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C·TSMC 등 기업집단 급성장…중국과 원가 경쟁에서 규모의 경제 중요
최근 대만 대기업의 성장이 정보기술(IT)·통신기기·가전 분야를 중심으로 두드러지고 있다. 과거 대만 제품 중 글로벌 시장에서 잘 팔리는 제품들은 라우터를 비롯한 컴퓨터 관련 제품, 자전거·라면 등 소비재 위주였는데, 이들은 워낙 경쟁이 치열하고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제품군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제조사의 브랜드 가치나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HTC의 스마트폰이나 반도체 회사인 TSMC 등이 대만의 새로운 선두 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만은 1990년대 초 한국이 반도체 산업에 진입을 성공시키기 전까지만 해도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 발전 모델을 지향했지만 이제는 대만 기업들도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앞다퉈 성장하고 있다.대만이 ‘중소기업 천국’으로 불리게 된 이유
대만이 과거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 구조를 지향했던 이유는 여러 설이 있는데, 정치적으로는 중국 본토 출신의 장제스 전 총통이 대만 토착민에게 부가 몰리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장제스 전 총통과 본토에서 데려온 중국인들은 소수였지만 대만을 통치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무력 충돌을 빚어 왔다. 현재도 장 전 총통의 이념을 지지하는 국민당은 대만을 중국의 일부분으로 보고 있고 야당인 민진당은 대만의 아이덴티티를 중국과는 별개의 독립된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본토 출신 대만인이 경제력을 소유하게 되면 정치력도 커질 것을 우려한 장 전 총통은 의도적으로 대기업으로의 성장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설명은 중국 특유의 사회적 네트워크에 주목한다. 많은 대만인이 수출을 위한 무역에 종사하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는데, 이들이 전통적으로 해외에 주재하는 화교와 거래한다. 비교적 고정된 수의 해외 바이어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큰 굴곡 없이 기업을 꾸려 가지만 이렇게 비슷한 기업이 많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힘들었다는 설명이다.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 구조로 인해 대만에서는 포르모사(Formosa)그룹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규모의 자본 투입이 요구되는 중공업이 아니라 경공업 위주의 제조업이 성장하게 됐다. 1997년 말 아시아를 휩쓴 금융 위기 때 대만은 위기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었다. 한국이 심한 타격을 받고 빅딜 등을 비롯해 재벌의 다각화에 제동을 걸 때 대만은 거꾸로 ‘한국화 모델’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대만은 현재 많은 기업집단이 육성됐고 한국처럼 IT 통신기기와 반도체 등을 위주로 국가 경쟁력을 발전시키고 있다.
대만 기업이 주로 생산하는 IT 통신기기와 컴퓨터 부품은 제품 기술이 원숙기에 접어들어 혁신적 제품 기술보다 가격 경쟁력을 중심으로 시장에서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이에 따라 해당 시장에서 우세를 지속하기 위해 대만 기업들은 생산과 관련한 기술적 학습, 단가의 감소, 거래와 관련한 부가적인 외부성의 효과를 얻기 위해 몸집을 늘려야 했다.
기업집단으로 대형화된 대만 기업들은 1980년대 전자계산기 제조와 1990~2000년대의 노트북 제조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휴대전화를 제조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대만에서 잘 발달된 생산 네트워크를 이용한 부품 원스톱 구매를 이용해 부품들을 효율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기술적 통합(부품 간 호환성) 방면에서 확실한 학습을 하게 됐다. 또 외국인 직접 투자가 중국으로 몰리면서 중국에서도 생산 네트워크가 세워지기 시작하고 대만 기업들은 중국 기업을 상대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몸집을 늘림으로써 단위당 제품 설계 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만 기업에 하청을 주던 바이어 회사들에는 하청 업체가 어느 정도의 생산능력을 보유하면 위험성과 모니터링 비용을 낮추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청 업체의 기술적 신뢰성으로 인식됐다. 이는 하청 업체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컴퓨터 산업은 바이어 회사의 주문이 대량일수록 하청 업체의 서비스가 더 좋아졌다. 대만은 특히 중형 하청 업체가 많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 오더를 수주하기 위한 경쟁이 존재했고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을 보유한 업체는 앞다퉈 몸집을 늘리게 됐다. 몸집 늘리기는 생산 설비를 늘리는 것과 동시에 산업 간 다각화로 추진됐다.
TV 부품에서 노트북·휴대전화로 진화
앨리스 암스덴과 추완웬(2003년)은 대만의 현재 주력 산업인 IT 통신기기 산업은 TV-전자계산기-노트북 생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겪으며 진화돼 왔다고 주장했다. 글로벌 경쟁의 압력, 특히 중국 하청 업체의 부상은 대만 기업을 끊임없는 생산비 절감과 제품 및 공정 혁신을 추구하게 만들었는데, 대만 기업들은 현재의 기술 기반을 최대한 이용해 단위당 부가가치가 좀 더 높은 산업으로 조금씩 이동하게 됐다. TV를 생산하다가 전자계산기를 만들게 되고 계산하는 기술을 바탕으로 하되 다른 기술들이 통합된 제품 형태인 노트북 및 컴퓨터를 생산하게 됐으며 휴대전화가 더 이상 전화기가 아니라 통신과 컴퓨팅, 영상 기술이 통합된 복합 제품이 됨에 따라 휴대전화도 제조하게 됐다. 그리고 수직 계열화로 덩치가 커진 기업집단이 자기 브랜드를 시장에 선보이면서 대만 제품의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지게 된다.
2009년에 실시된 대만 국제 브랜드 가치 조사에서는 컴퓨터 업체인 에이서(Acer)가 1위를 차지했다. 2위와 3위는 컴퓨터 백신 업체인 트렌드마이크로(Trend Micro)와 또 다른 컴퓨터 업체인 에이수스(Asus)가 차지했다. 3년 뒤인 2012년에는 모바일 기기 전문 업체 HTC가 1위에 올랐고 에이서·에이수스·트렌드마이크로가 각각 2~4위를 차지했다. 10년 전과 비교해 보면 그때에도 브랜드 가치 상위 기업이었던 라면 업체 마스터콩(Master Kong), 자전거 제조업체인 자이언트(Giant)와 통신 주변기기 제조업체인 디링크(D-Link)와 자이젤(ZyXel) 및 사이버링크(Cyberlink) 등은 여전히 건재하다. 최근에 등장한 기업으로는 중국에서 한국 제과·제빵 기업의 주요 경쟁자인 베이커리 체인 85’C와 스테이크 전문점 왕스테이크(Wang Steak), 헬스 기자재 제조 기업인 존슨(Johnson) 등이 있다.
대만의 기업들이 기업집단화하면서 대만의 중소기업 위주 경제 구조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간단히 말해 부의 분배 차원에서는 한국보다 개선된 성적표를 보였지만 이제 한국이 대기업 구조로 인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에 대해 대만도 고민하게 됐다. 대만의 변화로 중소기업이 없어지면서 전반적으로 실업률이 늘어났으며 계약직과 시간제 일자리가 증가했다. 특히 노동시장에서는 비정규직의 증가와 함께 대학 졸업자의 실업률이 늘어나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대기업화가 일으킨 문제라기보다 대기업화와 같이 발생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어찌 보면 세계적 현상일 수도 있고 앞에는 선진 기술로 무장한 선진국 기업이 달리고 뒤에서는 개도국이 저임금을 바탕으로 추격해 오는 상황에 처한 중진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또 언어와 문화가 비슷한 중국이라는 생산 대국에 인접한 위치에 있는 대만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부의 분배 악화 등 대기업 체제 부작용도
대만은 대중국 외국인 직접 투자의 큰 축으로서 대만 기업이 임금이 더욱 저렴한 중국에 생산 설비를 옮기면서 대만에서는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 지 오래다. 그리고 기업들이 언제라도 중국으로 가버릴 수 있기 때문에 최근 15년간 대만에서는 임금 상승이 억제됐다. 이들은 앞으로 대만 정부가 해결해야 할 큰 과제로 남아 있다.
대만 기업의 대기업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지만 대만 브랜드 중에는 글로벌화하기 힘든 것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식음료 산업에선 소비자의 입맛 등 문화적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에 글로벌 브랜드라고 해봤자 주로 인접국인 중국에서 지명도가 있는 수준이다. 실제로 이들 대만 글로벌 브랜드 가치 상위 20개사는 몇몇 제조업체를 제외하고는 중국에 편중돼 해외 진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007 영화에 세계적인 자동차 업체들이 새로운 콘셉트 카를 소개하기 위해 일부러 협찬하듯이 요즘 대만 기업은 할리우드 영화에 투자해 자국 제품을 광고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곽주영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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