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아파트 빌트인 시장 공략…본사 반대 무릅쓰고 온라인 판매 성공시켜
삼성전자·LG전자의 홈그라운드인 한국 시장에서 용하게 살아남은 해외 가전 업체가 있다. 독일 가전 명가 ‘밀레’의 한국 법인 ‘밀레코리아’다. 미국의 월풀, 일본의 소니와 파나소닉, 독일의 지멘스 등도 못 버텨낸 가전 왕국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밀레코리아의 수장 안규문 사장의 경영 노하우가 그것이다. 11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밀레의 독일 본사부터 해외 법인들도 벤치마킹한다는 밀레코리아만의 전략은 무엇일까.과감한 사업 모델 전환
밀레코리아의 지속적 성장 요인으로는 ‘과감한 사업 모델 전환’을 꼽을 수 있다. 2005년 밀레코리아가 한국에 설립될 당시 대표이사를 맡았던 안 사장이 밀던 방식은 기업을 대상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B2B 사업 모델이었다. 일명 ‘프로젝트 비즈니스’로 도곡동 타워팰리스, 삼성동 아이파크, 한남동 더 힐 같은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 빌트인(Built-in) 제품으로 밀레의 세탁기·식기세척기·냉장고 등을 넣으며 이름을 알렸다. 고급 주방 가구를 다루는 밀레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밀레는 한 번 구입하면 20년 이상 쓸 수 있는 프리미엄 제품’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사업 영역을 대형 아파트 단지로 넓혀 갔다. 기존 밀레의 영업 방식과 전혀 다른 전략이었다. 외국은 한국과 달리 대규모로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지 않기 때문에 본사에서도 그의 사업 전략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포기하지 않고 본사를 설득하며 사업을 진행한 결과 밀레코리아는 밀레의 주력 제품인 냉장고와 세탁기 판매의 70%를 B2B로 소화했고 본사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적당히 안주하지 않았다. 건설업 경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파악한 안 사장은 서둘러 사업 모델을 변경했다. 이때 고객에게 직접 제품을 판매하는 B2C로 사업 모델을 바꿨다. 그동안 소수의 프리미엄 층만 공략했던 것에서 그 범위를 넓힐 수 있는 방법은 인터넷 마케팅이었다. 사용해 본 이들의 입소문을 노렸던 것이다. 주력 판매 제품도 고가 제품에서 30만~40만 원대인 진공청소기로 바꿨다. 이번에도 본사의 반응은 마땅치 않았다. 왜 불필요한 일을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을 대표로 데려다 놓으니 명품을 인터넷으로 판다는 비난도 쏟아졌다.
그의 경영전략은 곧 실적으로 나타났다. 고객들의 이용 후기가 입소문을 타고 판매로 이어졌다. 인기에 힘입어 백화점에 제품을 전시하기 시작한 때도 이맘때였다. 온·오프라인에서 밀레가 인기를 끌며 밀레코리아의 매출 성장률은 매년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판매 물량이 부족해 비행기로 제품을 실어 나를 정도였다. 서울 중심으로 판매하던 제품은 전국 30여 개 주요 도시마다 대리점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본사에서도 사업 성과가 나타나자 해외 법인장들에게 성공 사례를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2007년부터는 모든 해외 법인이 온라인 쇼핑 판매를 하도록 본사 방침이 바뀌었다.
안 사장은 “사업 초반에 매출의 70% 이상이 빌트인 같은 B2B에서 나왔지만 건설 경기에 따라 부침이 심해 사업 확장에 한계가 있었다”며 “입소문 마케팅을 이용한 B2C 전략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데 주력한 결과 매년 적자 없이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처음 인터넷으로 진공청소기 판매를 시작한 이후 품질에 대한 입소문을 타고 브랜드 인지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며 “소비자 사이에 품질에 대한 믿음이 형성돼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현재 밀레코리아의 전체 매출 중 B2C가 차지하는 비중은 99%에 달한다.
강남에 빌딩 매입해 근거리 AS
본사에서 주목한 밀레코리아만의 특징에는 남다른 고객 관리 방식도 있다. 밀레코리아 본사 건물 매입이 좋은 사례다. 밀레의 아시아 법인은 도심의 교통·문화 중심지에 사무실을 차린다. 항상 건물을 임대해 사용했다. 하지만 안 사장은 서울 강남 지역의 건물을 구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회사 정책에 반하는 불필요한 지출이라며 본사는 크게 반대했다.
안 사장은 빌딩을 매입하기 위한 세 가지 이유를 주장했다. 첫째, 건물을 구입하면 고객 신뢰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전에 한국에 진출했지만 실적이 나오지 않자 철수한 글로벌 기업이 왕왕 있었다. 고가의 제품을 구입했지만 본사가 철수해 애프터서비스(AS)를 받지 못한 소비자들이 많았다. 그에 반해 밀레코리아는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사업을 벌일 것이란 믿음을 심어 줘야 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둘째, 비용을 따져 봐도 임대보다 매입이 유리하다. 시간이 지나면 임대비용이 건물 구입비용을 넘어서게 된다. 또 강남 부동산의 특성상 건물주가 임대료를 크게 올릴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건물을 매입해 두면 나중에 가격이 크게 상승할 때는 오히려 회사에 이익을 줄 수 있다는 논리였다. 본사는 고심 끝에 안 사장의 손을 들어줬다. 밀레코리아가 서울 역삼동 차병원 사거리의 빌딩을 매입한 배경이다.
밀레코리아는 8층 건물 중 3개 층을 임대하고 있는데,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 수입이 짭짤하다. 또 밀레 제품의 가격대는 높은 편이다. 냉장고는 800만 원, 세탁기와 커피 메이커도 200만 원을 호가한다. 부유층을 상대로 마케팅을 벌일 때 본사가 강남에 있다는 것은 강점이다. 서울 강남과 한남동에서 연락이 오면 30분이면 찾아가 애프터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다.
안 사장은 “고객 마음까지 세심하게 배려하는 서비스 마인드가 중요하다. 밀레의 목표는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제공하는 것인 만큼 서비스 수준도 소비자가 진정으로 감동할 수 있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직이 안정화되고 인력 변동이 없는 게 밀레코리아만의 성공 비결로 꼽힌다. 안 사장은 밀레코리아가 설립된 2005년 외국인 최초 해외 법인장에 발탁된 이후 올해로 9년째 수장을 맡고 있다. 최고경영자(CEO) 임기를 10년으로 보장 받은 사람은 밀레 전 법인을 통틀어 안 사장밖에 없다. 평소 성실한 그의 모습에 반한 밀레 본사 측이 1년간의 CEO 역할을 충실히 해내자 아예 10년을 보장해 준 것이다. 밀레코리아 75명의 직원 중 절반 이상이 20년 이상 근무한 직원들이기도 하다. 전 세계 직원 1만6608명 중 1만 명이 20년 이상 근무할 정도로 가족적인 경영을 중시하는 밀레의 기업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안 사장은 “2006년 본사 경영진이 밀레를 제대로 알려면 최소 10년은 일해야 한다면서 2016년까지 대표직을 맡아주고 매출은 연평균 3~5%만 늘어도 잘한 것이니 욕심내지 말라고 했다”며 “이것이 밀레의 철학인 ‘슬로 앤드 스테디(slow & steady)’다. 단기적인 성과보다 장기적인 사업 활동을 위해 안정된 조직원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밀레의 프리미엄 전략으로 매출을 급상승시켰다. 전년 동기 대비 29%가 껑충 뛴 이유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프리미엄 가전 전략의 반사이익으로도 분석된다. 고가 브랜드로 통하는 밀레는일반 브랜드 제품의 2배 이상으로 소비자 층을 갑자기 확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삼성과 LG에서 고가의 프리미엄 제품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시장 분위기가 달라졌고 밀레의 실적 향상에 기폭제가 됐다.
안 사장은 “밀레 제품은 비싸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삼성·LG에서 워낙 고가의 제품을 내놓다 보니 가격에 대한 부담감이 덜어진 것 같다”며 “시장이 성숙·확장 단계에 접어든 만큼 내년에는 한 대에 1450만 원을 호가하는 오븐을 비롯해 최고급 프리미엄 라인업으로 소비자 선택의 폭을 더 넓혀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돋보기
밀레코리아 성공 전략
1. 제품이 아닌 문화를 판다.
2. 시장 변화에 즉각 대응한다.
3. 프리미엄 전략을 유지한다.
4. 고객과의 약속이 최우선이다.
5. 조직을 안정화하는 데 집중한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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