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관통한 ‘이민족’ 코드…다문화 시대 한국의 슬픈 자화상

[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왜 유비는 ‘선’이고 조조는 ‘악’인가
그리스 신화를 보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신들의 전쟁이 있었다. 두 갈래 신의 족속들은 10년 전쟁을 치른다. 제우스를 사령관으로 하는 올림포스 신족이 최후 승리를 거둔다. 제우스가 하늘을, 포세이돈이 바다를, 하데스가 지하 세계를 각각 다스리는 지배 구조가 자리 잡았다. 전쟁에 패한 티탄족은 대지의 가장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에 유배된다. 신화든 역사든 다 승자의 기록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신화의 주인공은 거의 다 올림포스 신족이다. 이민족인 티탄족 출신의 신들은 이름조차 생소하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의 가정교사였다. 알렉산더 사후 아테네 시민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씌워 고소한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는 급히 고향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지만 얼마 후 죽는다. 권력 무상이다. 왕이 죽자마자 왕의 스승을 고소한다. 그가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마케도니아 출신의 이민족이 아니고 정통 그리스인이었다고 해도 그랬을까.


아리스토텔레스도 피하지 못한 이민족의 설움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토대로 만들어진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는 15세기 말 키프로스 섬이 배경이다. 백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상에서 오텔로는 피부가 검은 무어인이다.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오텔로는 백인들도 넘보기 힘든 대귀족의 딸과 결혼하는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부하 이아고의 중상모략에 빠져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의심해 목 졸라 죽인다. 자신도 자결한다. 오텔로가 이민족이 아니었다면 감히 이아고가 개선장군 오텔로를 이간질할 엄두나 낼 수 있었을까.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황제는 루이16세, 왕비는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루이는 선량했지만 무능한 군주였다.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가족과 함께 외국 망명을 시도했지만 미적거리다가 혁명군에게 잡혔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군은 살려둘 수도 있었던 앙투아네트까지 형장으로 보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자 “빵이 없다면 과자를 주세요”라고 했다던 일화로 더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혁명군이 유포한 유언비어였다. 만일 앙투아네트가 이민족 오스트리아인 출신이 아니고 프랑스인이었더라도 평범한 왕비였던 그녀를 그렇게 마녀사냥 하듯이 악녀로 몰아 죽였을까.

알다시피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는 유비를 위주로 하는 촉한 정통론의 바탕 위에 있다. 도대체 왜 나관중은 ‘유비=선(善), 조조=악(惡)’이라는 프레임을 짰을까. 이 프레임이 만들어진 배경을 알려면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중국사를 관통하는 ‘이민족’이라는 키워드로 중국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거칠게 말하면 중국의 역사는 ‘화이(華夷)’ 간 투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화(華)는 남방의 한족이고 이(夷)는 북방의 유목 민족을 말한다. 중국 역사는 남북 대립의 역사이기도 한 셈이다.

위·촉·오의 삼국시대가 끝났다. 사마 씨 일족이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진나라를 세운 것이다(서진시대). 당시에 출간된 진수의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았다. 사마 씨가 위나라 중신들이었고 기본적으로 진나라는 위나라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진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북방 유목 민족들이 들고일어났다. 진나라는 이들에게 북방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쫓겨났다(동진시대). 북방 민족에 대한 피해 의식 때문인지 한족이 세운 촉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때부터 한족 사람들은 위나라를 기본적으로 북방의 이민족 국가와 같은 부류로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같은 맥락에서 위나라를 세운 조조에게도 악한(惡漢)·간웅(奸雄)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유비=선, 조조=악’이라는 프레임의 싹은 나관중 이전부터 이미 돋아나고 있었다.

뒤를 이어 들어선 한족의 송나라 역시 북송시대에서 남송시대로 옮겨간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쫓겨 남방으로 내려간 것이다. 동병상련이다. 남송도 동진시대처럼 촉한 정통론에 기운다. 관우에 대한 우상화가 본격화된 것도 이때다. 고향인 하동 해량과 생전의 주둔지였던 형주 일대의 지방 수호신 정도에 불과했던 관우는 남송시대에 이르러 신격화된다. 북방 이민족에게 중원을 빼앗긴 남송 정부는 국민 통합 차원에서 ‘충성과 의리의 화신’인 관우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우상화를 시작했다. 이것은 충효론에 입각한 유교를 통치 이데올?慣綏?채택한 송나라의 정책과도 통한다.


중국의 ‘화이’ 대립은 지금도 진행형
클라이맥스는 원나라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민족인 몽골족이 중국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한족으로서는 이만저만한 굴욕이 아니었다. 원나라 정권은 백성들을 국인·색목인 등의 4계급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그중 맨 아래 계층인 남인(南人)은 남송의 지배하에 있던 한족을 말했는데 개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상황이 이러한데 이들이 유비의 촉한을 정통으로 삼지 않고 북방 유목민과 동일시하던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을 리 만무하다.

절치부심하던 한족들의 권토중래 꿈을 이뤄 준 이는 명 태조 주원장이다. 원나라 말기에 봉기한 홍건적의 일파였던 주원장은 북방 유목 민족인 몽골족을 도로 북방으로 쫓아내고 명나라를 세운다. 최하층 남인이 한족의 왕조를 부활시킨 것이다. 특히 나관중은 원말명초에 태어나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경험이 있다. 한족 출신인 나관중이 한족이 세운 한나라를 계승한 촉나라를 정통으로 삼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심리학 이론 중에 ‘집단 간 편향(intergroup bias)’이라는 게 있다. 자신이 속한 집단(내집단)을 지나치게 좋게 보고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외집단)은 아주 나쁘게 평가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런 집단 간 편향은 집단 간에 편견을 유발하고 갈등을 조장한다. 전형적인 흑백논리·진영논리가 작동한다. 화이(華夷) 간 대립이 딱 그랬다.

남방 한족 사람들에게 그들의 외집단인 북방 유목 민족은 야만스러운 오랑캐였다. 유목민 역시 그들의 외집단인 한족을 짐승 취급했다. 몽골 치하에서 박해받은 트라우마가 있는 나관중에게 ‘집단 간 편향’이 생겼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족 출신의 불우한 식민지 지식인 나관중에게 몽골족인 여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한족이 아닌 동탁이나 가후 등의 인물을 아름답게 묘사할 이유도 없었다. 화이(華夷) 대립이라는 집단 간 편향의 중국 역사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신장우루무치자치구의 분리 독립 문제나 티베트 독립 문제 등도 이런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족. 우리라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처지도 아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사후 한 세기가 지나도록 ‘숭정’ 연호를 쓸 만큼 중화(中華)사상에 물들었던 우리다. 다문화 시대를 맞아 조선족 동포들은 물론이고 베트남·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많은 이민족들이 결혼·이민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 유입되고 있다.

혹시 우리가 조공을 바치던 치욕의 역사를 이제는 오히려 그들에게 요구하는 ‘소중화(小中華)사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죄 없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고소한 아테네 시민, 무죄한 오텔로를 중상모략한 이아고의 오류를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시황이, 또 명나라 영락제가 이민족을 향해 쌓아 올렸던 것과 같은 ‘마음속의 만리장성’을 지금 우리가 다시 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