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고환율 정책의 당위성은 일단 수출 기업들을 살려 고용과 소비력을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환율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전기·전자,
자동차 산업 등의 고용과 소비력의 증대는 이미 한계점에 와 있다.

정지홍 RHT 대표

1973년생. 2000년 미 웨스트버지니아주립대 수학 및 컴퓨터공학 전공. 2006년 시카고대 대학원 금융수학 석사. 2001년 미 필립스그룹 메드퀴스트 근무. 2006년부터 KB국민은행·액센츄어 등에서 근무. 2011년 리스크헷지테크놀러지(RHT) 대표(현).



한국 경제는 그간 고환율(원화 약세)이 주는 많은 혜택을 받았다. 삼성과 현대·기아차가 세계 5위의 브랜드가 된 가장 큰 경쟁력으로 환율을 빼 놓을 수 없다. 삼성이 모바일 분야에서 지금처럼 세계를 석권하는 저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백색 가전과 반도체로 버티던 시절 고환율이 준 가격 경쟁력 덕이었다. 현대·기아차 역시 품질이 떨어진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고환율이 주는 가격 경쟁력으로 세계 5위의 자동차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00원대로 떨어진 환율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자 산업뿐만 아니라 모든 수출 산업의 실적과 전망을 하향 조정시키고 있고 가계 부채와 함께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위협적인 요소가 됐다. 정부는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정부는 한국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출 경기가 심상치 않으니 앞으로도 수출 기업들을 위해 특정 수준의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나서야 할까.

당위성과 실현 가능성 면에서 그렇지 않아 보인다. 먼저 고환율 정책의 당위성을 살펴보자. 그간 고환율 정책의 당위성은 일단 수출 기업들을 살려 고용과 소비력을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환율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전기·전자, 자동차 산업 등의 고용과 소비력의 증대는 이미 한계점에 와 있다.

이제는 그동안 고환율의 피해를 본 철강·화학·정유·항공·서비스·여행 등의 다른 산업들도 우호적인 환율 환경의 혜택을 받아 새로운 고용과 임금 상승을 통한 소비력 증대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또한 고환율의 혜택을 받아 온 10대 그룹이 쌓아 높은 유보금이 477조 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그간 물가 상승과 내수 침체로 극심한 양극화를 겪어 온 서민층과 자영업자들도 숨통을 틔워 줘야 한다. 이는 내수 활성화와 함께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뇌관 중 하나인 가계 부채 1000조 원과도 연결된 문제다.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정부는 인위적인 환율 수준 유지로 수출 대기업을 부양하기보다 수출 대기업들이 실적 악화를 중소 하청 기업에 떠넘기지 못하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할 때다.

그러면 만약 정부가 원한다면 고환율 유지가 가능한 것일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철저하게 미국과 일본의 의지에 달려 있는 문제이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저금리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은 막대한 국가 부채를 안고 있어 지나친 양적 완화는 일본 경제에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죽기 살기로 엔화를 방출하는 상황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경제 규모 등으로 볼 때 우리의 달러 보유액이 역대 최대라고 해도 고환율 유지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미국과 일본의 통화정책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진 현재 상황에서 우리도 돈을 풀어 맞서는 것은 오히려 어느 시점에 이르러 통제하기 어려운 변동성만 가중시킬 뿐이다. 달러와 엔화의 금리와 통화량, 경상수지 등 펀더멘털에 의한 환율 변화는 시장에 맡기고 원화가 투기 자본의 대상이 되거나 외국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에 따른 환율 급변동을 막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정 환율대 유지의 당위성과 가능성을 재고하고 급격한 쏠림 현상 방지에만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