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부진 타고 자산 매각 바람…SK네트웍스 매각 차익만 1000억대

[비즈니스 포커스] 현금 확보 위해 사옥 매각 나선 기업들
지난 9월 18일 경제 관련 뉴스는 온통 현대차그룹의 한국전력 부지 매입 소식으로 도배됐다. 장부가액 2조73억 원, 감정가로도 3조3300억 원의 부지를 10조5500억 원에 사들인 ‘통 큰’ 베팅은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까지 가세하며 화제가 됐다. 미래 가치를 감안했다는 현대차의 초대형 투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기는 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부지를 판 한전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공기업 부실의 대명사로 꼽혀 온 한전은 10조 원이 넘는 현금을 손에 쥐며 재무구조 정비와 유동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손쉽게 잡게 됐다. 전기료 인상 등 여러 다른 요인이 있지만 실제로 한전은 부지 매각과 맞물려 7년 만의 턴어라운드가 기대되고 있다. 반면 현대차는 실적 악화와 외국인 투자자 이탈 등이 겹치며 시가총액이 20% 가까이 빠지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영상 위기 닥쳤을 때 큰 힘 되는 부동산
애초 한전 부지 인수전은 현대차와 삼성그룹 간의 이파전 양상으로 흘렀다. 하지만 한 번의 통 큰 베팅으로 알토란 부지의 임자는 현대차로 결정됐다. 그렇다고 시장에서 ‘현대차가 이겼다’는 반응을 찾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정작 두 그룹의 물밑 싸움으로 득을 본 것은 한전이란 게 중론이다.

한전 부지 사례에서 보듯이 기업이 보유한 부동산은 경영상 위기가 닥쳤을 때 큰 힘을 발휘한다. 국내 기업들이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재벌닷컴의 지난 10월 조사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 소속 92개 상장사가 보유한 토지 면적은 1억8120만㎡에 달한다. 여의도 면적의 62배에 이르는 땅을 10개 그룹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2008년 조사와 비교해도 7.2%(1220만㎡) 늘어났다. 장부가 기준의 토지가액으로 환산하면 61조9890억 원에 이른다.

재무구조 개선이나 운영자금 확보를 위한 기업의 부동산 매각은 주로 빌딩, 즉 사옥에 집중되고 있다. 토지나 설비(공장) 등에 비해 이용 가치가 크고 주로 도심에 자리해 자산 가치도 높기 때문이다. 저성장 기조 정착과 사상 초유의 2년 연속 1% 물가 인상률에 따른 디플레이션 우려 등 한국 경제의 회복 속도가 더딘 가운데, 국내 기업들의 실적 역시 위기의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사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기업의 자산 매각, 특히 사옥(빌딩) 매각이다.

지난 3분기에 이뤄진 대형 오피스 빌딩 거래도 대부분이 기업 재무구조 개선과 운영자금 확보를 위한 구조조정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 많았다. 한국화장품은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자리한 서린사옥을 837억 원에 재단법인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에 매각했다. 7월 28일 계약을 체결했고 8월 말에 최종 잔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화장품은 또 대구광역시 중구 사옥을 개인 투자자에게 57억 원에 매각했다. 공시 자료에 따르면 청계천변 본사 사옥과 대구 사옥의 매각 금액은 각각 자산 총액 대비 76.86%, 5.23%에 이른다. 주요 사옥 매각을 통해 한국화장품은 당장 894억 원의 현금을 확보하게 됐다.

한국화장품의 사옥 매각은 올 초부터 진행됐지만 그간 우여곡절을 겪었다. 애초 지난 3월 하나자산신탁이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됐지만 기관투자가 모집이 여의치 않으면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6개월 만에 계약을 해지했다. 통상 두세 달이 걸리는 투자자 모집 기간이 한 달에 불과했고 매각 금액 또한 높았기 때문이다. 사옥을 사들인 이종환재단은 국내 최대 장학재단으로, 기금 규모만 8000억 원에 이른다. 이종환 삼영화학 명예회장이 2000년에 설립했다.


‘세일즈앤드리스백’이 대세
한국화장품은 1990년까지만 해도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LG생활건강 등과 어깨를 견주던 국내 화장품 업계 ‘빅 3’였다. 하지만 2001년 1384억 원의 매출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 2013년에는 311억 원의 매출에 그쳤다. 이번 사옥 매각을 통해 한 해 매출의 287%를 거둬들인 셈이다. 한국화장품은 손에 쥔 현금으로 차입금을 상환하고 운영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올해 3월 말 기준으로 한국화장품의 단기 차입금은 568억5000만 원이다.

한진중공업도 남영동 사옥(남영빌딩)과 부산 중앙동 연구개발(R&D)센터를 1497억 원에 매각했다. 지난 4월 금융 당국과 채권단이 새로 지목한 재무구조 개선 약정 체결 대상에 포함된 게 결정적이었다. 유동자산 확보를 위한 방안으로 가장 먼저 꼽힌 것은 역시 자산 매각이다. 한진중공업은 이미 지난 1분기에 215.9%의 부채비율을 기록했고 순차입금만 2조4551억 원에 달했다. 이에 따라 지난 1월부터 베스타스자산운용을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해 매각을 진행하다 7월 들어서야 결실을 보게 됐다. 한진중공업은 사옥 매각 대금 거의 전액을 하반기에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상환에 사용할 전망이다. 이미 지난 8월 15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상환했고 이 달에도 역시 1500억 원의 회사채 만기가 돌아온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자리한 태영건설 사옥도 리츠(부동산투자회사)에 팔렸다. 태영건설은 지난 9월 23일 이사회를 열고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태영빌딩을 생보부동산신탁이 운용하는 ‘생보제4호위탁관리리츠’에 매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매각 절차 마무리는 9월 29일 이뤄졌고 최종 금액은 1031억 원이다. 태영건설이 사옥 매각에 나선 이유 역시 부채 상환이다. 상반기 기준으로 태영건설의 총부채는 1조2087억 원에 달한다. 사옥 매각 대금을 모두 빚 갚기에 쏟아붓는다고 하더라도 부채비율 개선은 13% 선에 그칠 전망이다.

실적 부진의 칼바람을 맞고 있는 증권사·보험사들도 사옥 매각에 나섰다. 현대증권은 지난 7월 16일 하나자산운용에 여의도 사옥을 810억 원에 매각했다. 회사 관계자가 밝힌 매각 이유는 ‘자산 유동화를 통한 자금 확보’ 차원으로 명확한 용도는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증권은 세일즈앤드리스백 방식으로 매각 후에도 5년간 사옥을 사용할 계획이다. 또 4년 후 해당 건물이 매물로 나오면 우선 매입할 수 있는 권리도 계약에 포함됐다.

미래에셋생명은 여의도 사옥을 KTB자산운용에 935억 원을 받고 팔았다. 미래에셋생명 여의도 사옥은 미래에셋그룹의 첫 사옥으로 상징적 의미가 컸다. 업계에선 보험사 지급여력비율(RBC) 강화나 기업공개(IPO) 지연 등 재무구조 개선이 필요해짐에 따라 자산 매각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 지난해 5월 사명을 바꾼 MG손해보험(구 그린손해보험)은 올 연말까지 서울 선릉 사옥을 매각할 계획이다. 선릉 사옥은 이미 그린손보 시절인 2011년 매각을 추진했다가 실패한 전력이 있다. 회사 측은 800억 원 수준의 현금 확보를 기대하고 있지만 시장 평가는 이보다 낮은 수준이어서 매각 바람이 이뤄질지는 두고 봐야 할 전망이다.

외국계 생보사인 알리안츠생명도 서울 신설동 사옥을 포함해 전국의 29개 사옥 중 12개를 팔았다. 올 초 목표한 13개 사옥 중 신설동 사옥만 남겨놓은 셈이다. 지방 사옥과 달리 신설동 사옥은 입지 조건이 좋은 편이어서 올해 안에 매각을 완료한다는 목표다. 알리안츠는 올 1분기에 229억 원의 당기 순손실을 기록했다. 5분기 연속 적자다.

3분기에 이뤄진 사옥 매각 중 가장 덩치가 큰 건은 SK네트웍스의 대치동 신사옥(오토웨이타워) 매각이다. 11월 27일 계약을 완료할 예정으로 NH농협은행이 3090억 원을 투자해 새로운 주인이 된다. SK네트웍스는 애초 세웠던 입주 계획을 접고 매각을 통한 신사업 투자금을 마련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예상되는 차익만 1000억 원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무구조 개선이나 현금 확보를 위한 불끄기 방편이다 보니 매각 후 임대, 즉 세일즈앤드리스백이 늘어난 것도 최근의 트렌드다. 앞서 현대증권 외에도 한진중공업·태영건설 등이 모두 세일즈앤드리스백 방식으로 매각 계약을 맺었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