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데이터 분석 통해 ‘부의 불평등’ 증명…이데올로기적 장광설 혹평도
40대 초반의 프랑스 경제학자가 쓴 한 권의 책이 지구촌을 들썩이게 만들고 있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파리경제대 교수의 ‘21세기 자본론(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부의 불균형을 해소할 자연적 동인은 없으며 19세기의 세습자본주의가 21세기에 귀환했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최근 10년간 최고의 경제학 서적’이라는 찬사와 ‘이데올로기적 장광설’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교차하지만 방대하고 명확한 데이터 분석에 의한 가설의 증명은 700페이지가 넘는 경제학 서적을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다.“돈이 있어야 돈을 벌지!” 평범한 샐러리맨 나사원(가명) 씨가 습관처럼 내뱉는 말이다. 나름 탄탄한 중소기업에서 자리를 잡아 차장 자리까지 오른 나 씨. 하지만 대기업 신입 사원 연봉보다 조금 더 되는 월급으로는 아이들 학원비 대기도 벅찬 게 현실이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꿈은 늘 사업이었다. 번듯한 제조업체 사장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다. 조그만 호프집이라도 열어 ‘사장님’이 돼야 지긋지긋한 빈곤의 멍에를 벗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아파트 대출이자 갚기에도 빠듯하다. 어깨가 빠질 듯한 절망감이 밀려올 때면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한탄조가 바로 “돈이 있어야 돈을 번다”는 말이다.
나 씨의 넋두리가 눈앞의 현실이라면 토마 피케티의 책 ‘21세기 자본론’은 이를 과학적인 데이터로 실증한다. 201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은 유럽 사회와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데 이어 지난 3월 미국 하버드대에서 영문판이 출간된 후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뉴욕타임스·뉴레프트리뷰 같은 진보 성향 매체는 물론이고 파이낸셜타임스·월스트리트저널·포천 같은 시장 친화적인 매체들까지 연일 논쟁과 인터뷰를 쏟아내고 있다. 미디어뿐만 아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10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경제학 서적”이라 극찬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피케티의 지적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불평등이 단지 경제력의 결과가 아닌 정치와 정책의 결과라는 것”이라며 “정책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의 방식에 찬성했다. 현재까지 ‘21세기 자본론’ 영문판은 5만 부 가까이 팔리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게다가 도표와 그래프가 난무하는 경제학 서적이 소설과 에세이를 제쳤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피케티는 프랑스 파리 근교의 클리시에서 1971년에 태어났다. 한국 나이로도 이제 44세에 불과한 젊은 경제학자다. 18세에 고등사범학교(ENS)에 입학해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이후 사회과학고등연구원과 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공부하며 22세에 박사학위를 따냈다. 이때 논문의 주제가 바로 ‘부의 재분배’였다. 박사학위 취득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경제학부에서 1993년부터 2년간 조교수로 일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따분한 수학 공식만 파는 연구에 싫증이 나’ 1995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으로 돌아온다. 현재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연구 지도자이자 파리경제대(PSE) 교수다. 무엇보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 한 권을 통해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으로 인정받게 됐다.
다시 나 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돈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다, 경제학적으로 표현하면 ‘자본이 쌓아 둔 자본을 활용해 더 큰 부를 획득한다’는 푸념은 사실일까. 개인의 능력 개발은 등한시한 채 신세 한탄만 하는 것은 아닐까. 피케티는 이에 대해 특수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부의 집중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요약하면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g)을 앞지른다는 ‘r>g’의 상태다.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보다 현저하게 높아지면 부의 집중이 한정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게 그의 명제다. 피케티는 책 서문에서 “자본수익률이 생산과 소득 증가율을 초과하면 지속 불가능한 불평등 사태가 이어지게 된다”며 “이렇게 되면 능력 중심주의가 급격히 훼손되고 이를 토대로 한 민주사회가 망가진다”고 진단했다. 혁명까지 이어진 19세기 말에 정확히 그런 일이 일어났고 21세기에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부의 집중을 경제학 최고의 화두로 이끌다
사실 소득과 부의 집중, 그에 따른 사회적 폐단이 어제오늘의 화두는 아니다. 부의 공평한 분배를 주장하는 측과 (경제, 무엇보다 자본의) 성장을 중시하는 측의 공방은 해묵은 논쟁이다. 한쪽에선 불평등이 끊임없이 늘어 세계가 점점 더 불의에 빠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한편에선 부의 집중 못지않게 낙수 효과(trickle down effect)로 모두가 잘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피케티 역시 이런 대치 상태를 ‘귀머거리들의 대화’라며 “서로의 지적 게으름을 폭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귀머거리들의 오랜 논쟁이 다시 핵폭탄급 이슈로 떠오른 것은 그의 말대로 체계적인 연구, 즉 ‘데이터’에 의한 분석 덕분이다. 막연히 ‘부의 집중이 사회적 폐해를 낳는다’는 주장에서 벗어나 무려 300년(1712~2012년)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역사·경제 자료를 20개 이상의 나라를 대상으로 분석해 냈다. 각국의 세금 보고 자료를 통해 초고소득자 계층의 봉급 수익을 0.01%까지 추적해 내는 데 성공했을 정도다.
“자본수익률이 생산과 소득 증가율을 초과하면 지속 불가능한 불평등 사태가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능력 중심주의가 급격히 훼손되고 이를 토대로 한 민주사회가 망가진다.”
책 제목 ‘자본론(Capital)’은 다분히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같은 제목 아래 결론은 완전히 다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결국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자본의 이윤율이 떨어지면 더 큰 자본을 투입하게 되고 결국 최종 시점에 이르러 자본 투입이 중단돼 경제성장의 막다른 골목이 나타날 것이라는 주장이다. 체제의 동력이 사라진 자리에는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의 계급 혁명이 일어나며 결국 사회주의가 자리 잡게 된다.
반면 피케티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 이윤율의 저하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1700~201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오히려 자본주의의 생산성은 꾸준히 증가해 왔다. 이 기간 동안 세계 생산량은 연평균 1.6% 성장했다. 결정적 요인은 인구의 증가다. 1700년대에 5억 명이었던 세계 인구는 오늘날 70억 명으로 증가했다. 인구의 증가는 경제성장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게 정설이다.
피케티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1700~2012년 동안 자본 수익률은 연 4~5% 성장했다”며 “마르크스가 믿었던 것처럼 자본수익률이 장기적으로 하락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을 앞지르면서 부의 집중은 심화된다. 자본가도 힘들게 물건을 제조해 판매할 이유가 없다. 쌓아둔 돈을 통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의 금융 위기는 이런 가설을 여실히 증명했다. 결과적으로 경제 자체가 황폐해지고 성장은 멈추게 된다. “성장과 경쟁, 기술의 진보가 균형추로 작용해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되면 계급 불평등이 줄고 화합과 조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이먼 쿠즈네츠의 장밋빛 예측도 피케티의 책에서 여지없이 빗나간다.
실제로 쿠즈네츠가 활동했던 1945~1975년은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린다. 고속 성장과 부의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낸 ‘유일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이를 자본주의 역사의 예외적인 시대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선 불평등의 기조를 되돌릴 수 있는 자체적인 능력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1700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 불평등이 구조적으로 감소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단언한다. 1840년대부터 번영을 구가한 자본을 통해 산업 이윤은 증가했지만 노동 소득은 정체됐다. 산업혁명으로까지 불리는 50년간의 고속 성장에 비해 대중의 상황은 여전히 비참했다. 당시 입법자들이 기껏 한 일이라곤 ‘8세 이하 아동의 공장 노동을 금지’하는 수준이었다.
19세기 세습자본주의의 귀환
유럽의 불평등이 완화된 것은 역설적으로 성장이 아닌 파괴를 통해서였다. 1914년과 1945년 사이 두 번의 세계대전·인플레이션·국유화·대공황 등으로 사회 시스템은 물론 부의 집중도 파괴됐다. 유럽은 이 기간 동안 보다 더 평등주의적인 경제·세제 정책을 도입했다. 영국은 1930~1980년 초까지 부당하게 높은 소득에 매우 높은 세율로 ‘타격’을 가해 균형 잡힌 소득분배를 유지했다. 미국도 같은 기간 고세율 실험을 계속했다.
부의 집중을 막은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미국에서 고세율 정책이 시행됐던 시기의 경제성장률은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보수 혁명’이 시작된 이후보다 더 높았다. 실제로 미국의 소득 불평등은 1980년대 이후 심화됐다. 부의 불평등이다. 중산층과 하층이 희생되고 성과 중 더 많은 몫이 점점 더 자본의 수중으로 돌아가면서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을 큰 폭으로 앞서는 상황이 재연됐다.
피케티는 나아가 “소득 상위 1%에 해당하는 이들이 정치 영역과 결탁해 그들만의 리그를 구조화한다”고 말한다. 19세기 ‘세습자본주의’의 귀환이다. 생산을 바탕으로 창조된 부가 아닌 물려받은 부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실제로 포브스의 글로벌 억만장자 순위는 1987년과 2013년 사이 최고 부유층의 부가 세계경제 규모보다 3배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케티가 ‘적당한 불평등을 통해 건전한 경쟁을 이끈다’는 자본주의의 속성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벗어나 자본주의를 더욱 평화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며 나이브한 자세를 견지한다. 그의 이상을 실현해 줄 무기는 무엇일까. 바로 세금, 즉 ‘글로벌 부유세’ 도입이다. 고소득층의 재산에 전면적인 누진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를 통해 “불평등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반적인 부의 이동을 공적 감독 아래 두자는 뜻이다. 피케티는 세계 생산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이 한목소리를 내 전 지구적인 금융 재정 자산 등기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협력을 거부하는 세금 피난처에 대한 제재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급진적인 주장만큼이나 호불호도 엇갈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서평을 통해 “경제적 분석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장광설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데이비드 브룩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정치 발상”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끊긴 다리 위로 행진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열광도 있다. 크루그먼 교수는 “피케티의 말대로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과두 체제로 흘러갈 위험이 현실화됐으며 낙관론은 근거가 없다”고 그의 손을 들어 줬다.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1979년 소득수준 1%의 최상위 가구 중 17%가 기업 이익으로 돈을 번 데 비해 2007년에 미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1%의 가구들은 43%가 기업을 운영해 소득을 올렸고 같은 그룹의 75%가 자본이익을 거뒀다”고 지적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칼럼에서 “세습자본주의는 민주주의, 기회의 평등, 복지국가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사악한 체제”라며 “세습자본주의에서는 기회와 혁신이 제한되고 수요가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성장 동력도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계 각국의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는 주장은 비단 피케티의 주장만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4월 30일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주요 18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상위 1%의 소득 변화를 추적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OECD 회원국들의 최상위 소득과 세제’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피케티와 동료 교수가 만든 ‘세계 최상위 소득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작성됐다.
조사 결과 부의 집중이 가장 심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상위 1%가 전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81년 8.03%인데 비해 2012년에는 19.34%로 급등했다. 같은 기간 영국도 6.67%에서 12.93%로, 일본도 7.11%에서 9.51%로 늘었다. 편차의 차이는 있지만 상위 1%의 소득 비중이 줄어든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었다. 1975년부터 2007년까지 전체 소득 가운데 상위 1%에 돌아가는 비중도 미국이 47%로 압도적이었다.
OECD는 보고서를 통해 ‘부유층 감세’가 소득 불균형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최상위 계층에 매기는 최고 세율 평균이 1970년대엔 70%에 달했는데 2000년대 후반 들어선 43%로 뚝 떨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상위 계층의 세금 감면으로 가처분소득과 저축액이 늘어나 더 많은 자본을 축적했고 이는 소득 불균형으로 이어졌다”는 OECD의 분석은 피케티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앙헬 구리아 OECD 사무총장은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정책적 조치가 없다면 빈부 격차가 더 커질 것”이라며 “최상위 계층에 합당한 세금을 걷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도 신지니계수로 보면 위험 수준
이번 OECD 보고서에 한국은 빠져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지니계수는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수로, 0에 가까울수록 완전 평등, 1은 완전 불평등을 가리킨다. 통계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한국의 지니계수(가계 동향 조사 기준)는 0.307(2012년)이다. 이 정도면 OECD 34개 회원국 중 18위로 특별히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작년에 통계청이 따로 개발한 ‘신(新)지니계수(가계 금융 복지 조사 기반)’는 2012년에 0.353을 기록했다. OECD 회원국 중 6위이고 평균치(2010년 0.314)를 훌쩍 넘는 위험 수준이다. 신지니계수는 고소득층의 소득 파악률이 높고 표본 수가 많아 기존 방식보다 정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실질임금도 하락했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의 ‘임금 없는 성장의 국제 비교’ 보고서를 보면 1997~2002년 19.4%, 2002~2007년 17.6%에 이른 실질임금 상승률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뚝 떨어져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같은 기간 실질 노동생산성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실질 노동생산성은 1997~2002년에 21%, 2002~2007년에 17.4% 상승했다. 실질임금이 하락한 2007~2012년에도 9.8%나 증가했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한 것에 비해 받는 돈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의미다. 박 연구원은 “한국의 임금 없는 성장 추세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무역수지가 27개월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수출액이 500억 달러를 돌파해도 정작 ‘내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체감 경기 하락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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