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트라우마…뇌과학으로 ‘감정 기억’을 치료하다

두뇌에도 임플란트 시술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작고 여린 존재일지 모르지만 인체 내부에서 작동하는 생명의 신비는 아직도 까마득한 연구의 대상이다. 그 가운데서도 모든 감각과 사고, 감정의 중심인 두뇌와 여기에 연결된 신경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도전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뇌 연구를 인류의 ‘마지막 프런티어 과제’라고 선언하고 뇌지도 작성 사업에 10년에 걸쳐 45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것만 봐도 가히 21세기 아폴로 계획이라고 부르는 데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두뇌에서 많은 관심이 가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의 ‘기억(memory)’이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기억을 안게 되고 일부는 금세 망각의 늪에 던져 버리고 말지만 또 어떤 기억은 아주 깊은 상처로 남아 평생을 두고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리면 다시 평생의 기억을 덧없이 잃어버리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담과 고통을 안기기도 한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흐뭇한 기억을 많이 쌓고 마지막까지 건강한 기억 능력을 갖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만한 행복 또한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많은 뇌과학자들은 상처받고 쇠퇴해 가는 인간의 기억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 골몰해 왔다. 이빨이 썩고 망가지면 일부를 도려내고 다른 물질로 채워 넣거나 아예 뽑아낸 뒤 인공치아 임플란트 시술을 한다. 그렇다면 손상되고 잃어버린 기억에도 이런 시술을 할 수는 없을까.

사람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떠올릴 때마다 불쾌하고 몸서리쳐지는 기억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치과에서 치료를 받다가 신경을 잘못 건드려 엄청난 통증을 느꼈던 사람들은 치과의 시술 의자나 마스크를 쓴 의사의 모습만 떠올려도 그때의 충격이 떠오르곤 한다. 그게 심해지면 치과용 의료 기기가 아닌 여느 그라인더의 ‘왱~’하는 작동음만 들어도 그때의 아픔을 연상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두뇌 보철’로 기억 바꾼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원인은 근본적으로 당시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억과 그때 느꼈던 감정에 대한 기억이 한 맥락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 상태에 대한 기억을 감정 기억(emotional memory)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실 기억과 감정 기억은 상승작용을 일으키고는 한다. 사람의 일반적인 단기 기억들은 시간이 2~3일만 지나도 대부분이 고착되지 못하고 두뇌에서 깨끗하게 정리돼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어떤 맥락을 갖고 강한 감정과 연관된 사실은 장기 기억으로 각인돼 두뇌 깊숙이 잠재될 수도 있다. 아프고 충격적인 기억을 잊으려고 애를 쓰고 자꾸 되새겨 보다가 역설적으로 더 또렷하게 아로새겨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참선을 중시하는 수도자와 승려들에서부터 현대의 심리학자에 이르기까지 경험적으로 이런 악순환은 계속 인식해 왔다. 고요한 환경에서 기억을 끄집어내되 그 속에서 아픔과 증오를 내려놓으라고 계속 수련시키는 명상 훈련은 바로 이러한 사실과 감정에 대한 기억을 분리하려는 노력이다. 그 사실과 연관된 감정 기억을 다른 온건한 감정으로 조금씩 대체함으로써 사실 기억이 갖는 고통이 완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방법이 아니다. 모두가 속세와 연을 끊고 출가하는 극단적인 환경 변화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현상의 메커니즘이 보다 과학적으로 규명되고 하나의 정교한 치료법으로 발전하고 있다. 사람의 아픈 기억은 매번 고정된 게 아니다. 기억의 심연에서 한 번 떠올리면 잠시 뒤에 금세 변형된 형태로 우리 두뇌의 신경세포 네트워크 속에 다시 쓰인다. 2010년에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뉴욕대 연구진의 논문에 따르면 바로 이 회상에서 재기록으로 이어지는 틈에 새로운 감정 기억을 끼워 넣을 기회가 생긴다는 게 입증됐다. 이러한 현상이 과거 실험용 생쥐의 단순 반복적인 행동의 기억에 대해서는 관찰된 바 있지만 인간의 뇌도 이러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이를 이용해 뇌과학자들은 과거의 나쁜 기억이 회상되는 순간에 우리의 두뇌 연상 작용에 개입해 다른 감정 기억을 연관시키는 보다 정교한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등 우리의 두뇌 활동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장치들을 이용해 기억의 흐름을 모니터링하고 있다가 적절한 다른 연상 자극을 집어넣어 조금씩 우리 두뇌 속 감정 기억을 떼어내는 것이다. 아직은 이러한 시술이 실용화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썩은 이빨 부분을 도려내고 금·아말감·레진을 채워 넣듯이 기억도 그렇게 치료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기억의 영구 손상 치료 기술 개발
여기에 더해 최근 활발히 전개되는 정보기술(IT) 발달은 두뇌의 손상된 기억을 아예 소형 칩이나 전자기기로 대체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이미 인공신경망 등 두뇌의 신경세포의 복잡한 인지 작용을 모방하는 기술은 가장 ‘핫’한 토픽이 된 상태다. 구글 등 인공지능 기술의 첨단을 달리는 기업에서 많은 투자를 기울이는 ‘딥러닝(deep learning)’ 기술도 인공신경망을 한층 다층화·정교화한 것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복잡한 두뇌 신경세포의 연산을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구현하는 데서 더 나아가 아예 하드웨어, 즉 마이크로칩 자체의 구조를 신경세포처럼 만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신경 모방(neuromorphic) 칩인데, 여러 연구 기관은 물론 퀄컴·IBM과 같은 전통적인 업체들도 이런 칩 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퀄컴은 향후 모바일 디바이스에 더 빠른 인지 기능을 집어넣을 수 있는 상용 칩 개발을 목표로 제로 프로그램(Zeroth Program)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다. IBM과 HRL 랩은 국방부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지원을 받아 공동으로 1억 달러짜리 신경 모방 칩 개발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신경 모방 칩은 당장은 전자기기에 탑재될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칩을 두뇌에 이식하는 방향으로 갈 것으로 전망된다. 두뇌 속에 신경회로가 크게 손상돼 기억의 회상·각인이 모두 어려워지면 손상된 부분을 대체하는 용도로 이용하는 것이다. 두뇌 속의 제대로 기능하는 부분에서 손상된 부분으로 가는 신경세포의 회로를 떼어내 신경 모방 칩을 그 대신 연결하는 시술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망가져 더 이상 씹는 기능을 할 수 없는 치아를 뽑아내고 단단한 인공 치아를 박아 넣는 임플란트 시술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를 흔히 기억 임플란트 기술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는 치아 임플란트 시술이 보편화되면서 먹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고통을 겪던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되찾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구 고령화로 치매·알츠하이머병 등 영구적인 손상에 봉착하는 인구가 많아지는 지금 이런 기술이야말로 죽는 날까지의 웰빙을 위해 아주 긴요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근 연구되고 있는 신경 모방 칩 응용 기술들은 단순한 기능의 대체를 넘어 무슨 이유에선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두뇌 기능을 다시 회복시키는 가능성도 열어주고 있다. 유전적 결함이나 후천적인 충격으로 인지 장애를 갖고 있는 환자들은 두뇌 기능이 아예 손상된 것이 아니라 이 부분으로 가는 회로가 끊어지거나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생긴 문제인 경우도 있다. 이때 이렇게 끊어진 부분을 서로 연결해 주고 적절한 자극을 넣어 주는 용도의 신경 모방 칩 이용 기기를 장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기기가 점점 두뇌에 자극을 주면서 본연의 기능을 항진해 준다면 지금까지 방치되던 여러 인지 장애가 있는 환자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이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일반인들이 이러한 모든 치료를 손쉽게 받을 날이 오기까지는 아직 축적돼야 할 지식이 산더미 같이 많다. 그렇더라도 인류는 항상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던 난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개척함으로써 지금까지 발전해 왔다. 아직 멀어 보이는 기억 보철, 기억 임플란트 기술이 수십 년 뒤 우리가 수혜자가 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