국의 최종 수요에 연결돼 대중국 수출의 70% 이상이 중국 경제 둔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고 분석했다. 중국 수출의 대부분이 중간재 위주여서 한국 경제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이 적을 것이라는 인식과는 반대다. 중국은 지난해 7.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24년 만에 최저치다. 최근 중국은 중성장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향후 경제구조를 투자 중심에서 소비 중심으로 바꿀 전망이다. KDI는 중국의 성장률이 1% 하락하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최대 0.17% 떨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개요
2003년 한국의 대중 수출액이 대미 수출액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중국과의 교역 규모는 이후 꾸준히 상승했고 이미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자 교역국이 됐다. 지난해 대중 무역 흑자 규모는 469억 달러를 기록했다.
5. 주5일 근무제 시행
2004년 진통 끝에 처음 시행…도입 10년 만에 재개정 움직임
법정 근로시간을 1주일에 40시간으로 단축한 주5일 근무제는 2004년 7월 처음 시행됐다. 요즘이야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일요일 주말에 쉬는 것이 당연시되지만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기까지는 그야말로 지난한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주5일 근무제가 처음 공론화된 것은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 들어서였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선거공약 사항으로 주5일 근무제를 들고나온 것이다. 이어 1998년 2월 6일 제1기 노사정위원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근로시간 단축 문제를 다루기 위한 근로시간위원회 구성을 합의하게 된다. 노사정위원회 근로시간단축특별위원회는 2000년 5월 17일 구성됐고 2000년 10월 23일 근로시간 단축과 관련한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 2000년 5월에는 당시 최선정 노동부 장관이 “법정 근로시간을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하도록 근로기준법을 개정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법정 근로시간 40시간으로
이후 근로시간단축특별위원회가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 벌인 회의는 100여 차례에 달했다. 하지만 여전히 임금 보전, 법정 휴일 단축 등에 대한 노사 간 주장이 엇갈리며 접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급기야 2002년 7월 최종 합의가 결렬됐고 그간의 논의 결과를 정부로 이송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0여 차례의 관계 장관 회의를 거쳐 정부 입법안을 단독으로 마련했다.
하지만 2002년 10월 국무회의를 통해 정한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노사 양측이 모두 반대하면서 국회 법안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다가 2003년 8월 29일에야 국회에서 통과됐다. 법정 근로시간을 40시간으로 규정한 정부 개정안은 시행 시기가 1년 미뤄지는 진통 끝에 2004년 7월 처음으로 시행되기에 이른다.
재계는 “줄어든 근로시간 때문에 인건비 부담이 늘어 망하는 기업이 속출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고 노동계 역시 “근로시간을 단축해도 임금 삭감은 안 된다”며 배수진을 치고 반대에 나섰다. 3년이나 홍역을 치르며 제도가 확정됐지만 사실 외국에선 이미 오래전에 주5일 근무제가 정착돼 있던 상황이었다. 1963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주2일 휴무, 주 40시간 근로’를 총회 권고 사항으로 채택하며 빠른 속도로 제도가 확산됐다. 중국마저 내수 진작과 고용 증대를 위해 1995년부터 주5일 근무제를 민간 부문까지 확대했고 일본은 1999년에 완전히 정착됐다. 미국은 일찍이 대공황 이후인 1938년부터 주5일 근무제를 시행했다.
지난해부터 주5일 근무제 시행 10년 만에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논의가 정치권을 중심으로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한국은 주 40시간을 기본으로, 당사자 합의 시 주당 최대 12시간 연장 근로를 허용하고 주말 휴일 근로가 16시간까지 가능해 최대 근로시간은 68시간이다. 이를 주 52시간으로 줄이자는 논의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의 근로자들은 가장 긴 시간 동안 일한다. 2012년 기준으로 OECD 평균에 비해 420시간이나 많다.
개요
김대중 정부의 선거공약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해 2004년 7월부터 시행됐다. 임금 삭감을 반대하는 노동계의 주장과 인건비 상승을 우려하는 재계의 주장이 엇갈리며 진통 끝에 시행됐다. 현재도 한국 근로자들의 근로시간은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6. 아파트 값 폭등
2006년 아파트 값 천정부지로 치솟아…판교 분양 열풍 한몫 부동산 거품은 2006년에 정점을 찍었다. 아파트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유례없는 상승률을 기록했고 아파트 거래량도 역대 최대치를 달성했다. 당시 아파트는 사 두면 가격이 오르는 ‘보물’ 그 자체였다.
부동산 정보 업체 닥터아파트에 따르면 2006년 한 해 동안 서울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년 대비 24.1%, 수도권 지역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년 대비 29.2% 급등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당시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로 꼽혔던 강남 삼성동 아이파크 182㎡의 매매가는 최고 32억 원에 달했다. 2001년 해당 아파트의 최초 분양가가 7억 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불과 5년 만에 25억 원의 차익이 발생한 셈이다.
이 같은 아파트 값 폭등의 중심에는 ‘판교신도시 분양 열풍’이 자리했다. 당시 제2기 신도시의 핵심으로 꼽히며 주목받기 시작한 판교신도시는 2006년 3월 분양에 나섰다. 결과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46만7000명의 인파가 몰리며 1순위 청약에서만 최고 2074 대 1, 평균 49 대 1의 청약 경쟁률을 보이며 화제가 됐다. 판교신도시는 입주 후 분양가의 2배 가까이 아파트 가격이 오르며 최고의 부촌으로 각광 받았다.
‘버블 세븐’의 탄생…‘하우스 푸어’ 양산으로 이어져
‘판교 로또’라고 불린 판교신도시의 분양 성공은 인근 지역 아파트에 대한 관심도 끌어올렸다. 실제로 판교신도시 이후 분양된 파주 운정신도시와 은평뉴타운의 고분양가 책정과 투기 조장에도 영향을 미치며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2006년 5월 정부는 강남·서초·목동·분당·평촌·용인 등을 이른바 ‘버블 세븐’ 지역으로 지정해 각종 규제를 강화했다. 이들 지역이 아파트 가격 폭등을 주도하고 투기를 부추겼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후 오히려 버블 세븐 지역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고 해당 지역은 가장 투자하기 좋은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버블 세븐 지역에서 제외돼 서운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한 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당시 강남과 목동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에 대해서는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면서 “실제로 평촌과 용인 등은 버블 세븐 지역에 포함되면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본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용산·동작·과천 등 버블 세븐 지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주변 지역의 아파트 값 상승도 버블 세븐의 부작용 중 하나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아파트 값에 서민들의 한숨 소리는 커져만 갔다. 월급날만 기다리는 평범한 샐러리맨들은 내 집 마련의 꿈을 버려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서민들의 불안 심리가 가중됨에 따라 전셋값도 상승했고 이는 또다시 집값 상승을 부추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받아 보금자리를 마련한 일부 서민들도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집값이 하락세로 접어들면서 깊은 좌절감을 맛봤다. 은행 빚을 갚지 못해 힘들게 장만한 집을 경매에 넘기는 이들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바로 ‘하우스 푸어’의 탄생이다.
개요
2006년 상반기 판교신도시 분양 대박 소식에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파트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정부는 ‘버블 세븐’ 지역을 지정하는 등 돌파구를 모색했다. 하지만 아파트 값 상승세는 인근 지역으로까지 확산되며 서민들은 ‘하우스 푸어’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7. 한미 FTA 타결
2007년 4월 서울에서 협상 마무리…독소 조항 논란도
2007년 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됐다. 한국과 미국의 무역 및 투자를 자유화하고 확대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독소 조항 등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빗발치며 ‘현대판 강화도조약’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미 FTA가 처음 논의된 것은 2005년이다. 한미 양국은 세 차례의 실무 점검 회의와 여섯 차례의 통상장관 회담 끝에 2006년 2월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협상 분야는 상품, 농산물, 무역 구제, 서비스·투자, 지식재산권, 경쟁, 노동, 환경 등 무역과 관련된 총 19개 분야로 구분했다. 이후 1년 2개월간 진행된 협상은 2007년 4월 2일 서울에서 열린 마지막 회의에서 타결됐다.
일단 정부는 한미 FTA가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의 무역에서 수출입 한도와 관세를 없애 문턱을 낮춘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당장 수출에 청신호가 켜질 것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다. 또한 정부는 국내시장에 대한 해외 자본 투자가 증가함에 따라 일자리 증가를 비롯해 국내 경제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한 정부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한미 FTA 체결이 한국과 미국의 동맹 관계에 개선을 가져올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도 내놨다.
야당 반대로 2011년 비준안 국회 통과
하지만 한미 FTA 협상 타결 전부터 시작된 반대의 목소리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반대 집회와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끊이지 않았고 이는 결국 극단적인 사고로 이어졌다. 한미 FTA 타결 하루 전날인 2007년 4월 1일 택시 노동자 허세욱 씨가 회담 장소인 호텔 앞에서 “한미FTA 즉각 중단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것이다. 그는 4월 15일 운명했다.
당시 야당과 시민 단체들은 한미 FTA를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한미 FTA가 우리 사회에 양극화와 사회적 격차, 계층간·세대간의 갈등을 더욱 격화시킬 것”이라고 요약했다. 특히 한미 FTA에 포함된 ‘투자자·국가소송제(ISD)’ 조항에 대해서는 독소 조항의 여지가 있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ISD는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국 정부정책 등으로 손실을 봤을 때 국제중재 기구에 제소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다.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 등 경제적 약자를 배려해 만든 다양한 법규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게 반대 측의 주장이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4월 정부는 “한미 FTA에서 ISD의 전면적 폐기나 삭제, 핵심 조항 개정은 국제사회 추세나 정부의 기본 입장과 배치된다”며 수정 불가 방침을 밝혔다.
앞서 말했듯이 한미 FTA는 2007년 타결됐지만 야당의 거센 반대로 비준동의안이 2011년 통과됐고 2012년 3월에서야 발효됐다. 협상 타결 이후 발효까지 무려 5년이 걸렸다. 한편 한미 FTA 비준동의안이 통과된 2011년 11월 22일 국회에서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비준동의안 통과를 반대하던 김선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뜨린 뒤 정의화 당시 부의장에게 최루 가루를 뿌린 것이다. 김 의원은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
개요
한국과 미국의 무역 및 투자를 확대하기 위한 한미 FTA가 우여곡절 끝에 2007년 4월 타결됐다. 하지만 독소 조항 비판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5년 후인 2012년 비로소 발효됐다.
8. 미국 금융 위기
2008년 미국 금융시장 붕괴…글로벌 위기로 일파만파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촉발된 미국 금융 위기가 2008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본격화됐다.
시간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정부는 경기 부양책으로 저금리 정책을 펼쳤다. 주택 융자 금리가 인하되자 부동산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너도나도 낮은 금리로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사기 시작한 것이다.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면서 집값이 꾸준히 상승했다. 이에 따라 신용 등급이 낮은 서민들도 집을 구매하기 위해 나섰고 모기지론 대출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비중을 확대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신용 등급이 일정 기준 이하인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주택 담보대출로, 부실 위험이 큰 만큼 일반 프라임 등급보다 금리가 2~4% 높았다.비극은 2004년 미국 정부가 저금리 정책을 종료하면서 시작됐다. 이자 부담이 커지자 집을 사려는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부동산 버블이 사라지며 집값이 하락했고 저소득층 대출자들은 원리금을 제대로 갚지 못하게 됐다. 또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기반한 파생 상품에 투자한 금융회사들도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대규모 손실을 피할 수 없었다.
미국 금융 위기 쓰나미, 세계로 확산
대형 금융사와 증권회사의 파산이 줄을 이었다. 2007년 4월 미국 2위 모기지 대출 업체 뉴센추리파이낸셜이 파산 신청을 냈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10위권 업체인 홈 모기지 인베스트먼트(AHMI)가 파산 신청을 하면서 서브프라임 연체율 상승을 부채질했다. 이것이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부채로 가득 찬 풍선이 결국 터져 버린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가 발생한 2007~2008년 미국의 가계 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96~98%, 기업 부채는 75~77%에 달했다.
2008년 9월 미국 국채 시장의 주요 딜러로 자산 규모가 6000억 달러 이상이었던 리먼브러더스마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 파산이었다.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가 본격화됐다.
먼저 주택저당증권(MBS)과 부채담보부증권(CDO) 등 미국 모기지 채권에 직접 투자한 서유럽 등의 금융회사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와 함께 미국의 투자 자금 회수에 따라 해외 자본 의존도가 높은 신흥국들의 통화가치도 폭락했다.
이 같은 글로벌 위기에 세계 각국은 대규모 재정 진작과 통화 팽창 정책을 통해 돌파구를 모색했다. 특히 2008년 하반기와 2009년 상반기를 전후해 선진국의 중앙은행들은 신속하게 정책 금리를 낮추고 신용 공급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미 중앙은행(Fed)도 연방준비자금 금리 인하에 이어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중에 자금을 풀었다. 이른바 양적 완화(QE) 정책이다. 지난해 10월까지 세 차례 이어진 양적 완화 정책은 실물 경기를 부양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다.
개요
2008년 9월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미국의 금융 위기가 본격화됐다. 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9. 삼성전자, 스마트폰 1위
애플 제치고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정복…‘갤럭시 S’ 효과
삼성전자는 2011년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의 왕좌에 올랐다.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점유율 19.9%를 기록하며 경쟁사 애플을 제치고 최초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 같은 스마트폰 시장의 선전에 힘입어 같은 해 4분기 삼성전자의 매출은 47조 원, 영업이익은 5조2000억 원을 기록했다. 분기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역대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사실 삼성전자는 불과 1년 전인 2010년 초까지만 해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하며 전전긍긍했다. 2010년 1분기 삼성전자 스마트폰 판매량은 270만 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프리미엄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를 출시하며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첫째 모델인 갤럭시 S(4인치)는 2010년 6월 출시 이후 7개월 만에 판매량 1000만 대를 돌파했고 2011년까지 약 2000만 대를 판매했다. 이어 삼성전자는 2011년 보다 큰 화면과 성능으로 무장한 후속 모델 ‘갤럭시 S2(4.28인치)’를 출시하며 승부수를 걸었고 같은 해 3분기 처음으로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삼성전자 위기설…中 샤오미 추격 거세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대다수 전문가들조차 갤럭시 S 시리즈의 큰 화면이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도 생전에 화면이 커진 갤럭시 S 시리즈를 ‘허머(대형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에 비유하며 한손으로 사용하기 불편해 사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잡스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삼성전자가 2012년 출시한 갤럭시 S3는 4.8인치 대화면을 내세우며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처음으로 점유율 30%를 돌파했다. 또 이듬해인 2013년 갤럭시 S4(5인치)를 선보이며 점유율 32.3%를 기록했고 갤럭시 S5(5.1인치)를 내놓은 최근까지도 스마트폰 1위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에도 글로벌 스마트폰 점유율 1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점유율은 28%를 기록하며 전년 대비 4.5% 포인트 하락했다. 원인은 크게 2가지로 요약된다. 그동안 4인치 이하의 화면 크기를 고수해 온 애플이 잡스 사망 이후 화면이 커진 아이폰 5(4.7인치)와 아이폰 6(4.7인치), 아이폰 6플러스(5.5인치) 등을 잇달아 출시하며 반격에 나섰고 혜성처럼 등장한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 샤오미가 단숨에 중국 시장점유율 1위와 글로벌 시장 3위 자리를 꿰찼다. 특히 샤오미의 돌풍이 무섭다. 샤오미의 무기는 가격 경쟁력이다. 현재 샤오미의 저가 스마트폰 판매가는 300달러(32만5590원) 미만인 반면 삼성전자의 갤럭시 S5는 650달러(70만5445원) 수준이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올해도 삼성전자의 글로벌 스마트폰 점유율이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난 1월 21일 시장조사 업체인 트렌드포스는 올해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26.6%로 지난해보다 1.4% 포인트 낮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저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점유율 반등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위기에 처한 삼성전자가 어떠한 해법을 제시할지 이목이 집중된다.
개요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던 삼성전자가 갤럭시 S 시리즈를 앞세워 2011년 점유율 1위 자리에 올랐다. 최근까지도 왕좌를 굳건히 하고 있는 가운데 스마트폰 명가 애플과 저가 폰 돌풍의 주역 샤오미의 추격이 거세다.
10. 유가 폭락, 치킨게임의 서막
OPEC vs 미국…‘3차 오일 전쟁’ 최후 승자는
2014년 미국과 중동 산유국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전쟁은 치킨게임 양상으로 번지며 국제 유가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가 폭락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어느새 유가는 반 토막이 나 버렸다.
국제 유가는 지난해 1년간 50% 가까이 급락했다. 실제로 6월 배럴당 평균 108달러였던 두바이유 가격은 지난해 12월 평균 60.2달러까지 떨어졌다.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량 증가와 중국의 수요가 둔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생산 규모를 유지하기로 한 것이 국제 유가 급락을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OPEC는 지난해 11월 2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각료 회담에서 원유 가격 하락세를 막기 위해 5% 감산을 논의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반대로 합의에 실패했다. 낮은 유가를 유지해 셰일오일로 글로벌 원유 시장에서 영향력이 급부상하고 있는 미국을 견제하겠다는 게 사우디의 의도였다. 당시 알리 살라 알-오마이르 쿠웨이트 석유장관은 “배럴당 100달러든, 80달러든, 60달러든 어떤 시장가격도 받아들이겠다”고 강조했다.
치킨게임, 그 중심에 선 ‘미국’
이에 따라 시작된 ‘3차 오일 전쟁’은 2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후폭풍도 거세다. 일단 OPEC 회원국 중 상대적으로 가난한 회원국들이 심각한 직격탄을 맞았다. 특히 베네수엘라는 심각한 재정 압박에 국가 부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국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있다. 유가 폭락에 이미 몇몇 셰일 에너지 회사가 생산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셰일 에너지 회사들의 평균적인 손익분기점은 45달러 선이다. 국제 유가가 그 이하로 떨어질 경우 생산을 포기하지 않으면 파산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 패권을 두고 벌어지는 치킨게임의 중심에는 ‘셰일오일’을 등에 업은 미국이 있다. 진흙이 오래 시간 쌓여 굳어진 셰일 암석층에 녹아 있는 기름인 셰일오일은 시추 과정에서 비용이 많이 들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셰일오일은 1990년대 중반 미국의 석유 재벌 조지 미첼이 새로운 시추 방법인 ‘수압 파쇄(fracking)’ 기법을 개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6년 하루 평균 생산량이 31만 배럴에 불과했던 셰일오일은 2013년 들어 348만 배럴로 급증했다. EIA에 따르면 미국의 셰일오일 매장량은 580억 배럴에 달한다. 러시아(750억 배럴)에 이어 세계 2위다.
셰일오일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2005년 26.4%에 달했던 미국의 석유 수입 비중은 지난해 17.3%로 급감했다. 에너지 수입국에서 공급국으로 탈바꿈한 미국은 어느새 최대 산유국 사우디의 지위까지 위협하고 있다. 실제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앞으로 2~3년 안에 미국이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1위 산유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OPEC의 리더 격인 사우디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점차 극으로 치닫고 있는 치킨게임은 누가 더 싼값에 원유를 공급할 수 있느냐가 관전 포인트다.
개요
에너지 패권을 둘러싼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미국의 ‘3차 오일 전쟁’이 시작됐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치킨게임 속에서 국제 유가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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