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고급 브랜드 아성 무너뜨린 나투라·허보리스트…동양의학·친환경 앞세워
산업 내 선발자는 소비자에게 브랜드가 먼저 각인되고 가치 있는 자원들을 선점할 수 있으며 부품이나 원료의 공급망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조직과 연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후발자에 대한 높은 진입 장벽을 구축할 수 있다. 우리는 복사기의 선구자인 제록스 회사를 심지어 영어에서 ‘복사하다’라는 뜻의 동사로 쓰기도 한다. 선발자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로 막강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많은 선발자가 시장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출되고 있다.선발자는 자신의 성과에 사로잡혀 선발자의 제품과 서비스에서 개선을 바라는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오히려 선발자의 빈틈을 공격해 시장 진입을 노리는 후발자가 더 개선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 궁극적으로 시장에서 살아남고 있다. 이때 후발자는 선발자가 구축해 놓은 인프라의 혜택을 보는 등 후발자로서의 이득도 존재한다.
선발자와 후발자는 진입 시점에 따라 득실을 따질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인데, 개도국 기업은 이러한 전략적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개도국 기업은 결국 후발자로 출발해야 하며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선발자와의 격차를 줄여 나가는지가 경쟁력을 결정하게 된다. 추격은 그 방식에 따라 경로 의존형 추격(path-following catch-up), 경로 생략형 추격(path-skipping catch-up), 경로 창출형 추격(path-creating catch-up)으로 나눌 수 있다.
선발자를 따라잡는 3가지 전략
경로 의존형 추격은 선발자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전략으로, 이미 검증된 방식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위험성은 적지만 후발자가 선발자에 비해 특별한 장점이 없다면 선발자를 추격할 가능성이 제일 낮다. 경로 의존형 추격에서 후발자가 중간 단계를 뛰어넘는 추격 방식이 경로 생략형 추격이다. 한국의 평면 패널 산업은 1~2세대를 생략하고 곧바로 3세대부터 생산을 시작했는데, 이는 경로 생략형 추격의 좋은 예다. 경로 생략형 추격은 빨리 선발자들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지만 선발자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마지막으로 경로 창출형 추격은 후발자들이 선발자들과 다른 경로를 선택함으로써 따라잡겠다는 적극적 전략이다. 새로운 경로를 걷는다는 결정은 위험이 따르지만 기존 제품들과 차별화함으로써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
화장품 산업은 생산기술·브랜드·마케팅의 삼박자가 조화를 이뤄야 하는 산업으로 선진국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이 매우 높다. 화장품 시장은 가격대에 따라 고가 제품군과 중저가 제품군으로 나뉘는데, 고가 제품군에는 오랫동안 고급스러운 브랜드 이미지를 쌓아 온 선진국 화장품 회사의 제품들이 포진하고 있고 중저가 제품군 역시 선진국 화장품 회사들이 다각화를 통해 가격별로 다양한 제품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에스티로더그룹은 에스티로더와 조말론 같은 브랜드는 고가 화장품 및 향수를 출시하고 클리니크·맥·바비브라운 같은 브랜드는 중저가 시장을 공략하고 있으며 오리진스와 아베다는 자연주의를 표방하면서 건강한 화장품을 원하는 소비자와 연결된다.
화장품 시장은 전형적으로 개도국 기업들이 뚫기 힘든 시장이다. 화장품 성분이나 제조법은 기업 비밀로,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화장품의 첫째 과제는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욕구를 충족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화장품을 사용해 직접적인 화학적 효과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여성들은 그 화장품이 주는 ‘신비한 이미지(mystique)’를 사기 때문에 브랜드가 확실하게 구축되지 않은 개도국 기업들은 그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제품 생산관리에 치명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한 번 심어진 독특한 이미지는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개도국 기업과 선진국 기업 간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장품 산업에서는 경로 생략형이나 경로 의존형 추격 모델로는 개도국 기업이 선진국 기업을 따라잡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비선진국 출신 기업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브라질의 나투라(Natura), 중국의 허보리스트(Herborist), 한국의 아모레퍼시픽이 그 주인공이다. 아모레퍼시픽은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아시아권과 뉴질랜드·캐나다·프랑스·미국에 진출했고 나투라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프랑스에 직접 진출했으며 미국에 세포라(Sephora)라는 화장품 편집숍을 통해 수출되고 있다. 허보리스트는 유럽과 미국에 역시 세포라를 통해 수출되고 있다. 수출보다 지사 설립을 통한 현지 진출이 더 적극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현재까지의 활동을 보면 셋 중 아모레퍼시픽이 가장 글로벌한 경영을 하고 있으며 나투라가 그다음, 그리고 허보리스트가 국제 진출의 초기 단계인 것으로 판단된다.
허보리스트, “모방 전략으론 경쟁 한계”
나투라는 1969년 브라질 상파울루의 고급 주택가에서 은 실험실을 동반한 고급 화장품 가게로 출발했다. 2008년까지 나투라는 모발, 목욕 제품, 기초 및 색조 화장품, 향수, 구강 위생 및 아동용 화장품을 포함한 총 930개의 제품 라인을 선보인다. 나투라는 브라질에 아마존을 비롯해 다양한 생태계가 공존한다는 이점을 십분 활용한 제품을 설계하는데, ‘에코스(Ekos)’라는 제품 라인이 그것이다. 에코스는 양질의 보습 오일을 제공하는 브라질 너트를 비롯해 패션 프루트 씨, 브라질 열대 지역에서 나는 코코아나무와 비슷한 카푸아카라는 브라질만의 재료를 활용한 제품이다. 이 제품은 내용물이 자연적으로 썩을 수 있다. 즉 방부제 등 화학 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용기와 제품의 포장도 재활용 자원으로 만들어진다. 나투라는 브라질에서는 로레알·에이본·유니레버·프록터앤드갬블과의 경쟁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으며 해외시장에서는 프랑스 프로방스의 재료를 사용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록시땅과 경쟁하고 있다.
화장품 시장은 전형적으로 개도국 기업들이 뚫기 힘든 시장이다. 여성들은 화장품이 주는 ‘신비한 이미지(mystique)’를 사기 때문에 브랜드가 확실하게 구축되지 않은 개도국 기업들은 그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허보리스트는 1898년 홍콩에서 광성항(廣生行)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으며 현재는 상하이에 본사를 두고 있다. 허보리스트의 모회사는 상하이자화연합주식유한공사로, 줄여서 상하이자화라고 불린다. 이 회사는 여성용·남성용 화장품과 세제를 주로 생산하고 있다. 중국의 화장품 시장은 일찍부터 외국 기업에 개방됐는데 고급 화장품 시장은 시세이도와 SKII, 중저가 시장은 로레알·에이본·유니레버 등의 외국 제품이 거의 점령당하시피 했다. 중국 소비자, 특히 여성 소비자들은 주로 기초 화장품에 관심이 많은 특징이 있는데, 색조 화장품의 매출은 최근 들어서야 증가하기 시작했다. 허보리스트는 선두 기업의 전략을 모방하는 방식으로는 시장에서 서양 브랜드와 경쟁하기 힘들다고 판단, 중국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해 한방 생약을 재료로 화장품을 만들었다. 중국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중의학이나 한약재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상하이자화는 허보리스트를 순수 한방 화장품으로 자리매김, 대부분의 중국 화장품 업체들이 저가 시장을 공략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중고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나투라와 허보리스트는 선진국 브랜드가 독점하고 있는 글로벌 화장품 시장에서 동양 혹은 자국의 자연미를 강조하는 제품 개발로 차별화해 해외 진출에 성공했다. 이는 경로 창출형 추격 전략에 해당되며 후발자는 기존 선발자가 구축해 놓은 소비자층 및 화장품에 대한 관심에서 후발자의 이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경로 창출형 추격 전략을 선택하더라도 선발자는 시장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얼마든지 후발자를 역추격할 수 있다. 만약 기존 선진 화장품 브랜드가 아시아의 허브나 약초를 사용한 제품 라인을 선보이면 나투라와 허보리스트 소비자의 상당 부분을 흡수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창업자 의존 뛰어넘는 시스템화가 관건
이 때문에 선진국 브랜드 틈에 끼인 각자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들 두 기업은 추격 전략을 중심으로 전사적인 최적화를 실행하고 있다. 나투라는 에코스를 중심으로 자연주의 화장품을 표방하면서 환경보호 운동에 힘쓰며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공급업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회봉사를 기업 가치의 최우선으로 내걸고 있다. 결국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한 기업으로서 나투라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스스로의 구매 행위를 자연보호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허보리스트는 추격 전략과 관련해 나투라만큼 적극적이며 통합적인 조직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마케팅에 주력하며 가격 정책을 주로 손보고 있다. 출시 초기부터 한방 화장품을 강조하며 고학력 전문직 여성층을 공략, 비싼 만큼 좋은 물건을 샀다는 확신을 주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 두 기업은 개도국 출신의 후발자 기업이 개도국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최대한 유리하게 만든 좋은 사례로 손꼽힌다. 특히 브랜드 이미지가 중요한 화장품 산업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들의 추격 전략은 가히 혁신적이라고 할만하다. 아모레퍼시픽을 비롯해 이러한 케이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기존 기업의 인수·합병(M&A)을 제외하면 개도국 기업이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 있게 입지를 다지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었다. 어쨌든 이런 현상은 일차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선택지가 많아지는 일이니 당연히 소비자들이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발자 기업들이 위기감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더 좋은 서비스나 제품을 제공하거나 가격을 낮추는 등 무엇인가를 할 것이므로 소비자를 위한 추가적인 조치가 뒤따를 수도 있다. 그리고 정치·경제학적 측면으로는 기존 선진국 기업들끼리 누렸던 독점적 경쟁 이익이 줄어들면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 경쟁의 추가 조금이나마 개도국 쪽으로 기울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이들 성공한 후발자 기업이 계속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품질관리를 비롯해 경영 시스템 전반을 선진화해야 하고 국제 투자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지배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개도국의 큰 기업들이 대부분이 그렇지만 나투라와 허보리스트의 성공 역시 시장을 읽는 눈이 뛰어난 리더의 공이 컸다. 하지만 기업이 커질수록 특정인의 리더십도 좋지만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시급하다. 개도국 기업이 유난히 지속 가능성에 취약한 것은 시스템이 튼튼하지 못해 경영 승계가 잘 이뤄지지 않거나 전략의 선택이 잘못됐더라도 회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들 기업들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곽주영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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