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화에서 전문화로…될성부른 인재 발탁해 ‘창업 DNA’ 이식 나서

벤처 업계 전설들, 멘토로 돌아오다
1월 14일 선릉역 인근 APEX빌딩 10층, 한 회의실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여성 한 명을 중심으로 5명의 남성이 원을 그리고 서 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여성은 동영상 자막 서비스 ‘비키’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빙글’의 공동 창업자인 문지원 대표다. 창업을 앞두고 있는 청년들과 함께 비즈니스 모델을 연구하는 중이다. 같은 시각 한 층 위 11층 사무실에선 문 대표의 남편 호창성 대표가 일대일 멘토링을 하고 있었다.


미완의 스타트업에 길잡이 역할
두 대표는 20년간 ‘글로벌 창업’으로 성공한 부부 창업가다. 2013년 비키를 일본 전자상거래 업체 라쿠텐에 2억 달러에 매각해 화제를 모았다. 이 부부는 지난해 1월 액셀러레이터 ‘더벤처스’를 설립했다. 창업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고 함께 성장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초기 소액 투자인 시드 단계(5000만~1억5000만 원)의 투자와 함께 밀착 멘토링을 진행한다. 각자의 강점을 살려 호 대표는 투자에, 문 대표는 서비스 모델 개발에 좀 더 비중을 둔다. 대표 외에도 회사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경력 10년 이상의 업계 베테랑들이다. 모건스탠리 출신의 인수·합병(M&A) 전문가, 미국 유명 액셀러레이터 테크스타 출신 등이 모여 있다.

최근 벤처 생태계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멘토로 돌아온 선배들’이다. 1990년대 후반 창업해 성공을 거둔 ‘벤처 1세대’를 비롯해 2000년대 이후 벤처 성공 신화를 쓴 업계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주로 초기 벤처인 스타트업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호 대표는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원석을 발견해 100배의 성과를 내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엔젤 투자자로서 투자에 나서는 한편 자신의 ‘창업 DNA’를 전수한다. 이는 과거 벤처 붐에 비해 확실히 달라진 풍경이다. 창업 생태계의 한 축을 형성하며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벤처 투자는 크게 개인에 해당하는 엔 젤 투자자와 기관인 벤처캐피털(VC)로 구분된다. 특히 VC는 소수 포트폴리오에 큰 단위로 투자하는 게 특징이다. 이미 비즈니스 모델이 검증된 후기 벤처에 투자가 몰리고 스타트업들은 상대적으로 투자를 받기 어렵다. 창업가 출신 선배들이 극초기 벤처에 주목하는 이유는 투자 기회의 문을 넓히는 동시에 일종의 ‘과외 효과’가 확실해서다.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결정적인 ‘한 방’이 있다면 노하우를 덧입혀 제2의 네이버·넥슨을 만들 수 있다. 초기 벤처일수록 시장 전략, 경영관리, 네트워크 등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창업 경험이 있는 선배들의 조언이 절실하다. 그만큼 변화는 확실하다. 실전 창업의 A to Z를 경험한 선배의 눈으로 ‘미완의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길잡이’ 역할을 하면서 더 큰 투자(VC의 시리즈 A·B 투자 및 해외투자)를 이끈다. 최근 트렌드인 ‘해외 진출’에도 적극 나선다.

이런 분위기를 형성한 선구자들은 성공적으로 엑시트(투자회사)를 한 벤처 전설들이다. 번 돈을 다시 후배 기업에 재투자하는 엔젤 투자자로 변신, 2010년을 전후로 전문 투자사와 액셀러레이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김범수 다음카카오 의장은 2008년 NHN(네이버)을 떠나면서 ‘100인의 최고경영자(CEO) 양성’의 꿈을 선포했다. 옛 카카오의 이제범 공동대표는 김 의장이 배출한 첫째 CEO다. 김 의장은 본격적인 후배 양성을 위해 2012년 스타트업 전문 벤처캐피털 케이큐브벤처스를 설립하고 웹·모바일 및 기술 기반 스타트업에 148억 원을 투자했다. 그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올해 1월엔 다음카카오가 1000억 원을 출자해 벤처 투자 전문 회사 ‘케이벤처그룹’이 설립된다.

장병규 네오위즈 공동 창업자가 설립한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를 비롯해 이택경·이재웅 다음 공동 창업자, 권도균 이니시스 창업자, 송영길 이머신즈 창업자, 장병규 대표 등이 의기투합해 만든 ‘프라이머’ 등도 유명하다. 벤처 ‘선순환 구조’라는 새로운 ‘판’을 만들었다. 일례로 장병규 대표는 네오위즈 이후 2005년에는 국산 검색 엔진 ‘첫눈’을 만들어 네이버에 매각했고 2007년에는 ‘블루홀스튜디오’라는 게임 회사를 만들어 ‘테라’라는 히트작을 냈다. 엔젤 투자자 변신 이후 2011년 엔써즈의 KT 매각, 2012년 틱톡의 SK플래닛 매각 등을 이끌어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재능·아이디어에 과감하게 투자
후배 양성이라는 대의뿐만 아니라 재능과 아이디어에 과감히 투자하고 ‘대박’을 기대할 수 있는 실리도 달성한다. 초기 투자 형태의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밀착 멘토링을 할수록 지분을 더 많이 갖는 구조다.

선배 엔젤 투자자는 초기 본업을 유지하면서 알음알음 소액 투자하는 형태로 존재했다. 이어 성공 모델이 하나 둘 나오면서 점차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고벤처 포럼’, ‘패스트트랙아시아’. ‘프라이머’ 등 엔젤 투자자들이 모여 네트워킹의 장을 열고 시스템을 도입했다. 점차 성공 노하우가 쌓이면서 최근엔 다양화·전문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여러 명의 파트너 형태에서 각 멘토의 전문 분야에 특화된 독립 법인으로 분화되는 추세다. 프라이머는 초기 8명의 파운더(설립자)의 모임이었다가 해를 거듭해 하나둘 독립, 현재는 권도균 대표가 혼자 이끌고 있다. 전문화된 동시에 ‘연합’ 또한 활발하다. 각각 회사의 파운더로 존재하면서 서로의 어드바이저로 활동하며 의견을 교류하고 공동투자하기도 한다.

멘토는 곧 ‘브랜드’가 된다. 업계 스타이기 때문에 사람과 자금이 몰린다. 빠른 시간에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형태는 다양하다. 액셀러레이터, 미디어 액셀러레이터, 인큐베이터, 컴퍼니 빌딩 컴퍼니, 얼리 스테이지 인베스터, 마이크로 벤처캐피털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공통점은 대부분이 교육 및 멘토링과 초기 투자를 병행한다는 것이다. 투자 색깔은 더욱 뚜렷해졌다. 멘토 창업자의 경력을 살려 전문 분야에서 후배를 양성하고 집중 투자한다. 더벤처스는 ‘글로벌’과 ‘서비스 창업’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있고 스파트랩은 ‘해외 네트워크’에 강하다. 올라웍스를 창업하고 인텔에 성공 매각한 후 ‘퓨처플레이’를 세운 류중희 대표는 하이테크 중심의 ‘기술 창업’에 특화돼 있다.

퓨처 플레이는 보다 진화된 모델을 만들었다. 기술 기반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동시에 예비 창업가 제도인 ‘인벤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능력 있는 공대생 및 개발자를 고용해 안정적인 연봉(1억 원)과 사무실 공간, 고가의 개발 장비, 경영 지원 등을 제공하고 개발에만 주력하게 한 후 창업을 돕는다. 벤처 아닌 사람에게 투자하는 형태다. 카이스트 박사 출신, 구글 본사 출신, 국내 대기업 전자 회사 특허왕 출신 등 개발자들이 예비 창업자로 일하고 있고 사물인터넷(IoT) 등 향후 10년 내 쓰일 미래 기술을 만들고 있다. 벌써부터 글로벌 기업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류중희 대표는 “외국에서 VC가 들어와 한국에 붐을 일으킨 게 아니라 국내에서 성공한 창업자들이 자생적으로 에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며 “실리콘밸리를 제외하면 한국만큼 에코 시스템이 잘 구축된 곳, 특히 초기 투자가 잘되는 나라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에서도 최근 한국 벤처에 크게 주목한다. 얼마 전 더벤처스에는 아마존 관계자가 방문했다.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버 트래픽이 급격히 증가하자 그 배경인 한국 스타트업의 성장 비결을 알기 위해서였다. 아마존 관계자는 이 자리에서 “전 세계에서 왜 한국만 갑자기 벤처가 붐업되고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기술 창업 지원 프로그램 팁스(TIPS)는 해외에서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다. 중소기업청 정부 지원금이면서도 100% 민간 주도형으로 업계에선 ‘스타트업의 엘리트 코스’로 통한다. 정부가 본엔젤스·프라이머·케이큐브벤처스·퓨처플라이·더벤처스 등 선배 벤처인이 주도하는 기관에 과감한 자금을 지원하고 각 기관에서 ‘추천’해 최종 선정한다. 정부 지원과 전문 보육을 동시에 받는 길이다.

결국 중요한 건 페이스북 같은 혁신 기업이 탄생하는 일이다. 지원은 그 어느 때보다 충분하다. 초기 투자에 봇물이 터진 요즘 더욱 옥석을 가려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글로벌 스타트업 ‘노리’의 김서준 부사장은 “중요한 점은 좋은 인력이 합류하고 회사가 장기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며 “정부 지원금만 받고 좀비 회사로 남아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진짜 좋은 회사를 더 키워 해외 성공 사례가 많이 나오는 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순환 구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